124화
모두가 자리를 비운 시간.
나는 체임버홀 한가운데에 섰다.
지휘 연단에 올라간 채로 눈을 감자 아까의 연습이 떠올랐다.
머릿속에 악보가 현현하고, 악보에 따라 협주했던 모습들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다시금 떠올려도 군더더기 없는 실력과 협주.
내가 원하는 사조를 만들어 널리 알리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려질 수 있는 음악.’
혹자가 표현하지 않았던가.
내 연주는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고.
내가 원하는 것도 그것이었다.
음악을 연주하고, 만들어내는 것만으로 상상 속에 이미지가 그려지는 능력.
그것을 단순히 나의 특이점으로 두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느끼게 만드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면 각 계절이 가진 특색이 느껴진다는 말처럼.
내가 만든 곡들도 다른 사람이 들었을 때 특정 그림을 떠올리게끔 만드는 것이 나의 사조가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조를 만드는 만큼, 유념할 부분도 있었다.
‘도리어 벽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지.’
클래식이 어려운 이유는 단순하다.
그동안 쌓아온 내력들과 귀족 중심의 사고로 만들어진 고고한 자태들.
기존의 역사와 전통, 형식, 등을 이해해야 클래식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부분이 대중들에게 가장 큰 벽으로 다가왔으리라.
처음 나의 시도는 그러한 벽들이 필요 없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리어 독보적인 행보가 오히려 벽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그 반응이 올라오고 있으니까.
‘정통성을 과하게 해친다는 말.’
나는 일전에 봤던 비판적인 의견들을 떠올렸다.
대중들은 내가 오케스트라를 만든다는 말에 대단하다는 평을 내렸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아마 음악을 잘 아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행보를 낯설어하겠지.
전혀 다른 방식의 음악에 일부는 괴리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기존 클래식의 역사와 전통의 장벽을 깨고 나만의 음악 사조를 만들려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들.
하지만, 자연스럽다고 해서 그것을 당연시하면 안 된다.
‘아까 다니엘도 그랬지.’
나는 낮에 들었던 다니엘의 인터뷰를 다시금 떠올렸다.
물론 비판은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내려는 나에게 일부 감수하고 가야 하는 대목이었다.
기존의 관례를 깨트린 것에서부터 반발은 어느 정도 예상했으니까.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의견도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일정 부분 융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과 음악적으로 사조가 알려지는 것은 다른 개념이니까.’
대중은 사조를 감상하지만, 음악가들은 사조를 연구하고 체득하는 사람이니까.
기존과 다른 점을 더욱 잘 알 테지.
내 행보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사조가 더욱 전달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의견들을 잠재우는 것도 필요했다.
내가 만든 사조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존재한다면 분명 일부 음악가들은 내 사조를 배우려 하지 않을 테니까.
‘기존의 클래식 음악가들도 수긍할 수 있도록.’
본래의 생각대로 다채로운 음악을 만들되, 전통과 반대되지 않는 행보를 보여야 한다.
신선한 행보가 대중에게 사조를 전파하기 위함이라면, 기존의 클래식에 융화된 연주는 기존의 클래식 음악가들에게 사조를 전파하기 위함이리라.
그 의지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필요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연주를 보여주는 것일 테지.
하지만, 단순히 연주회를 주최하는 것만으로는 큰 호응을 받지 못할 것이다.
비판적인 생각을 가진 일부 연주자는 연주회를 보는 것을 거부할 테니까.
비판 여론도, 긍정 여론도 모두가 눈길을 돌릴 수 있는 방향.
오랜 고심 끝에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었다.
‘오케스트라 경연 대회.’
서로의 예술성을 보여주고, 연주로써 실력을 겨루는 경연.
경연에 참여하는 것은 순위 달성을 통해 커리어를 쌓는 것도 있었지만, 다른 이들의 연주를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것도 있었다.
과학에서는 학회를 통해 자신들의 업적을 보여준다면, 음악계에서는 경연을 통해 자신들의 업적을 보여주니까.
일반적인 연주회에서는 감상에 그치는 것이 경연에서는 보다 탐색적으로 연주를 바라볼 터.
게다가 정통성에서 멀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정통 오케스트라 경연에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정통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단이 될 것이다.
내 손에는 숱한 오케스트라 경연 대회의 팜플렛이 쥐어져 있었다.
비판 여론들을 향해 내 의지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자,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사조를 가장 먼저 선보일 무대.
이번 기회에 많은 것이 담겨있다는 생각에.
무대를 바라보는 눈길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
샬롯은 며칠째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더 마스터’, 이안의 오케스트라 창단 일대기.
오디션과 오케스트라 첫 합주로 굵직한 에피소드를 만들었지만, 루즈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후 에피소드에 비판론을 적절하게 수용하기로 했지 않은가.
비판론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겨내는 스토리 라인, 이제 그 방식을 어떻게 할지 관건이었다.
이미 인터뷰를 받은 대한 오케스트라를 통해 무언가 만들 수는 있겠지만, 인터뷰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보다 사실적인 장면을 연출할 수 없었다.
보다 명확하고 제대로 된 방식이 필요하던 찰나.
도리어 로드맵을 만들어준 것은 이안이었다.
“저희의 첫 연주를 오케스트라 경연에서 보여주려고 합니다.”
단순한 연주회가 아닌, 경연 대회에서 연주를 펼칠 예정이라고.
이안의 입에서 그 이유들이 고스란히 나왔다.
“더 넓은 음악을 하려면 기존 오케스트라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안의 생각은 무척 깊었다.
기존의 비판적인 시선도 알고 있고, 그 의견이 어떤 이유로 나오는지, 이를 어떻게 파훼할지 까지 모두 꿰고 있는 이안의 모습에 샬롯은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경연이라는 자리는 대중보다 기존의 클래식 연주가들이 더욱 관심을 가지는 자리였으니까.
‘더 마스터’ 방영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기회라면, 경연은 클래식 연주가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기회였다.
이안에 대한 비판론을 제시한 사람들의 눈길도 자연스레 경연에게 쏠릴 터.
샬롯 또한 기존의 클래식 연주가들을 설득시킬 좋은 무대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정통 오케스트라 경연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정통 클래식을 등진다는 비판론을 일부 해결할 수 있으리라.
논리정연한 설명에 샬롯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러면 마지막 에피소드뿐만 아니라 다른 에피소드들도 다채로워질 거야.’
라이브로 담기로 한 마지막 에피소드.
이미 연주를 라이브로 송출시킬 것이라는 말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대감을 모으고 있었다.
게다가 경연에 나선다면 경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에피소드를 더욱 다룰 수 있으리라.
단순히 연습을 하는 것과 경연 준비를 하는 것을 다를 테니까.
그 속에서 고뇌와 피드백, 여러 에피소드들까지 종합한다면 이안을 찬양만 했던 기존 에피소드들의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그동안의 고민을 한 번에 날려주는 이안의 의견에 샬롯은 한 가지를 더 얹었다.
“필요한 사항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다큐의 주인공은 이안씨니까요.”
이안이 원하는 경연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CP로서 샬롯이 해야 할 일이었다.
이안이 참가하고자 하는 경연이 있다면, 촬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샬롯의 몫일 터.
또는 이안이 첫 무대를 크게 키우고자 한다면 다른 오케스트라도 솔깃할 만큼 커다란 경연을 섭외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섭외만 된다면 대한 오케스트라와도 경쟁을 섞을 수 있을 테니까.’
규모가 클수록 대한 오케스트라와 같은 거대 오케스트라들이 함께 참여할 테지.
정통 클래식 오케스트라라면 분명 이안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하는 곳이 있을 터였다.
그러한 사람들이 이안의 무대를 보고 생각을 바꾼다면 그보다 좋은 연출은 없을 것이다.
물론, 정통을 고수하던 오케스트라가 곧바로 리히트 오케스트라를 보고 생각을 바꿀지는 미지수이겠지만.
그럼에도 샬롯은 강한 믿음이 있었다.
그동안 이안이 선보인 무대는 대단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였으니까.
새로운 장면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감에.
샬롯은 벌써부터 경연 섭외 리스트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
프라임플러스의 움직임은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라이브쇼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에 방송계는 물론 음악계에서도 많은 반응을 보낼 정도였으니까.
거기에 추가로 들어온 소식.
이안이 오케스트라 경연을 첫 데뷔 무대로 설정했다는 말에 많은 오케스트라들이 저마다의 반응을 보였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였다.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단원인 요한나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레오는 무척 긍정적인 의사를 보냈다.
“첫 출사표가 경연이라니. 이안씨라면 그럴 줄 알았습니다.”
빈 필.
200년에 가까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그들이 경연에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별도의 경연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행보 자체가 역사가 되었고, 업적이 되었으니까.
유튜브 개설 하나만으로도 전 세계에 소식이 전파 될 정도였으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명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럼에도 레오의 생각은 확고했다.
“가야죠. 이안씨가 만든 오케스트라를 보기 위해서라면.”
레오에겐 강한 믿음이 있었다.
이안이 만든 오케스트라라면 분명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여줄 것이라고.
단순히 한국 국악을 접목시킨 것 이외에도 다른 것이 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새로움과 승부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들어 있었다.
‘뉴 클래식’을 자처하며 새로운 행보를 이어가겠다고 마음먹었으니까.
그동안 놀라울 만큼 대단한 음악을 만들어냈던 이안이기에.
빈 필하모닉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그 장면을 직접 목도하고, 함께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레오는 모든 단원들을 함께 이끌기로 했다.
소식은 한국 클래식계에도 빠르게 번졌다.
숱한 교향악단에서 소식을 들은 것은 물론, 대한 오케스트라에서도 이안의 경연 참가 소식이 화두에 올랐다.
특히 소식을 접한 다니엘은 더욱 격하게 반응했다.
‘기회가 주어졌다.’
일전에 현철에게도 얘기했듯.
다니엘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안에게 수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다.
제대로 된 정통 클래식이 무엇인지 보여주겠다고.
이전에 보여줬듯, 정통에 걸맞은 클래식을 선보이라고 일갈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짜고짜 찾아가서 이안에게 이야기를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의견 전달에는 효율적이겠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가는 것은 생떼를 부리는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다니엘은 이번 경연 소식에 눈을 밝혔다.
‘A PICTURE IS WORTH A THOUSAND WORDS.’
한국어로 치면 ‘백문이 불여일견’과 같은 말이었다.
음악인은 음악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다니엘의 철학이었다.
말로 설명하기보다 정통 클래식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기에.
연습에 들어선 다니엘의 지휘봉이 평소보다 세차게 움직였다.
네덜란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네덜란드의 피아노 천재이자, 신생 오케스트라, ‘일루시아’의 단장인 콜린.
그 또한 소식에 무척 들뜬 기색을 내비쳤다.
‘어떤 음악을 만들어낼까.’
바티칸 오케스트라 경연 때부터 이안바라기가 되었던 콜린은 이안의 소식을 항상 주목하고 있었다.
오케스트라 입단 과제로 자작곡을 제시하는 것에서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거늘.
거기다 단원들과의 연습도 자작곡으로 한다지 않았던가.
이안의 실력을 가장 근거리에서 확인한 콜린은 그 곡이 어떤 곡일지 기대감에 어렸다.
공개된 과제 곡의 1악장도 대단한데.
나머지 악장들과, 단원들의 합주가 합쳐진 연주는 어떤 수준일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오케스트라 대 오케스트라로 마주할 수 있겠어.’
이미 소리를 다루는 실력은 이미 목도한 콜린이었다.
처음 마주하는 일루시아 오케스트라에게도 거침없이 피드백을 건네고, 그 피드백으로 일루시아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몇 배나 더 풍성해졌으니까.
그런 이안이 만든 오케스트라가 어떤 선율을 만들어냈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수많은 악기들의 향연과 국악의 선율까지 합친 이안만의 음악.
경연에 참여하여 그들과 마주하고,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어쩌면 우승보다 그것이 더욱 값진 것이라는 생각에.
콜린은 당당하게 로얄 오케스트라 경연에 출사표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