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25화 (125/250)

125화

로얄 오케스트라 경연.

현존하는 오케스트라 경연 중 최고를 꼽으라면 항상 대열에 들어가는 경연이었다.

특히, 그 역사와 전통은 다른 경연과 비교할 수 없었다.

영국 왕실에서 궁정 악사를 뽑는 것을 시작으로 만들어진 경연.

현재 존재하는 윈저 왕조를 비롯, 1700년대 잉글랜드 왕국 시절까지 합치면 그 기간은 무려 300년이라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했다.

현재 영국 왕실이 유지된 것만큼 경연도 오래된 것이다.

지금은 궁정 악사를 뽑는 대신, 오케스트라들의 경연으로 변화하였지만, 그 위상은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한 경연 대회에 참가하겠다는 이안의 의사에 샬롯은 크게 동감했다.

게다가 로얄 오케스트라 경연이면 샬롯도 익히 알고 있는 대회였다.

현존하는 오케스트라 경연 중 가장 깊은 역사를 지닌 경연.

경연의 중계권을 따낼 수 있다면 프라임플러스가 몇 발 더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녀는 응접실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산타클로스를 연상케 하는 백색 수염이 인상적인 노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오케스트라 경연의 주최 재단, 크라운 재단의 일원이었다.

“협조에 감사합니다. 아론 선생님.”

“허허. 아닙니다. 프라임플러스라면 우리에게도 뜻깊은 행사가 되겠지요.”

연한 웃음이었지만, 아론의 목소리에는 관록이 묻어나왔다.

음악가로서 기사 작위를 받고, 한때 영국의 클래식 붐을 일으켰던 남자이기에.

아론의 한마디, 한마디가 명언처럼 응접실을 울렸다.

“우리의 유구한 역사와 프라임플러스라는 새로운 플랫폼의 결합이 새로운 예술의 발전을 가져오겠지요.”

경연의 온라인 상연.

아론의 생각은 확고했다.

경연이 단순 음악인들의 결투로 끝내지 않도록 하는 것.

음악인들 사이에서 서로의 연주를 듣고, 반성하며 자신들의 개성을 확립하길 원했다.

더 나아가 대중들이 경연의 순위만으로 오케스트라를 보지 않고, 직접 연주를 듣고 스스로 생각했으면 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음악은 고고한 예술의 한 갈래이자, 직접 관람해야 진정 감상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파다했다.

크라운 재단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대중 친화적인 정책을 펼치지 못하는 이유였다.

지금은 과거와 달리 문화, 매체가 발달한데다 시민 의식도 상승한 상태.

과도기를 지나가는 시기이기에, ‘더 마스터’의 제안은 절호의 기회였다.

전 세계에 손을 뻗은 프라임플러스라면 대중 친화 정책에 물꼬를 틔울 수 있으리라.

“어찌 우리 경연을 영상으로 담을 생각을 했습니까?”

부드러운 질문이었지만, 그 심지는 명확했다.

아론 또한 ‘더 마스터’의 내용을 알고 있기에.

샬롯의 방문이 단순 섭외가 아님을 직감하고 있었다.

촬영 허가가 필요하다는 말은 ‘더 마스터’의 출연진이 로얄 오케스트라 경연에 방문한다는 것일 테고.

이미 언론을 통해서 그 대상이 누구인지 퍼다하게 전해지지 않았던가.

“박이안 피아니스트 아시지요?”

“잘 알지요. 한국의 박이안 피아니스트.”

아론도 이안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클래식계의 샛별처럼 등장하여 종횡무진을 이어가고 있는 청년.

피아노를 잡은 지 1년 만에 수많은 자작곡들을 발표하고 음원으로 내는가 하면, 독주회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세계의 주목을 얻은 인물 아닌가.

게다가 이번에는 다소 독특한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여 다시금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이토록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은 칠십 평생 없었기에.

아론 또한 한국 국악이 접목된 오케스트라가 무척이나 궁금하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궁금증과 기대와 별개로 아론은 무척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본선 촬영을 라이브로 한다고 하셨는데, 예선 탈락이라도 하면 어쩌러고 그러십니까?”

비웃음이 아니었다.

창단한 지 고작 한 달이 조금 넘은 시점이었으니까.

경연의 전통에 걸맞게 경연에는 숱한 오케스트라들이 오곤 했다.

최소 10년의 경력을 가진 오케스트라도 적지 않았기에.

이안의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참여했을 때 그들이 원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또한 다큐 아니겠습니까?”

샬롯은 능청스레 맞받아쳤다.

자신은 그저 촬영하는 사람이라고.

연출가로서 고민은 되겠지만, 그 또한 이안의 실적이고, 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정리했다.

실제로 로얄 오케스트라의 저력을 숱한 자료들로 확인한 샬롯이기에.

아론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한 우려들을 뚫고 선명한 실적을 보여주면 더욱 멋지지 않겠습니까?”

호오.

샬롯의 발언에 아론의 표정이 사뭇 바뀌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무한한 긍정을 알아챈 것이다.

프라임플러스라는 거대 기업의 CP 정도 되는 사람이 저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자만이 아닐 터.

매번 푸근한 인상을 가지고 있던 아론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

기대 어린 시선들이 꽂힌다.

무언가 이야기할 것이 있다는 말에 단원들이 무척 진지한 얼굴을 했다.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에 나는 천천히 할 말을 내놓기 시작했다.

“아마 우리 오케스트라 창단에 대해 여러 비판적인 시선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내 말에 사람들이 얼핏 상황을 아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히트 오케스트라를 검색하면 대단하다는 여론도 많았지만, 반대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으니까.

몇몇은 이미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듯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으로 굴할 생각은 없었다.

“그에 대해 저는 정공법을 택할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묘하게 술렁거렸다.

어떻게?

다들 그 내용이 궁금한 눈치였다.

나는 고스란히 머릿속에 떠올린 생각들을 내놓았다.

앞으로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나아갈 방향성과 어떠한 그림을 그려나갈지에 대해서.

“저는 사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곡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그 속에 담긴 이야기와 그려지는 듯 떠오르는 그림들까지 담고 싶었다고 전했다.

마치 책을 읽으면 단순히 문장이 아닌, 그 속에 내포된 작가의 뜻을 탐닉하고 영감을 얻듯.

귀로 하는 감상만이 아닌 새로운 감각을 열어주고 더 짙은 영감의 세계로 이끌고 싶다.

시간이 계속되어도, 나의 음악이 전달되려면 그래야 했다.

위대한 피아니스트란 무릇, 죽어도 남는 음악을 만든 자들일 테니까.

내 말에 몇몇 사람들은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후대에도 널리 전달되는 음악은 역사가 있어야 하고, 역사는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니까요.”

각 계절이 가진 특색을 넣은 비발디의 <사계>처럼.

슬픈 사랑 노래를 담은 슈베르트의 <세레나데>처럼.

여러 사람들이 연주를 해야, 다양한 사람을 품을 수 있고 그것은 그렇게 역사가 된다.

나는 사조라는 것을 그렇게 정의했다.

그리고, 나의 사조란 오감을 넘어 새로운 감각을 통해 음악을 느끼는 것이다.

여러명이 힘을 합쳐, 보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감각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모인 유일한 목표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곡이 <항해>입니다.”

<항해>의 이야기는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첫 항해를 떠올린 것이라고.

그렇기에 단원들의 과제 곡을 적절하게 섞어 한 곡으로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리히트 오케스트라라는 한 배에 탄 선원들이기에.

가장 먼저 우리들의 이미지를 그려서 단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 뜻을 알아챈 것인지 단원들이 연이어 긍정표를 던졌다.

그러한 사람들의 의견에 나는 쐐기를 박듯 한마디를 던졌다.

“마치 그림을 그리는 듯한 표현력과 해석. 가장 최적의 소리를 만드는 오케스트라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악기의 제한을 두지 않고 오케스트라를 꾸린 이유니까.

악기의 특색을 파악하고, 더욱 소리를 채울 수 있는 부분에 적절히 배치시킨다.

그동안 전통적으로 내려온 클래식에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던 악기더라도, 그 소리만을 차용하여 곡을 만들어낸다.

화려한 풍미를 더할 때는 트럼펫과 같은 금관 악기를 쓸 것이고, 아릿한 여운을 남길 때는 가야금과 같은 국악 현악기를 쓸 것이다.

연이은 설명에 그제야 퍼즐이 맞는다는 듯.

단원들의 표정이 이제 기대에서 활기로 차오른다.

“하지만, 혼자서 독불장군으로 나아가진 않을 겁니다.”

그것이야말로 벽을 세우는 일이니까.

소리를 만드는 주체는 내가 아닌 오케스트라이다.

단원부터 설득하지 못한다면 더 많은 음악가들과 대중들을 설득시킬 수 없으리라.

모두의 소리를 듣고, 더욱 표현하고, 그에 맞게 그림 그리듯 사조를 쌓는다.

그것이 내가 오케스트라를 창단한 의의였다.

“모두의 뜻이 합쳐진 첫 무대. 우리는 그것을 오케스트라 경연에서 보여줄 것입니다.”

로얄 오케스트라 경연.

영국 왕실의 전통을 이어받은 역사 깊은 경연 대회.

그곳에 출사표를 던졌다는 말에 단원들이 열의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첫 데뷔 무대.

처음으로 리히트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서는 것이었으니까.

무대에 오른다는 말에 사람들이 자신만의 기대감을 입으로 내뱉었다.

어느덧 그들 또한 나처럼 순위에 연연하지 않는 듯.

커다란 무대에 나선다는 걱정보단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서게 되는 것에 더욱 집중하는 듯 보였다.

“압살하죠!”

아람이 주먹을 머리 위로 올린 채 소리쳤다.

그녀의 말에 감응이라도 하듯 몇몇 단원들이 박수와 환호성을 질렀다.

이내 연습에 돌입하려는데 분위기가 전과 달랐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경연 참가 소식에 재잘댔는데.

지금은 누구 하나 입도 열지 않은 채 지휘자인 나를 향해 진지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

늦은 저녁.

다니엘은 현철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원하는 대결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 이안의 행보를 꺾고 싶다면 참가하라는 식의 이야기를 건넸다.

“로얄 오케스트라 경연이요?”

다니엘도 로얄 오케스트라 경연의 위상을 알고 있었다.

‘로얄’이라는 이름처럼 왕실과 걸맞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경연.

클래식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오케스트라로 정면 돌파를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대단한 대회를 나선다는 것만으로도 이안의 포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좋은 경연이 되겠습니다.”

이야기를 들음과 동시에 다니엘도 로얄 오케스트라에 참여할 계획을 세웠다.

로얄 오케스트라 경연이라면 대한뿐만 아니라 굵직한 이력을 가진 오케스트라가 참여하는 대회였기에.

대한 또한 클래식의 정수를 다시금 수학할 수 있는 기회이자, 다른 오케스트라에 덧붙여 정통 클래식의 진수를 보여줄 수 있는 무대였다.

정면으로 맞서는 것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클래식을 보여줄 기회라고 생각했다.

-곡은 무엇으로 하려고?-

“대한 오케스트라의 대표곡, <염라>로 할 겁니다.”

마치 미리 정해두기라도 한 듯 곧바로 답변이 나왔다.

하지만, 곡을 잘 알고 있던 현철은 묘한 의문을 품었다.

-그것도 결국 이안의 곡이잖냐.-

전대 마에스트로에 대한 헌정곡이자, 대한 오케스트라의 대표곡 <염라>.

하지만, 그 시초는 이안이 현철의 곡 <세월>의 3악장을 채운 것이었다.

피아노 선율만 있었던 것을 다른 악기들로 다채롭게 바꾸고, 4악장으로 변경한 곡.

사실상 이안이 소스를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곡이었다.

이안의 행보가 클래식적이지 않다는 말과는 상반되는 선곡.

하지만, 다니엘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래서 하는 겁니다.”

다니엘은 <염라>를 통해 이안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다.

한 악장임에도 네 개의 악장에서 나오는 듯한 선율.

체계적인 소나타 형식을 따르면서도 그 안에 현철의 심상을 녹아냈다는 것에 무척 대단하다고 평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이안은 클래식의 기틀을 깨어버린 변절자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다니엘은 <염라>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자신이 만든 <염라>를 보라고.

그 누구보다 클래식을 정통했던 이안이었거늘.

초심을 잃고 어떤 행보를 보이고 있는지 스스로 목도하라는 메시지가 숨어있는 선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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