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3천 피트 상공.
나를 비롯한 리히트 오케스트라 전원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서천 그룹이 제공한 전세기.
영국에서 있을 경연에 무사히 다녀오라는 서천그룹의 특별 후원이었다.
전세기라는 말에 단원들이 입을 떡 벌렸던 모습이 비행 2시간째인데도 생생하다.
“역시 이안씨의 명성이 대단한가 봐요.”
옆자리에 앉아있던 요한나가 빈 필하모닉에 있었을 때의 일을 내놓았다.
빈 필과 같은 거대 오케스트라는 세계 투어를 하곤 한다.
백에 달하는 인원과 악기들을 모두 옮기려면 전세기가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만들어진 지 두 달 차인 오케스트라가 전세기를 타고 갈 줄은 몰랐다고 덧붙였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후원만으로 이뤄졌다는 것에 신기하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후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서령과 같이 노후화된 악기를 지닌 단원에게 악기를 후원하는가 하면, 모두의 건강을 책임질 팀닥터까지 합세했다.
영국에 있는 서천 그룹의 지부에서도 마중 나올 예정이라고 하니.
초호화 후원에 요한나를 비롯하여 다른 단원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마 프라임플러스에 경연 스케일의 영향도 크겠지.’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 OTT 서비스를 쥐고 있는 프라임플러스.
거기에 영국에서 열리는 오케스트라 경연 소식까지 전해지며 후원의 스케일도 커졌다.
특히 이번에는 서천 그룹뿐만 아니라 다른 굵직한 기업에서도 후원을 보내왔다.
‘제온, 화정… 모두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야.’
식품, 위생, 기계, 등 수많은 것을 통솔하는 대기업들이 후원에 참여했다.
전세기뿐만 아니라, 제공되는 음식, 심지어 팀복까지.
서천이 전세기나 여러 교통수단을 지원했다면, 여타 대기업들을 통해 의, 식이 해결된 것이다.
게다가 특이한 것은 이들이 어떠한 이익도 좇지 않았다고 선언한 것이다.
처음 현철에게 후원 계획을 받아들었을 때.
나는 의아함을 숨길 수 없었다.
‘후원은 일종의 투자일 텐데.’
후원을 통해 기업은 일종의 광고 효과를 얻는다.
드라마에서도 제작 투자를 함과 동시에 PPL로 광고 효과를 얻듯.
후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 업체에서는 후원의 대가로 악기 케이스에 자사 로고가 담긴 스티커를 붙여달라는 요청도 한다던데.
서천을 비롯한 대기업들의 후원 물품들에는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일일이 확인하지 않으면 어떤 물품이 어떤 기업에서 후원해줬는지 확인이 불가할 정도였으니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단원들이 먹고 있는 과자가 후원한 대기업의 상품이라는 것 정도뿐이었다.
묘한 의문을 품는 나에게 요한나는 작게 설명을 건넸다.
“아마 이안씨의 오케스트라를 음악 그 자체만으로도 인정한다는 것일 거예요.”
요한나는 빈 필에 있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대개 오케스트라 무대에는 수많은 후원이 잇따르기 마련.
빈 필의 스케일이라면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쉽사리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그런 후원체들 중에서 일부는 후원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하곤 한다고.
이러한 것은 기업이 어떠한 특정 이익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음악이 좋아서 제공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좋은 곡을 들려줘서 고맙다는 화답이자, 앞으로 더욱 좋은 곡을 들려주라는 격려의 의미라고 설명했다.
‘서천이 그랬던 것을 이어받았나 보네.’
나는 문득 서천 그룹의 수장, 필무가 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독일에서 독주회를 펼칠 때 그의 후원은 막강했다.
라이브 공연을 중계할 엔지니어까지 모두 보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서천 그룹에서는 그 어떠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중계를 지원한 스태프 그 누구에게서도 서천의 로고를 발견할 수 없었는데.
그때가 지금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비행기는 오랜 시간을 거쳐 영국에 도착했다.
런던 히드로 공항.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온 우리들을 기다린 것은 고급 리무진 버스들이었다.
“우와아아…”
단원 여럿이 감탄 어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방금 나온 새 차량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고급 리무진 버스는 광택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게다가 버스 옆면에 크게 적힌 로고.
Licht Orchestra.
우리 오케스트라의 네이밍이 정갈하게 래핑되어 있었다.
카트를 이끌고 나오자 미리 나온 직원들이 차례로 나와 짐까지 옮겨줄 정도.
극빈 대우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놀라는 것은 물론, 지나가던 행인들도 자리에 멈춰 우리를 지켜볼 정도였다.
짐을 모두 싣자 책임자로 보이는 남성이 내게 다가왔다.
“박이안씨.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숙소까지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
로얄 오케스트라 경연.
과거 영국이 잉글랜드 왕국으로 불릴 때부터 존재했던 경연.
그만큼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곳이었다.
궁정 악사를 뽑던 경연이 지금은 오케스트라들의 경연이 되었지만, 그 명맥은 지금까지 유지되어 있었다.
이름에 걸맞게 우승팀에게는 영국 궁정에서 하사하는 트로피가 주어진다.
게다가 상금은 무려 50만 파운드.
한화로 약 8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상금 이야기에 놀라던 단원들의 표정이 선명했다.
‘재단이 영국 왕실과도 연관이 있댔나?”
경연의 주최 측인 크라운 재단.
영국의 이름난 재단 중 하나이자, 영국의 예술계를 휘어잡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특히 영국은 과거부터 예술가에 대한 지원이 무척 좋은 것으로 유명했으니까.
셰익스피어를 시작으로 예술의 부흥을 생각해본다면 재단이 가진 저력을 얼핏 짐작할 수 있었다.
거기다 모태가 과거 왕세자비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재단이라는 말까지 있으니.
호텔 전체를 오케스트라 경연 참석자들에게 제공한 것도 그만한 경제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일 테지.
나는 주최 측에서 제공한 호텔 방에 들어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막 정리가 마무리되어 갈 즈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나를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요한나였다.
“이안씨. 마에스트로도 도착하셨다는 데 같이 가보겠어요?”
레오가?
그녀가 전한 소식은 무척 뜻밖이었다.
빈 필하모닉 마에스트로의 등장.
처음 레오가 왔다는 소식에 나는 요한나를 보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그를 마주쳤을 때.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이렇게 서로의 무대를 가지고 경연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로비에서 느긋하게 앉아있던 레오가 인사와 함께 건넨 말.
그의 말 한마디에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경연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단원들이 옆에 있었다면 놀라는 것 그 이상의 감정을 느꼈으리라.
정통성을 고수하는 빈 필하모닉인 만큼, 그들은 경연에 참여하는 법이 없었다.
경쟁으로 무언가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음악을 보여주는 단체이기에.
공연 초청을 받을지언정, 다른 경연에 나가 상을 타는 일은 하지 않았다.
게다가.
‘거대 관현악단이 이런 대회에 참여할 이유는 없을 테니까.’
빈 필 정도의 거대 오케스트라는 굳이 남들의 인정을 받지 않아도, 본인들의 발자취가 곧 역사이자 기록이 된다.
경연으로 명성을 쌓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각국에서 초청이 올 터.
아무리 로얄 오케스트라 경연이 무척 대단하다지만, 이 경연으로 빈 필이 얻어갈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없었다.
그럼에도 참여한 이유.
“당연히 이안씨가 만든 곡을 듣기 위해서지요.”
듣기 위해서 왔다는 너스레를 떤 레오였지만, 나는 그의 의중을 사뭇 알 것 같았다.
새로운 변화의 길을 걷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고 있는 빈 필이었으니까.
최근 유튜브 개설을 했듯, 경연 또한 그러한 행동의 일부겠지.
더 나아가 레오는 내가 만든 오케스트라가 어떤 음악을 만들어냈는지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오히려 좋지 않겠냐고.
지난번에는 고작 요한나와 몇 수습 단원들을 데려왔었는데.
이번에는 모든 단원들이 내 곡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며 칭찬 섞인 말을 했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하나 더 있었다.
“마에스트로. 함께 오신 분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렇지. 런던에 사는 오랜 친구도 함께 왔다네.”
“그럼 다른 한 분은…”
또 다른 손님이 있다는 사실.
요한나가 그 사람에 대해 물으려고 하려는 찰나, 리허설을 위한 강당에서 연주가 흘러나왔다.
강렬한 화음이 인상적인 연주.
마치 연주의 가능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듯 화려한 소리가 문틈을 통해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침 소개할 필요를 덜었다는 듯 레오는 짧은 소개를 덧붙였다.
“모건 길버트. 런던 필하모닉에서 함께 왔다네.”
모건 길버트.
독일 오케스트라계의 별이 레오라면, 영국 오케스트라계의 별은 단연 모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빈 필 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지닌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장.
오케스트라 경연의 심사위원으로 등장해야 마땅할 두 사람이 참가자 자격으로 호텔에 들어와 있었다.
***
필립.
그는 크라운 재단의 직원이자, 이번 로얄 오케스트라 경연의 음악감독을 맡은 사람이었다.
필립은 호텔에 상주하며 경연 참가팀의 선율을 가장 먼저 듣고, 이를 극장에서 어떻게 재연할지 연구했다.
그동안 몇 번이나 로얄 오케스트라 경연을 준비했던 그이기에.
번번한 오케스트라의 참여는 필립에게 큰 충격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경연은 달랐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들이 올 줄이야.’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경연이 문제인 사람들이지 아니지 않은가.
무언가 하는 것만으로도, 그저 연주하기만 해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곡’이라는 이름으로 흥행하는 데 성공할 정도인 존재들이었다.
그러한 존재들이 경연에 참가했다는 것.
잉어들이 사는 연못에 이무기가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듣자 하니 박이안 피아니스트가 만든 오케스트라 때문이라던데…’
필립 또한 이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클래식계를 한층 더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안의 행보는 독일뿐만 아니라 영국에도 전달된 지 오래니까.
게다가 프라임플러스의 ‘더 마스터’가 방영되면서 이안에 대한 인식은 더욱 높아졌다.
덩달아 신생 오케스트라 창단 일대기를 2부로 방영한다는 소식에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영국 필하모닉의 저력과 비교하자면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100년이라는 고고한 역사를 자랑하는 오케스트라.
그들은 런던 심포니, 로열 필, 필 하모니아를 비롯해 영국 오케스트라의 Big4 중 하나였다.
4개의 산맥이라고 표현할 만큼 그들의 저력은 대단했다.
‘우리 재단이 부를 때는 응하지도 않더니.’
거대 재단이 부를 때는 아무 응수도 없던 곳이.
신생 오케스트라의 참여에 덩달아 참여했다는 것은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 부분이었다.
왕실 행사를 비롯하여 영국 궁정과 관련된 행사일 때 런던 필하모닉에 러브콜을 보내곤 했다.
자리를 빛내 달라, 빼어난 연주를 보여달라 등 숱한 이야기를 했건만.
런던 필하모닉은 그러한 요청을 일절 수락한 적이 없었다.
오직 본인들의 길을 가겠다는 듯.
본인들의 무대를 진행하고, 본인들이 꾸린 이벤트를 개최했다.
더 나아가 앨범을 만드는데도, 재단의 힘을 이용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앨범을 만들어 세상에 공개했다.
오직 자신만의 길을 가듯.
그렇기에 이번 경연 참여가 더욱 눈길이 갔다.
‘그들이 움직였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터.’
하나도 아닌 둘이나 되는 거대 오케스트라가 움직였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분명 이안의 오케스트라에 무언가 있다는 것일 터.
오케스트라계의 별이나 되는 사람들이 기대한 사람이라면 분명 무언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