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영국에 온지 일주일가량이 지났다.
그동안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호텔에서 제공한 홀에서 연습을 이어갔다.
이제 내일이면 예선전.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처음 무대를 선보이는 시간이었다.
영국에 오기 전까지 약 한 달 정도의 기간.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예선과 본선을 동시에 준비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해야 할 것이 하나 있었다.
‘예선곡이 필요해.’
<항해>는 본선을 위해 사용할 예정이었다.
예선보다 본선에서 더욱 뛰어난 두각을 보이려면 보다 완성도가 높고 제대로 된 선율을 보여줘야 하니까.
그렇다면 예선에 사용할 곡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준비 기간 중 약 2주가량을 나는 예선곡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마치 <항해>의 전주처럼.’
본선에서 올릴 <항해>가 배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였다면, 예선곡은 <항해>보다 이전의 이야기를 담은 음악이었다.
마치 <항해>에서 운항한 배의 제작 과정을 그리듯.
머릿속에 가상의 악보가 메워짐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그림이 그려졌다.
‘배가 되기 전까지 많은 시간을 보냈을 테지.’
조각배 하나를 만드는데도 많은 것들이 들어간다.
여러 그루의 나무가 필요한 것은 물론, 그 나무를 재단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게다가 그러한 나무들을 한데 이어줄 끈과 못들이 필요하고, 물이 새지 않도록 약품을 바르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머릿속에서 서서히 떠오른다.
마치 영화 속 해적선을 떠올리게 하는 커다란 배.
그만큼 많은 나무들이 필요하고, 필요한 물자는 더욱더 많으리라.
게다가 커다란 배에는 돛도 필요할 터.
돛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들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채워진다.
씨실과 날실을 조합하여 천을 만들어내듯, 현악기들이 한데 어우러져 직물 같은 연주를 만들어내고.
관악기들의 울림이 모여 점차 웅장해지는 배를 형상화한다.
하나둘씩 작은 소리들이 한데 모여 하나의 선율을 만들어낸다.
‘마치 지금 모인 단원들처럼.’
개인에 불과했던 사람들이 지금처럼 단체를 이루듯.
예선곡으로 만든 이 곡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배를 만들어내듯, 앞으로의 음악도 이렇게 만들어낼 것이라는 일종의 포부.
나는 오케스트라를 통해 사조를 확립할 것이고, 단원들과 함께 나아간다.
오케스트라 경연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나의 뜻을 예선곡에 담아 전달하겠다는 생각.
내가 그리는 생각들에 단원들도 긍정표를 던졌다.
“이안씨가 만든 곡은 음악이 아닌, 이야기 같아요.”
예선곡을 처음 들은 요한나의 평가였다.
일전에 내가 말한 ‘그림 그리듯 펼쳐지는 음악’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고.
차곡차곡 쌓이는 화음들의 배치가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설명했다.
단원들 또한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인지.
음악홀에서 울리는 소리가 더욱 풍성해져 간다.
***
경연 전날.
다니엘도 연습을 통해 이를 갈고 있었다.
제대로 된 클래식이 무엇인지 보여주겠다는 일념하에 영국행까지 택한 그였기에.
대한 오케스트라는 유례없는 연습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수 시간 동안 연습을 하고 잠깐 주어지는 쉬는 시간.
다니엘도 마른 목을 축이러 밖으로 나왔다.
정수기를 향해 걸어가는 길.
그런데 다른 홀에서 들려오던 협주의 향연이 다니엘의 발목을 붙잡았다.
‘어떤 오케스트라지?’
무척 오묘한 선율이 인상 깊은 연주였다.
바이올린과 플루트에는 짙은 힘이 느껴졌고, 피아노의 현란한 음색은 여타 악기들의 선율을 한데 모으는 듯했다.
하지만, 군데군데 그가 들어보지 못한 음색이 섞여있었다.
마에스트로 교육을 끝까지 들었음에도 느끼지 못한 묘한 음색이기에.
다니엘은 감탄과 호기심이 한데 섞인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홀의 문을 조심스레 열었을 때.
보이는 것은 다니엘이 잘 아는 인물이었다.
‘이안씨?’
다니엘의 눈앞에서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연습이 펼쳐졌다.
기존의 오케스트라 대열을 벗어난 형식.
제2 바이올린 악단이 있어야 할 위치에 가야금과 거문고 같은 국악 현악기들이 있었고, 그 뒤에는 오보에와 바순과 같은 목관 악기 대신, 태평소나 대금 같은 국악 관악기가 있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러한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미 들려오는 선율도 충분히 훌륭한 것을 고사하고.
그동안 숱한 협주곡을 수학했던 다니엘에게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이 곡은 그 곡이 아닌데.’
이안의 강연과 오디션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던 다니엘이었다.
자연스럽게 이안이 제공한 <항해>의 1악장도 들어놓은 상태.
하지만, 지금 이안이 연주하는 곡은 <항해>와 전혀 딴판이었다.
아무리 4악장 중 악장마다 변주를 통해 곡의 분위기가 달라질 순 있어도, 그 속에 내포된 화음과 선율은 비슷하기 마련.
연주를 차근히 듣던 다니엘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그새 새로운 곡을 만들었다는 건가?’
예선과 본선으로 구성되는 경연인 만큼, 곡이 두 가지인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시간.
경연 전날까지 주어진 시간은 약 한 달.
그사이에 연습을 하는 것은 물론, 곡 하나를 만들어내는 것도 힘겨운 일이었다.
다니엘도 이안의 <염라>를 모태로 헌정곡을 만들 때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골머리를 앓지 않았던가.
각 악기가 가지는 특색과 음들의 조화를 서로 맞춰야 하고, 연결 또한 끊어지지 않게끔 부드럽게 음표들을 연결해야 한다.
하지만, 단순히 악보로 만들었을 때와 실제 연주는 다르다.
만약 완성을 하려고 했다면 연습과 작곡을 번갈아 가며 하느라 시간이 무척 소진되었을 텐데.
연습할 시간이 없어야 정상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합도 가히 완벽에 가깝다.’
말이 안 된다는 표현이 이럴 때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처음에는 과연 합이 맞을 수 있을까 생각했던 악기들의 향연이었다.
합을 고사하고 음색이 서로 맞을 수나 있을까 생각했거늘.
이안의 지휘 아래 수많은 악기들이 마법처럼 한데 섞여 선율을 이어가고 있었다.
마치 서로 텔레파시라도 통하는 듯.
일부 부분은 양악과 국악이 대화라도 하듯 선율이 오가는 신비로운 장면이 연출된다.
‘이게 국악이 첨가된 선율?’
재미 교포인 다니엘도 기본적인 국악의 형식은 알고 있었다.
모든 국악에는 대부분 고수(鼓手)가 존재하듯, 리듬뿐만 아니라 곡의 분위기를 대화하듯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안의 오케스트라는 그 특이점을 무척 잘 살리고 있었다.
양악과 국악처럼 특색이 선명한 두 선율이 나아가자 마치 두 사람이 대화하듯 곡이 전개된다.
마치 무언가 일을 협의하는 듯 강렬하게 나아가면서도, 일부에는 의기투합을 한 듯 동시에 소리가 나아간다.
‘그저 화제성을 몰기 위해 선택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국악의 포함으로 전통 클래식의 기틀을 무너뜨린다 생각했는데.
협주를 듣는 내내 국악과 양악의 차이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좋다고 할 수밖에 없는 선율.
게다가 이를 연주하는 단원들의 표정에는 진지함을 넘어 결연함마저 느껴졌다.
진정 무언가 새로운 활로를 개척한다는 책임감과 자부심을 가진 표정.
그러한 진지한 기색들에 어느덧 다니엘도 감상 어린 눈빛으로 그들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다.
***
처음 경연 소식을 들었을 때.
서령을 비롯한 단원들은 놀라움과 함께 옅은 걱정도 함께 안고 있었다.
처음으로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선보이는 무대가 경연이었으니까.
경연이라 함은 결국 순위를 매기는 대회.
몇몇 단원들은 첫 무대부터 순위가 정해진다는 생각에 움츠러들곤 했다.
하지만, 연습이 진행되면 될수록 그 걱정을 조금씩 줄어들었다.
‘할 수 있다.’
이안의 지휘와 곡은 마치 마법 같았다.
영국 출발 2주 전에 곡을 내왔을 때만 해도 걱정이 컸었는데.
지금은 연주하는 동안 확신이 가득 찼다.
마치 이대로 연주하면 충분히 뛰어난 연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
어느덧 단원들 사이에서는 우승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단원들은 정기 연습 이외에도 따로 시간을 내어 연습을 할 정도로 대단한 열의를 보냈다.
마법과 같은 합은 그러한 단원들의 열정과 이안의 지도력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서령은 루이사에게 언질을 주곤 밖으로 나왔다.
오랜 시간 연습을 하며 눈도 뻑뻑하고, 손도 빨갛게 달아올랐건만.
거울 속 서령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 있었다.
지금 이렇게 즐거운데 아픈 것이 무슨 대수랴.
서령은 차가운 물로 세수 한 번 더, 따뜻한 물에 손을 마사지하고는 화장실을 나섰다.
화장실을 나서자 맞은 편에 후드를 눌러쓴 남자가 하나 보였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려던 찰나, 서령의 걸음에 맞춰 남자가 그녀를 뒤따라오기 시작했다.
똑같은 발걸음과 속도.
순간 섬찟한 마음에 서령의 가슴이 마구 쿵쾅댔다.
점차 남성이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지던 찰나.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원이지?”
한 남자가 영어로 질문했다.
혹시 오케스트라를 알아보고 다가온 것인가?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창단부터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는 말에 충분히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알아봐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표시를 하려고 하는데.
남자가 이어 내뱉는 말은 다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일 예선 무대를 망친다면 5만 달러를 주겠어.”
5만 달러.
한화로 약 6천만 원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그 돈이라면 첼로를 새로 사는 것은 물론, 부족한 기본기를 채울 수 있는 레슨까지 받고도 남는 금액.
그동안 돈이 없어 음악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서령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서령은 이 일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또한 알고 있었다.
뉴스에서 비슷한 경우를 봤으니까.
스포츠계에서 선수를 매수하여 일부러 지게 만들어 부당이득을 취하는 경우를 본 일이 있었다고.
지금 남자가 제안하는 것도 그와 다를 것이 없었다.
범죄의 손길이 다가왔다는 생각에 서령의 몸이 옅게 떨렸다.
게다가 작은 체구의 서령에 비해 남자는 가히 2배에 가까운 덩치를 가지고 있었기에.
꼭 붙잡은 두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노우.”
서령은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평소 같았으면 소심한 성정에 말은커녕 눈치만 봤을 터인데.
사실을 인지한 순간 온몸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도리어 남자는 싸늘한 서령의 목소리에 당황한 것인지 뒷걸음질을 쳤다.
이내 일이 틀어졌다는 생각에 몸을 돌려 도망치는 남자.
이쯤 되면 서령도 급히 연습실로 돌아가야 하는데, 다리가 순식간에 남자를 향해 내디뎠다.
그녀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따라가야 한다.’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단원이니까.
단원으로서 이러한 행태를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에게 음악을 할 기회를 준 이안을 협잡하려는 놈이었기에.
서령은 두려움 따위 잊고 남자를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