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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28화 (128/250)

128화

10분간의 휴식 시간이 끝나고.

이제 다시금 연습에 돌입할 시간이었다.

이미 오랫동안 연습을 했지만, 내일이 예선인 만큼 단원들의 의지도 대단했다.

휴식시간 끝이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몇몇은 이미 악기를 든 채 준비를 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이미 준비가 마친 상태라 생각했거늘, 자리 하나가 비어있었다.

“서령씨 어디 갔나요?”

“아까 화장실에 간다고 하고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지각은커녕, 매 연습마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하곤 하는 서령이?

타지에 와서 어디 길이라도 잃은 것 아닌가 걱정됐다.

“잠깐 개인 연습 시간 가지겠습니다.”

나는 선화에게 인솔을 맡겨놓고 홀을 나왔다.

복도는 무척 한산했다.

루이사의 말대로라면 화장실에 간다고 했었으니.

나는 우선 화장실 방향을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걷고 있을 무렵, 나는 반대 방향에서 오는 다니엘과 마주쳤다.

이미 큰아버지에게 대한 오케스트라의 참여 소식을 들었던 터라 그와의 만남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인사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까.

“다니엘, 혹시 곱슬머리 여자를 보지 못했습니까? 동양인이고, 체구는 조금 작은데다가 안경은 쓰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에게 서령의 외적 사항을 몇 가지 늘어놓았다.

다니엘은 잠깐 생각하더니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체구가 작고 곱슬머리 소녀라면… 아까 화장실로 가는 걸 봤습니다.”

서령이 틀림없었다.

나는 짧은 감사 인사를 전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아챘는지, 다니엘도 나를 따라왔다.

“무슨 일 있습니까?”

다니엘의 질문에 나는 상황을 설명했다.

좀처럼 약속에 늦지 않는 사람이 쉬는 시간 중에 사라졌다고.

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탓에 찾으러 나섰다고 덧붙였다.

다니엘도 내 이야기에 다소 심각한 듯 말을 이었다.

영국은 치안이 비교적 양호한 편이긴 하지만, 일부 관광지에서는 절도와 같은 단순 범죄가 일어나곤 한다고.

하지만, 호텔 안인 만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애써 위로했다.

화장실 근처에서도 서령을 찾지 못해 고민하고 있던 찰나.

저 멀리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서령이 눈에 들어왔다.

“서령씨.”

내 호명에 서령은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점차 다가오는 서령의 모습은 뭔가 이상했다.

땀 때문에 회색 트레이닝복은 검게 물들어 있었고, 곱슬머리는 산발이 되어서 헝클어져 있었다.

게다가 방금이라도 뛰고 온 듯 벅찬 숨을 몰아쉬는 모습에 나는 곧바로 질문을 이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이상한… 사람이… 있어서요…”

얼마나 뛰었던 것인지, 숨을 고르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참 숨을 고르던 서령이 꺼낸 이야기는 다소 심각한 문제였다.

“누가 저한테 예선 무대에서 실수하라고… 그러면 돈을 주겠다고 했어요.”

마치 스포츠계의 승부조작과 같은 일 아닌가.

금전적 대가를 명목으로 일부러 실수를 만드는 일.

서령 한 명의 실수이지만, 오케스트라에 끼칠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도리어 깨끗한 유리일수록 흠집과 깨진 것이 잘 보이는 것처럼.

서령의 첼로 연주가 하나 튀는 순간 마치 유리에 실금이 번지듯 이질감이 느껴질 것이다.

그걸 심사위원들이 모를 리 없겠지.

“그 사람을 따라갔다 오느라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서령은 휴식 시간을 어겨서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애써 그녀를 위로하며 어깨를 토닥였다.

다치지 않았으면 다행이라고.

타지에서 그런 제안을 받으면서 얼마나 무서웠을지, 떨리는 서령의 손이 그때의 무서움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건 예삿일이 아닙니다 이안씨!”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다니엘이 분노 섞인 목소리를 냈다.

다니엘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눈매로 부라리며 자신의 뜻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것은 음악인의 긍지를 깨는 일이라고.

음악인에게 연주를 망치라는 말은 자존심을 꺾으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일갈했다.

서령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무섭긴 했지만,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고.

그래서 끝까지 뛰어가서 어디로 가는지만 보고 왔다고 표현했다.

문제가 있다면 미리 바로 잡는 것이 맞다는 생각에 나도 그들과 뜻을 맞췄다.

“따라오세요.”

나와 다니엘은 서령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나아갔다.

계단을 오르고 긴 복도를 따라가는 길.

서령이 왜 그리 숨 가쁘게 돌아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한참 걸음을 재촉하던 서령이 향한 곳은 또 다른 음악홀.

다른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고 있는지 안에서는 악기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나는 그 안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콜린은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자신의 단원이 다른 오케스트라 단원에게 실수를 사주하다니.

처음 이안이 들어왔을 때 갑작스런 상황에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너무 갑자기 일이 벌어지면 의심부터 한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단원의 증언과 CCTV 증거, 게다가 단원이 실토까지.

상황은 명확했다.

‘50만 달러도 있을 리 없을 사람이!’

콜린은 사주한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피아니스트.

스무 살 남짓 청년이 50만 달러라는 거금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네덜란드 콘체르테 오케스트라에 소속할 당시 오랫동안 함께 연습을 한 사람이자, 최근 있었던 리스트 콩쿨에서도 같이 나갔던 친구이자 동료였다.

콜린이 리스트 콩쿨에서 2위를 달성했을 때, 누구보다 안타까워한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대체 왜 그랬습니까?”

“…불안했습니다.”

콜린의 질문에 한참 망설이던 단원은 이윽고 사건 경위를 말하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연습량에 비해 실력이 늘어나지 않은 것 같은 개인 컴플렉스에 이어 들려오는 소식이 너무 무거웠다고.

특히 오케스트라 경연을 참여하러 왔더니 빈 필하모닉과 런던 필하모닉이라는 거대 오케스트라가 왔다는 사실에 주눅 들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신생이라면서, 피아니스트가 무려 전직 빈 필 수석 피아니스트였던 요한나이지 않았던가.

그들보다 절대로 우수한 연주를 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이러한 일을 저질렀다고 실토했다.

결국 문제의 원인은 열등감 때문이었다.

‘내가 그리 순위에 연연하지 말자고 했거늘!’

늘 순위 경쟁에 연연하지 말고 우리의 연주를 하자고 말했건만.

하지만,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단원 관리는 단장의 기본 소양인데, 그것조차 하지 못하지 않은가.

단원의 마음을 관리하지 못하는 것도 단장으로서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이고, 마에스트로로서 자격 미달이었다.

게다가 단원이 잘못한 주체가 이안이지 않은가.

그토록 선망하고, 바티칸 오케스트라 경연에 아무 불평 없이 함께하여 피드백까지 아낌없이 준 박이안 피아니스트.

보답할 것도 없어 미안한 마음만 쌓여가던 중에 이러한 일이 터질 줄이야.

콜린은 이 상황을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안씨. 모두 제 불찰입니다. 기권으로 화가 삭여지실진 모르겠지만, 이게 최선인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그리고 단원분께도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단원이 폐를 끼쳤습니다.”

콜린은 거침없이 허리 숙여 사과했다.

이미 흐려진 물이라 되돌릴 수 없는 사안인 것을 잘 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원에게도 말로 사과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겠지.

그렇기에 자리를 비키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이안의 연주를 듣고, 직접 겨루고 싶었지만.

그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유일한 속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과는 잘 받겠습니다. 하지만 기권은 하지 마십시오.”

콜린은 이안의 태도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안의 표정은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 변화가 없었다.

도리어 옆에 있던 다니엘이 한마디를 건넬 정도였다.

“하지만, 이안씨. 단장으로서 책임을 져야 하는 사안입니다.”

다니엘의 말에 틀림이 없었다.

단원의 행동이 음악인의 긍지를 꺾는 처사였고, 무척 잘못된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이번 문제는 단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상황이 번진 만큼 이대로 출전한다면 여러 이야기가 나올 테니까.

잘못을 했음에도 뻔뻔하게 출전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한 문제들도 짊어지는 것이 단장이기에.

콜린은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안의 답은 명쾌했다.

“그럼 저희끼리 아는 일로 하면 되지 않습니까.”

***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가는 길.

다니엘은 계속해서 이안에게 눈길이 갔다.

어마어마한 일에도 불구하고 감정적 동요가 전혀 보이지 않는 표정.

숱한 오케스트라 무대에서도 떨리지 않던 다니엘이었지만, 이번 사안은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어떻게 저리 아무렇지 않게…’

하마터면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망칠 수 있는 사안 아닌가.

게다가 첫 무대에서부터 커다란 실수가 일어나면 그동안 쌓였던 이안의 기대감이 곧바로 화살이 되어 날아올 사안이었음에도.

이안은 그저 초연하기만 했다.

너무나 초연한 얼굴에 다니엘은 이안의 의중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도저히 알 수 없던 나머지 다니엘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안에게 물었다.

잘못을 했으니 기권을 받아주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냐고.

기권하지 말라고 이야기한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단원의 잘못 하나로 무대 전체를 버리기엔 아까운 오케스트라입니다.”

이안이 내뱉은 말은 단순했지만, 묵직했다.

짧게 설명하는 이안의 말임에도 거장의 품격이 느껴졌다.

세간에서 이안을 향해 ‘젊은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도리어 이안은 서령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무섭진 않았는지,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더 나아가 서령의 선택에 대해 물어봤다.

비록 실제는 아니었지만, 거금에 대해서는 혹할 수 있는 문제였으니까.

“만약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저는 오케스트라에 남아있지 못했을 테니까요.”

서령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실제 그 정도 금액이라면 오케스트라가 아니더라도 새로 음악을 배울 수 있을 금액이었으니까.

새로운 첼로도 사고, 전문 레슨까지 받을 수 있는 여유로운 금액.

하지만, 서령이 그러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오케스트라에 계속 있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만약 돈을 받지 못하더라도, 고의로 실수했다는 것을 들키지 않았더라도 죄책감 때문에 단원으로서 무대에 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내놓는 말에 서령의 의지가 가득 묻어났다.

그 모습은 다니엘이 보기엔 신기할 정도였다.

‘단원이 저리도 오케스트라를 아끼다니.’

엄청난 제안을 거절했던 이유가 고작 오케스트라에 남아있고 싶어서라니.

다니엘은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묘한 존경심이 들었다.

단장과 단원이 아닌, 그저 동료로서 서로를 대하는 모습에.

두 사람의 대화만 봐도 화합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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