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올림픽.
이름만 들어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국제적으로 큰 행사이지 않은가.
가히 전 세계가 참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전 세계인의 축제.
그러한 거대 행사를 유치하기 위해 각 국가가 엄청난 공을 들이는 이유는 비단 즐기기 위함은 아니었다.
오죽하면 그런 말이 있겠는가.
올림픽은 자체만으로도 돈이 된다.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만으로도 그 국가의 상징성을 부여한다.
게다가 개최국이 얼마나 잘 살고, 좋은 곳인지 알릴 수 있는 수단.
올림픽 하나만으로 얻을 수 있는 관광 수입만 수백억에 달한다.
그 축제가 올해 런던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기에.
개막식과 폐막식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바빴다.
가장 바쁜 것은 이번 런던 올림픽 개·폐막식의 총연출을 맡은 앨런이었다.
앨런 베일리.
그는 영국의 유명 영화감독이자, 무대 감독으로 아카데미 감독상까지 수상한 사람이었다.
앨런이 만든 좀비 영화는 호러 영화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
그 밖에도 유수의 연출을 맡았던 그였기에.
영국 올림픽 위원회에서 앨런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유의 서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앨런에게 한 남자가 찾아왔다.
“마틴씨, 개막식 무대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습니까?”
앨런이 마틴에게 물었다.
마틴은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락 밴드, 스트롱콜드의 메인보컬이자 리더였다.
제목은 몰라도 노래를 듣는 순간 ‘어! 이 노래!’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수많은 명곡을 가진 그룹.
개막식 참여 소식만으로도 전 세계 팬들이 기대 어린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앨런의 질문에 마틴은 그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뭐합니까. 주제곡은 미라클에게 뺏겼는데.”
“허허~ 주제곡이 개막식의 전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넉살 좋은 앨런의 반응에 마틴은 포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
미라클.
스트롱콜드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밴드였다.
영국 락 밴드계의 강아지와 고양이 같은 느낌이랄까.
비슷한 시기, 락 밴드라는 공통점, 등 여러 가지가 겹치는 탓에 항상 비교가 되는 앙숙 같은 관계였다.
이번 올림픽 주제곡을 미라클이 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마틴은 아예 개막식 무대 참여를 거부할까 생각할 정도.
마틴이 남아있는 것은 미워할 수 없는 앨런의 부탁 때문이었다.
“올림픽이 끝이 아니잖아요? 혹시 압니까? 이번 개막식 때 뚜렷한 성과를 보이면, 다음 올림픽 때 스트롱콜드가 주제곡을 맡을지.”
앨런의 설득에 무대를 맡기로 하긴 했건만.
공식 주제곡을 맡지 않았다고 해서 무대가 편한 것은 아니었다.
올림픽 개막식 무대는 말 그대로 국가의 저력을 보여주는 커다란 행사이기에 단순한 퍼포먼스로는 오를 수 없는 무대였다.
이번 런던 올림픽 개막식 스케일도 상상을 초월했다.
여왕의 출연은 물론, 영국이 낳은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무대, 수많은 팝 아티스트들의 참여와 마임 하나로 세계를 웃게 만든 영국 코미디언의 출연까지.
영국이 문화 강국임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뮤지컬급의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영국의 위상이 걸려있기에, 부담될 수밖에 없는 무대.
갈피를 잡지 못하던 마틴에게 앨런은 자신의 생각을 넌지시 던졌다.
“오케 경연 대회 다녀와서 생각해봐요. 이번에 되게 독특한 오케스트라가 나온다던데?”
“오케스트라가 거기서 거기죠.”
락 밴드임에도 스트롱콜드는 독특하게 여러 콜라보를 진행한 밴드였다.
여타 다른 밴드들은 물론, 한국 K-pop 아이돌, 심지어 런던의 오케스트라 산맥인 Big4 중 하나와도 협업을 해본 마틴이기에.
일반적인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더 이상 신선하지 않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
로열 오페라 하우스.
런던 최고의 오페라극장이자, 실내 음악의 정수로 통하는 곳.
서령도 어릴 적 교과서에서만 봤던 풍경이 실제로 펼쳐지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2,000석에 달하는 객석.
가히 사람들로 둘러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다.
사람들의 시선과 스포트라이트의 열기가 고스란히 내리쬐자 서령의 손이 긴장감에 떨렸다.
서령은 긴장감을 내려놓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연습 때만큼만 하자.’
서령의 머릿속에 처음 예선곡을 받았던 때가 떠올랐다.
모든 단원들이 놀라워하던 것이 서령에게도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경연 참여 의사를 밝힌지 2주 만에 새로운 곡이라면서 가져왔던 곡.
그 사이 곡을 만들었다는 것도 대단한데, 그 시간에 모두의 성향을 파악한 듯 만들어놓은 악보는 단원들을 한 번 더 놀라게 만들었다.
심지어.
‘첼로에 내 상태를 반영해서 넣어줬어.’
다른 첼리스트를 통해 첼로의 기본기를 하나씩 쌓고 있지만, 당장 경연에 선보일 수준은 되지 못했다.
이를 인식한 듯, 이안이 만든 예선곡에는 첼로 파트는 1번, 4번 현을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연주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었다.
그덕에 서령도 뒤처지지 않고 빼어난 연주를 선보일 수 있었다.
그러한 이안의 배려에 보답해야 한다고, 실수하지 않는 것을 넘어 굵직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떨리던 손이 멈췄다.
‘시작한다.’
허공을 톡톡 건드리듯 지휘봉이 움직이자 서령을 비롯한 모든 단원들이 자세를 고쳤다.
Attention.
곡을 시작하기 직전 주목을 모으는 것.
이안의 눈길이 모두를 훑고 나자 지휘봉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작에 걸맞게 서령이 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잉과 스타카토를 오가며 화음을 형성하는 과정.
첼로의 묵직한 현악 선율을 시작으로 점차 양악 현악기의 음색들이 쌓여간다.
양악 현악기의 소리가 그칠 즘에 국악 현악기들이 소리를 이어받는다.
처음에는 각자의 소리를 저마다 내는 것처럼 펼쳐지던 소리는 피아노와 여타 악기들이 더해지며 점차 하나의 선율을 만들어낸다.
마치 한 층 씩 화음의 탑을 쌓아가듯 흘러가는 멜로디.
그래서 그럴까.
지휘가 4분의 4박자로 흘러간다는 것만 아는 서령임에도 이안의 지휘가 특별하게 보인다.
‘마치 말하는 것 같아.’
기본기를 모두 알지 못하는 서령이기에.
그녀가 아는 지휘는 그저 박자에 따라 지휘봉을 휘두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런 서령이었음에도, 이안의 지휘에는 뭔가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지휘봉이 닿는 곳에 강한 의지를 전달하기로 하듯, 지휘봉이 향하는 쪽에 소리가 변화한다.
이안의 동작이 커지면 소리가 커지고, 동작이 작아지면 소리가 작아진다.
이안의 지휘는 피아노를 치는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달랐다.
피아노를 통해 이안의 이야기를 내놓았듯, 이번에는 지휘봉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내놓는 것처럼 보였다.
온몸을 움직여 지휘하는 이안의 모습은 마치 몸으로 의지를 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진심 어린 자세로 오케스트라를 통솔하는 이안의 모습에.
서령의 머릿속에 이안의 조언이 떠올랐다.
“단순히 악보를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것처럼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곡의 풍미가 달라집니다.”
그것을 몸소 실현하듯, 이안의 눈길과 손길이 묘하게 움직인다.
단원들과 허공을 오가는 눈은 마치 공중에 무언가 보는 듯하고, 손에 들린 지휘봉은 무언가 그림을 그리듯 곡선과 직선을 그려가며 움직인다.
이어서 서령은 예선 무대에 오르기 전 이안이 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항해>를 나가기 전, 배를 만드는 과정을 그린다고 생각해보세요.”
이안의 주문에 따라 서령은 머릿속에 상상을 더한다.
배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옮긴다는 생각으로.
무거운 목재를 옮긴다는 상상을 하자 절로 활에 힘이 가해진다.
모든 것이 이안의 말대로 되는 신비한 경험에 서령의 눈빛이 더욱 매서워졌다.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서, 곡을 완성한다는 생각이 더해진다.
이안의 12번째 자작곡, <조선>은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
만찬회는 예선전을 통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주최 측의 약소한 선물이었다.
본선을 앞두고 만전을 기하라는 의미이자, 경연을 축제처럼 느끼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숱한 오케스트라의 단원과 단장들이 모이는 순간.
나 또한 그 자리에 있었다.
예선 심사로 결정된 본선 진출팀은 총 8개 팀.
레오의 빈 필하모닉 또한 그 8개 중 하나에 속해 있었다.
앞으로 3일 뒤, 런던 오페라극장에서 본선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예선 통과를 축하합니다.”
나를 먼저 발견한 레오가 예선 축하 인사를 건넸다.
나 또한 레오에게 멋진 연주 잘 봤다는 뜻을 전했다.
레오는 빈 필의 이름으로 이러한 경연을 나온 것은 처음이라고, 묘하게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덩달아 레오는 이안과 비슷한 경력의 오케스트라가 기권했다는 소식을 접했다며 아쉬운 소리를 내뱉었다.
네덜란드에서 온 오케스트라라는 말에 나는 곧바로 그들이 누구인지 직감했다.
‘결국 기권했지.’
내 의사에 따라 콜린의 오케스트라 단원의 잘못이 알려지진 않았다.
하지만, 사건 다음 날 콜린은 곧바로 나에게 개인적으로 찾아와 다시금 사과를 건넸다.
또한, 이번 일에 대해서는 기권을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다음을 기약하겠다고 덧붙였다.
“부끄러움에 도망치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나는 콜린의 의견 또한 존중했다.
그 또한 지휘자이자 단장이기에, 오케스트라가 제대로 된 선율을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기권하는 것이 맞을 테니까.
내가 기회를 준 것과 별개로 그것이 콜린의 선택이라면 그 또한 존중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아, 그리고 이쪽이 내가 말한 런던 필의 단장, 모건입니다.”
“모건 길버트라고 합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예선무대도 무척 독특하더군요.”
회발에서 연식이 느껴지는 런던 필의 마에스트로.
모건 길버트가 내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악수를 하며 느껴지는 손의 굳은살이 그동안의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영국의 Big4 오케스트라 중 하나, 런던 필.
1932년에 만들어져 빈 필하모닉보다 경력은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 대신 대중 친화적인 성과를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이안씨에게도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런던 필은 다양한 시도로 명성이 자자하거든요.”
“뭐 그저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나아갈 뿐입니다.”
모건은 이번 경연 참여도 비단 빈 필의 요청 때문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계속 다양한 시도를 보이려면, 요즘 오케스트라의 트렌드를 파악해야 한다고.
경연은 그런 자리로서 안성맞춤이라고 설명했다.
뛰어난 오케스트라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이자, 경연으로 불타는 의지들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는 무대.
런던 필의 수장, 모건의 뜻은 무척 확고했다.
나 또한 런던 필의 행보는 잘 알고 있었다.
빈 필이 정통 클래식의 정수를 무대에서 여지없이 보여준다면, 런던 필은 이를 밖으로 가져오는 데 성공한 케이스였다.
다른 필하모닉급 오케스트라들보다 먼저 음원 시장에 뛰어들었고, 굵직한 음원들을 발매하곤 했다.
게다가 런던 필은 뜻이 맞는 음악가와는 콜라보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한 번은 카타리네 스튜디오와도 콜라보하여 애니메이션 주제곡을 만들 정도였으니까.
오케스트라계에서 변화를 꾀하려는 곳들 중, 선두 주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초기에는 많은 이들이 부정적인 시선을 보냈지만, 지금은 결과가 증명하지 않습니까?”
모건의 말에서 자부심이 묻어났다.
현실적으로도 맞는 말이었다.
현존하는 오케스트라 중 런던 필 만큼 대중적으로 알려진 오케스트라는 드물었으니까.
이름을 알지 못해도, 런던 필의 음악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있을 정도.
애니메이션, 게임, 등 여러 신선한 주제에 콜라보를 이어간 덕이었다.
모건은 이번에 또 다른 새로운 행보를 나아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주제곡을 함께하자는 제안도 들어와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중입니다.”
올해 런던 올림픽을 장식할 주제곡.
올림픽 개막식에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국가에서 인정받은 음악가라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
더군다나 주제곡을 선보일 예정이라는 것은 영국을 대표할 위치가 된다는 의미.
런던 필이 얼마나 빠르게 나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진보적인 두 오케스트라를 따라가려면 저도 분발해야겠습니다.”
레오가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케스트라로서 새로운 행보를 나아가고 있는 리히트와 런던 필을 본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레오는 나와 모건에게 조언을 구하듯 한마디를 던졌다.
그 순간, 모건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마치 무거운 현실을 내려놓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항시 자신이 하는 것이 새로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하십시오.”
이미 자신들이 나아가고 있듯, 다른 사람들도 나아가고 있다고.
아무리 새로운 행보라고 해도 누군가 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경고 섞인 말투였다.
조언보다는 경고에 가까운 말수에 레오는 다소 당황한 듯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모건의 말은 레오에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건의 시선 끝에는 내가 있었으니까.
모건이 했던 말은 빈 필이 아닌, 리히트 오케스트라, 더 나아가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의 태도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모건은 리히트 오케스트라에 대해 비판론을 가진 음악가 중 하나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