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33화 (133/250)

133화

“이건 예의가 아니지요. 총연출자로서 중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올림픽 연출가들이 모인 사무실이 떠들썩했다.

런던 필의 수장인 모건 길버트가 갑작스런 참여 불발 소식에 항의하러 방문한 것.

하워드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총연출 측의 반응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초기에 먼저 상호 협력을 제안한 것이 바로 연출 측.

모건과 하워드 사이에 연결 다리를 놓아준 것도 올림픽 총연출을 맡은 앨런 베일리였다.

그 사안이 불발되었다면 응당 책임은 중간 다리를 놓아준 앨런이 져야 하는 것 아니냐며.

모건은 노발대발하며 이야기를 털어놨다.

하지만, 런던 올림픽의 총연출자, 앨런은 무척 여유로운 표정으로 화답했다.

“확정 난 사안도 아니었고, 이미 정해진 것을 뒤엎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앨런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오케스트라가 참여한다는 전제하에 주제곡 제작이 진행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1차적으로 미라클이 완성하기로 한 터라 런던 필 측은 주제곡 악보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참여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상태로 거론되어 제안까지 하긴 했지만, 도리어 런던 필의 보류로 확정되지 않은 사안이었다.

“도리어 책임의 소재는 런던 필 측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본래 주제곡은 오케스트라와 협작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래야 본 무대에서 더욱 원활한 진행이 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런던 필하모닉은 로얄 오케스트라 경연 참여를 문제로 뒤늦게 차후 참여 의사를 보류로 해뒀던 상황.

그 때문에 다른 팀들이 이미 연습을 하여 갈피를 잡아가는 중인 것에 비해, 주제곡은 하워드 홀로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하워드 홀로 오케스트라 선율을 입힐 수 없었기에, 주제곡은 반쪽에 불과한 상태였다.

핑계를 댈 수 없는 사안에 모건은 앓는 소리를 냈다.

이내 다른 이야기를 생각하던 모건은 다급함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영국의 정통성 하면 단연 우리 런던 필 아닙니까? 어떻게 우리가 아닌 한국의 리히트 오케스트라와 할 수 있습니까?”

모건은 정통성을 지켜야 한다며 항변했다.

특히, 올림픽 무대라는 중요한 사안에 외국의 오케스트라를 기용하는 것이 말이 되냐며.

영국의 대표적인 예술 의식을 보여주는 무대에 영국인이 아닌 다른 사람을 낼 수 없다고 표현했다.

게다가 런던 필은 영국의 4대 오케스트라 중 하나이니까.

그 정도의 급이 아니라면 개막식에 오르는 의미가 무엇이겠냐며 당위성을 설명했다.

하지만, 앨런의 표정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미 미라클과 스트롱콜드. 두 밴드가 참여한 것만으로도 영국의 정통성은 보여줄 수 있습니다.”

세계인이 인정하는 영국 락 밴드.

브리티쉬 팝에 이어 영국의 락 문화를 여지없이 보여줄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것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더 나아가 영국에서의 조화를 상징하기 위해 런던 필을 기용했을 뿐.

만약 밴드의 음색을 더욱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런던 필의 존재는 더욱 필요 없었다.

밴드의 특색을 강화하기 위해 클래식을 덧댈 순 없으니까.

“그래도 총연출 아닙니까. 이러한 분쟁에는 중재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말씀하셨듯이, 저는 총연출입니다.”

총연출은 로드맵을 그리는 사람이지, 분쟁을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특히 이번 사안은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해서라도 낄 자리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밴드의 리더가 선택을 했고, 상대방도 오케이 사인을 보낸 만큼.

이제는 그들이 어떤 무대를 만들지 기다려주는 것이 총연출이 할 일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게다가 두 밴드의 리더가 동시에 이안씨를 선택했지 않습니까. 영국 락 밴드의 양대 산맥이 같은 사람을 지목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연출의 진심 어린 말에 모건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더 이상 말해 봤자 일어나는 것은 없다는 생각에.

모건은 그저 밖으로 나가버렸다.

***

이른 아침부터 두 밴드의 리더가 나를 데리러 호텔로 왔다.

제대로 된 사안을 점검하기 위해 총연출가를 만날 예정이라고.

차에 탑승하자 그들은 곧바로 올림픽 연출 사무실로 향했다.

2층 총연출가의 방으로 향하던 찰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런던 필의 지휘자께서 웬일이십니까?”

모건 길버트.

런던 필의 수장이 다소 씩씩거리는 표정으로 복도를 걸어 나오고 있었다.

우리를 발견한 모건은 이내 표정을 숨기고 천천히 다가왔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주제곡 무대를 맡게 됐다고요?”

질문의 형태를 띤 말이었지만, 억양은 비꼬는 것에 가까웠다.

마치 지난번에 내게 새로운 것을 한다고 자만하지 말라고 했듯.

심지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말투였다.

“다소 익숙지 않은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영국 국민들이 좋아하려나 모르겠습니다.”

핀잔 섞인 모건의 말에서 의도가 보였다.

옅은 분노가 느껴지는 말투.

본래 주제곡을 맡았던 자신의 자리를 빼앗겼다는 생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말투였다.

그러한 모건의 반응에 하워드와 마틴이 되레 너스레를 떨었다.

“저는 무척 좋았습니다만, 문제가 될까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되레 좋지 않았습니까?”

전날 투닥거리던 두 사람이었건만.

이번에는 합이라도 맞춘 듯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더 나아가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보여준 연주는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 같았다며 칭찬 섞인 말을 내뱉었다.

두 사람의 반응이 그러해서 그럴까.

모건은 별다른 말 없이 우리를 지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들어가실까요?”

두 사람의 안내에 따라 방에 들어가자 푸근한 인상의 남자가 나를 반겼다.

활짝 웃었을 때 입가 주름이 돋보이는 남성.

앨런 베일리.

앨런은 영국의 저명한 영화감독이자, 이번 올림픽 연출을 맡은 사람이었다.

나 또한 그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분노 바이러스라는 독특한 컨셉으로 국내에서도 큰 흥행을 얻었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 밖에도 아카데미 감독상과 같은 굵직한 업적을 가진 사람이었다.

“반갑습니다 이안씨.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앨런은 특유의 입가 주름을 내보이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로열 오케스트라 경연에 참여하는 것부터 알고 있었다고.

특히 ‘더 마스터’에서 본 나의 교황 행진곡 제작기를 인상 깊게 봤다고 말했다.

“두 분이 아주 든든하겠습니다. 이런 아군을 얻고 말입니다.”

앨런은 차근히 올림픽 무대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특히 올림픽 주제곡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뤘다.

본래 미라클 밴드와 오케스트라와 협업을 통해 만들어내기로 했던 곡.

하지만, 런던 필이 오케스트라 경연을 문제로 협업을 보류했었다고 덧붙였다.

그 탓에 다른 팀들은 이미 8개월 전부터 기획을 완료하고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미라클이 일정 이상 곡을 만들어뒀기에 진도가 과하게 느리진 않을 것이라 설명했다.

게다가 스트롱콜드 또한 자신들의 곡을 하기에, 적응만 빠르게 된다면 무대 준비는 원할 것이라 판단했다.

“혹 이안씨가 생각한 연출 방법이 있습니까?”

앨런은 기대 어린 시선을 보냈다.

전날 하워드가 말했던 것처럼, 주제곡은 개막식의 시작을 장식하는 만큼 독특한 연출이 필요했다.

이미 여타 무대들도 뮤지컬급으로 연출이 준비된 상황.

앨런은 무대에 참여하는 만큼, 내 의견도 들어보고 싶다고 표현했다.

나는 그의 말에 미리 다운 받아 두었던 영상을 하나 틀었다.

연미복을 입은 남자가 드럼 앞에 서서 연주를 준비한다.

하지만, 연주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인지 드럼을 치다가 자꾸 스틱을 놓치는 실수를 한다.

이내 멈칫하던 영상은 편집의 힘을 빌려 바뀌기 시작한다.

하나씩 친 드럼 소리를 편집으로 짜깁기하여 음악으로 바꿔낸 결과물.

더 나아가 피아노까지 한 음씩 친 것을 편집하여 하나의 음악으로 만들어낸다.

한국에서는 ‘재능 낭비 갑’, ‘연주는 못하지만, 편집은 잘하지.’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영상이었다.

“영국 각지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이렇게 편집하여 하나로 만드는 것은 어떻습니까?”

올림픽이 평화와 화합의 상징인 만큼 영국인들의 화합이 중요한 무대일 것이다.

모티브로 삼은 영상처럼 사람들이 연주하는 피아노 음을 하나씩 따와 음악으로 만든다면.

화합과 함께 이미지를 만드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영상을 보던 앨런은 사뭇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맙소사. 이안씨, 혹시 우리의 프로젝트를 훤히 꿰고 있습니까?”

앨런은 놀랍다는 말을 반복했다.

올림픽을 알리는 카운트다운 영상도 같은 형식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거리의 숱한 표지판과 차 번호판 등을 촬영한 것을 연이어 보여주며 독특한 카운트다운 영상을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만약 그다음에 내가 말한 형식의 연출이 이어지면 무척 자연스러울 것 같다고 평가했다.

4개의 국가가 합쳐진 채로 만들어진 영국인 만큼, 그 통합과 화합을 상징하는 것이 주된 목표로 잡은 듯 보였다.

“피아노 섭외가 관건이겠네요.”

영국은 무려 128개의 크고 작은 주로 만들어진 국가였다.

같은 디자인의 피아노를 배치하고, 연주하려면 그만한 피아노가 필요할 터.

하지만, 총연출자인 앨런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안씨가 참여한다고 하면 모든 업체가 협찬하지 않겠습니까?”

앨런의 너스레에 하워드와 마틴도 장난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이 동조할 것이라고.

자신들도 벌써부터 음악이 상상되어 흥미로운데, 차후 어떤 음악이 탄생할지 기대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

“소개하겠습니다! 오늘의 로드니쇼 게스트는…! 이번 런던 올림픽의 개막식 연출을 맡은 앨런 베일리입니다!”

로드니쇼.

영국의 대표적인 민영 방송사 ITV에서 진행하고 있는 토크쇼였다.

가히 영국의 국민 토크쇼라고 해도 될 정도.

특히, BBC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로드니의 입담은 매번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곤 했다.

이번 쇼는 올림픽 개막식에 대한 기대가 올라가는 타이밍에 만들어진 자리였다.

앨런이 스테이지로 올라서자 방청객들이 뜨거운 박수로 앨런을 환영했다.

“앨런씨는 이미 영상미로 따지면 비교할 사람이 없죠.”

MC인 로드니의 입에서 앨런의 필모그래피가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전 세계 좀비 영화의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을 시작으로, 협곡 사이에 팔이 낀 채 7일간 생존한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까지.

영상미는 물론, 장르 자체에 새로운 기틀을 마련한 앨런이었다.

그렇기에 로드니는 앨런의 선택에 더욱 기대 어린 시선을 보냈다.

“세간에 화제를 말한다면 단연 이번 개막식에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참여를 꼽을 수 있겠죠? 처음엔 런던 필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고 들었는데. 어찌 된 일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두 밴드가 리히트 오케스트라를 선택했을 뿐이죠.”

“본래의 오케스트라 세션을 포기하고 리히트를 선택한 것도 신기한데, 후발 주자인 스트롱콜드의 마틴도 리히트를 선택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다소 빠듯한 일정임에도 흔쾌히 수락한게 신기하면서도 감사할 따름이죠.

앨런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린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영국 락 밴드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두 밴드의 선택을 받은 이안에 대한 이야기.

특히, 경연 무대에서 이안의 연주를 듣고 온 두 사람이 같은 선택을 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더군다나, 이번 주제곡의 시작 연출은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안씨가 직접 연출했거든요.”

“리히트 쪽에서 연출도 제안한 건가요?”

“예, 처음엔 그저 아이디어 정도를 부탁했는데, 그 생각이 너무 좋아서 이안씨의 아이디어 그대로 연출하기로 했습니다.”

앨런은 이안이 준비한 연출 방안에 대해 설명했다.

영국 각지에 피아노를 보내고, 건반을 누르는 모습을 편집하여 하나의 음악으로 만들어낼 것이라고.

모든 영국인들의 화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는 말에 방청객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는 올림픽 주제곡.

벌써부터 반응은 뜨거웠다.

올림픽 개막식 준비위원회, 영국인이라면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는 연출을 선보이겠다 선언.

대서특필 된 기사는 빠르게 퍼져나갔다.

영국뿐만 아니라 대한민국까지.

교황 행진곡에 이어 오케스트라 창단, 올림픽 개막식 무대라는 어마어마한 행보에 사람들의 반응 또한 빠르게 올라왔다.

ㄴ 올림픽 틀면 이안을 볼 수 있는 거임??

ㄴ 크으~ 주모! 여기 국뽕 한 사발 추가요!

ㄴ 무대 연출까지 짰다는데, 전문가랑 같이하면 어떤 무대가 나올지…

올림픽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이번 올림픽 개막식에 대한 기대감도 점차 올라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