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34화 (134/250)

134화

앨런이 건넨 개막식 카운트다운 영상은 단순하지 않았다.

런던 전역에서 숫자와 관련된 사진들을 찍어 만들어낸 카운트다운.

거리 번호를 사용한 것은 물론, 자동차 번호판, 가게의 세일 숫자, 축구선수의 등 번호까지, 온갖 것들을 활용하여 카운트다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숫자들이 하나의 의도로 사용되는 모습.

앨런은 이러한 연출을 통해 화합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런던 전체의 올림픽 기운을 넘어, 영국 전역의 화합과 통합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내가 생각하는 그림 또한 이와 비슷했다.

‘각 지역에서 사람들의 연주를 모아온다.’

피아노를 치지 못해도 된다.

건반을 누를 수만 있다면 가능한 일.

한 음씩 한 컷으로 만들어 연결하여 음악을 만들 생각이었다.

피아노도 한 음씩 친다고 해서 곡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개의 손가락을 동시에 움직여 화음을 만들 수 있듯.

그렇게 하나가 된 소리를 조명할 생각이었다.

처음 자유롭게 연출 구상을 해보라는 말에 꺼낸 말이었는데.

이야기를 듣던 총연출자, 앨런은 영국인들의 화합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며 내가 구상한 방안을 적극 수용했다.

“영국 올림픽 위원회와 상의를 마쳤습니다.”

연출에 동의한 것은 물론, 나에 대한 기대감도 내비쳤다고.

많은 이들의 연주가 어떻게 하나가 될지 지켜보겠다는 의견까지 내비쳤다고 전했다.

위원회에서는 전국의 거점 도시들에 피아노를 보냈고, 남녀노소 구애받지 않고 연주를 담았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 1차 편집을 거친 영상이 내 눈앞에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개별 음들을 편집해뒀어요.”

함께 모니터를 바라보는 여인.

그녀는 다름 아닌 프라임플러스의 CP, 샬롯이었다.

하워드의 언질에 연출 방안을 생각할 때부터 샬롯은 내게 큰 관심을 보였다.

어떤 음색을 만들 것이냐는 질문에서부터, 향방까지 자세히 물어봤던 샬롯이었기에.

그녀가 어떤 마음을 갖고 영국에 남아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제게 맡겨주세요!”

샬롯은 영상 편집에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경연 무대를 마지막으로 촬영을 끝내고 스태프들도 모두 철수했건만.

샬롯은 미국에 돌아가지 않고 계속 남아있었다.

그녀는 연출에 대해서는 자신이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잔존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해야 할 것은 주제곡으로 사용될 곡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것.

처음 할 것은 사람들이 보낸 영상들을 순서에 맞게 배치하는 것이었다.

‘연결이나 세부 편집은 샬롯이 한다고 했으니까.’

본래 편집을 하면 끊기고 화면이 흩어지기 마련.

하지만, 샬롯은 그러한 우려들에도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것을 방증하듯, 샬롯은 내가 말한 음들의 배치를 정확하게 소리로 나타나는 데 성공했다.

몇몇 음들을 살피던 샬롯은 의문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이안씨, 이 음은 다른 음과 같지 않아요?”

샬롯이 지칭한 것은 1옥타브 레.

이번 주제곡에 많이 사용되는 음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해당 음을 표현하는 샘플은 하나가 아닌 무려 3가지.

같은 건반을 성인 남자, 여자아이, 노인이 각각 연주한 버전이었다.

분명 계이름 상에서는 같은 음이었지만, 그 음색이 조금씩 달랐다.

“같은 음이지만, 미세하게 다릅니다.”

같은 건반에서 나오는 음색임에도 소리가 조금씩 달랐다.

건반을 누르는 무게감이나, 손가락을 세운 정도, 누르는 시간까지.

아주 미세한 차이일지 모르지만, 그 변화로 만들어지는 소리의 풍성함은 결이 달랐다.

하지만, 샬롯은 그 미세한 차이를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 그저 신기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동안 이어진 음 분석과 배치.

3시간가량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자, 이제 샬롯씨 차례입니다.”

***

‘음 분석만 한참 했었지.’

샬롯은 이전 작업을 떠올리면서 몸서리쳤다.

영국 각지에서 올라온 영상들을 모두 검수하는 과정이 필요했기에.

샬롯은 눈이 빠질 기세로 영상들을 검수하고, 사용할 수 있는 음들을 뽑아 정리해뒀다.

과하게 잡음이 들어간 경우도 있었고, 녹음 과정에서 소리가 깨지는 경우들도 있었다.

그런 부분들은 갈무리하여 빼둬야 했다.

무척 귀찮고 세세한 작업이었지만, 샬롯은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힘들더라도 하고 싶었다.

연출가로서 올림픽 무대에 영상을 올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업적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셈이니까.

게다가 그동안 이안이 음악을 만드는 과정을 전부 지켜봤던 샬롯이기에.

어떻게 이런 음악을 만들어내는지 체감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컸다.

‘실전은 오랜만이네.’

최근 들어 샬롯은 편집툴을 만질 일이 없었다.

CP라는 직급에 걸맞게, 샬롯은 대부분 확인 절차를 할 뿐, 직접 편집을 하는 것은 직원들의 몫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지금의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시간과 노력이 있었기에.

편집툴을 건드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샬롯은 금세 자리를 고쳐잡고 단축키를 활용하여 빠르게 타임라인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이안이 배치해둔 대로 하나씩 이어붙이되, 간극이 최대한 느껴지지 않도록 사이브 웨이브를 매만진다.

작업은 무척 빨랐다.

숙련자 중의 숙련자였던 샬롯 덕에 순식간에 배치된 파일들이 하나로 연결되고, 간극 또한 부드러워졌다.

그러다가 샬롯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손가락을 멈췄다.

‘이건 소리가 조금씩 다른데…?’

영국 각지에서 보내온 피아노 소리.

한 사람이, 한 공간에서 녹음한 것이 아니다 보니 당연하게도 소리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방금도 샬롯이 지적한 것처럼 사람에 따라 같은 건반을 눌러도 소리가 달라지기도 하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다소 사안이 달랐다.

녹음기기의 성능과 그 위치나 피아노를 얼마나 세게 쳤느냐에 따라 녹음 파일에 기록된 소리는 천차만별.

영상마다 음량이 다른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보통 이런 편집 과정에서는 소리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소리의 차이가 큰 부분을 제외하거나 평탄화 작업으로 소리를 일률화 하곤 했다.

갑작스레 소리가 커지고 작아지면 자연스럽지 않게 느껴질 테니까.

소리를 누구보다 감각적으로 느끼는 이안이라면 분명 그 간극을 느꼈으리라.

‘혹시… 의도한 건가?’

그동안 이안이 보여준 것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곡의 셈여림만으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이안이었으니까.

샬롯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잠깐 내려놓고 이안이 편성해둔 대로 편집을 이어갔다.

음성뿐만 아니라 영상도 샬롯의 소관이었다.

영상 속 피아노의 피사체를 고정시키되,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지 않게 편집한다.

마치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하나의 피아노로 연주를 하듯.

영상이 완성되자 샬롯은 시험 삼아 재생 버튼을 눌렀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

덩그러니 놓여진 피아노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부드럽게 연주를 이어가는 사람도 있고, 피아노를 칠 줄 몰라 건반만 겨우 누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편집이 더해진 화면은 모든 사람들이 조금씩 등장하며 건반을 누른다.

따로 누르는 건반들이지만, 교묘한 편집이 더해지자 사람들이 누른 건반은 이내 화음을 만들어낸다.

마치 모든 이들이 하나의 곡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매끄러운 영상과 함께 소리들이 번져 나간다.

영상을 매끄럽게 할 수는 있지만, 잘라낸 소리를 완벽하게 하나로 만드는 것은 무리.

그러나 샬롯은 다른 곳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선율에 흐름이 생겼어.’

이안이 크고 작은 소리들을 내버려 두었던 이유를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평소에도 이안이 셈여림을 통해 음색을 표현하듯.

이안은 볼륨의 차이마저도 소리의 특색으로 활용한 것이다.

힘이 들어가야 하는 부분에서는 어른이 건반을 강하게 누른 소리를 넣고, 여린 부분에서는 아이들의 손길을 앞세워 은은하게 퍼뜨린다.

연주가 재생되는 내내 샬롯의 팔에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안이 만들어낸 음악은 이해의 폭을 벗어나 있었다.

전후 피아노 음색을 모두 기억하고, 볼륨의 차이까지 활용하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그렸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안의 머릿속에는 모든 영상들의 흐름이 담겨있기라도 한 것일까.

20년 경력의 CP조차 눈치채지 못한 부분을 단숨에 활용하는 이안의 모습에.

샬롯은 기대 어린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

중간 점검.

개막식을 준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거치고 간 후였다.

하지만, 미라클 밴드의 주제곡은 최근에 정리가 되었던 탓에 이제야 중간 점검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총연출을 맡은 앨런은 도리어 기대감이 어렸다.

‘어떤 화면을 가져왔으려나.’

피아노의 음색들을 한데 섞어 다른 소리를 만들자는 의견.

앨런은 이안의 의견을 적극 수용한 것은 물론, 이안이 음악을 만들어오겠다는 말에 적극 찬성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이안의 옆에 있던 사람은 앨런도 아는 사람이었다.

‘프라임플러스의 CP가 편집을 한다라.’

앨런은 총연출이기에 앞서 영화감독이었기에, 프라임플러스의 저력을 잘 알고 있었다.

뛰어난 안목과 편집 감각과 연출 능력.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샬롯이었기에.

음을 만들어내는 이안과 영상을 만들어내는 샬롯의 합작이 어느 정도일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준비되면 시작해주십쇼.”

앨런의 말에 이안은 준비해온 영상을 재생시켰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사람들의 연주가 편집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단순한 영상으로는 부족한 것들이 많았다.

‘어쩔 수 없는 편집의 한계이지.’

1초.

한 음이 소리를 내기엔 짧으면서도 긴 시간이었다.

게다가 음악은 소리 하나가 연달아 나오는 것이 아닌, 앞뒤 소리가 유연하게 연결되어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소리들을 이어붙인 영상만으로는 다소 빈약했다.

이안도 그것을 아는지 영상만 트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어느덧 피아노 앞에 안은 이안은 피아노 뚜껑을 열고 곧바로 건반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여기에 선율을 추가했다고?’

영상 속에서 나오는 음색들은 분명 주제곡의 베이스 화음들이었다.

이미 존재하는 화음의 조합들이라 음을 뽑아내는 과정만 잘했다면 소리는 크게 문제가 없는 상태.

하지만, 이안의 손에서 나오는 소리는 기존의 주제곡에서 무언가 더해진 소리였다.

단 며칠 만에 선율을 추가한 것.

게다가 마치 편집점으로 끊기는 소리를 보강이라도 하듯, 이안의 연주가 더해지자 끊어지던 파열음들이 조금 약화됐다.

거기에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하워드씨, 기타 파트를 부탁드립니다.”

미라클의 리드보컬, 하워드는 갑작스런 요청에 눈을 끔뻑였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하워드는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멍한 표정을 한 채 기타를 잡았다.

하지만, 이내 선율에서 익숙한 소리를 찾은 듯, 자신 있게 기타에 손을 내질렀다.

갑작스런 협주였건만.

하워드는 곧잘 유려한 연주를 이어갔다.

놀란 것은 하워드뿐만이 아니었다.

‘미리 기틀을 다져놨네.’

갑작스런 요청에도 하워드가 연주할 수 있었던 이유.

여러 선율을 추가했지만, 결국 하워드가 만든 주제곡의 골자를 벗어나지 않은 덕이었다.

이미 하워드가 만든 주제곡을 들어본 앨런은 그 차이를 더욱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안이 피아노를 약하게 치자 영상에서 만들어졌던 화음들이 도드라졌던 것.

화음들의 조화는 이미 앨런도 들었던 주제곡의 베이스 화음들이었다.

주제곡을 만든 하워드는 그 화음들을 눈치채고 곧바로 기타를 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 마법과도 같은 일.

한 차례 시범 연주가 끝나자 이안은 하워드에게 한 마디 건넸다.

“시작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밴드가 더욱 돋보일 수 있도록 설계한 부분이거든요.”

하워드가 다시금 부분을 살피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영상을 틀고 이안이 연주를 시작하자, 이번에는 하워드는 익숙한 듯 정확한 부분에 기타를 쳤다.

스트로크를 펼치는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을 뿐인데.

더욱 강렬해진 일렉 기타의 선율이 피아노 화음들을 감싸듯 퍼져나간다.

벌써부터 앨런의 표정이 환해졌다.

화합을 강조하고자 했던 모든 내용이 다 들어가 있지 않은가.

영국의 각 지역 사람들이 한 음씩 눌러 만들어낸 화음 영상, 이안의 연주, 하워드의 기타 소리까지.

이번 것은 대박이라는 확신이 떠올랐다.

게다가 지금은 중간 점검차 연주한 것 아니던가.

앞으로 오케스트라와 전체 밴드의 음색이 더해지면 어떤 음악이 탄생할지.

앨런은 기대 어린 시선으로 이안과 하워드를 번갈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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