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이안이 개막식 무대에 합류하고 2주가량이 지난 시점이었다.
반쪽짜리였던 주제곡은 이안의 손길이 닿고 완성의 경지에 가까워져 있었다.
이제 연습을 통해 빈자리를 메우고, 디테일을 더욱 다듬을 시기.
미라클의 리더, 하워드는 매번 연습을 할 때마다 이안에 대한 칭찬을 참을 수 없었다.
“매번 새로운 곡을 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껏 많은 곡을 내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어요.”
40년 동안 밴드를 이끌어오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라고.
단순히 연주하는 것이 아닌, 음악 그 자체에 동화되어 소리를 내는 것 같다고 전했다.
연이어 놀라웠다고 말하는 하워드의 앞에는 스트롱콜드의 리더, 마틴이 앉아있었다.
“그리 놀라웠습니까?”
마틴은 하워드의 반응에 낄낄대며 말을 이어갔다.
불과 몇 주 전에는 서로의 음악을 맞추지 못하여 앙숙과도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던 둘이건만.
이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면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처럼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틴의 질문에 하워드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걸 보십시오. 차마 휴대폰으로 담을 수 없는 감동이었지만, 이거라도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마틴은 하워드가 건넨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영상의 시작, 노트북에서 들리는 듯한 소리가 연습실을 울린다.
마치 편집으로 소리를 만들어낸 듯 뚝뚝 끊어지는 피아노 소리들.
화음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끊어짐이 있는 탓에 조금은 기계적으로 들린다.
그러한 상태에서 이안이 피아노로 손가락을 뻗었다.
화려한 손가락 세례에 선율을 더욱 풍성해지고, 끊어짐보다는 피아노 음색이 섞이는 것에 더욱 집중된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영상 속 이안의 연주는 무척이나 절묘했다.
노트북에서 나오는 소리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소리들을 배치하여 소리가 한데 섞이도록 만든다.
거기에 밴드의 드럼과 기타 소리가 들리자, 어느덧 피아노 화음들은 메트로놈처럼 박자를 맞추며 진행된다.
피아노와 밴드의 협작.
피아노만 있었을 때 분위기를 밴드가 이끌어 올리고, 밴드들이 있었을 때 사뭇 튈 수 있었던 소리들을 피아노가 움켜쥔다.
영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까지.’
이안의 오케스트라, 리히트 오케스트라까지 주제곡에 가세하자 소리는 더욱 웅장해졌다.
마치 오륜기에 담긴 올림픽 정신을 표현하듯.
각국의 인재들이 한데 섞인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합세하자 화합의 의미가 더욱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이어져 들려오는 선율은 또 어떻고.
마틴은 오케스트라 경연 무대에서 느꼈던 감각을 다시금 떠올렸다.
생소한 악기들의 향연이 교묘하게 마틴의 심장을 울렸던 기억.
그 감각이 고스란히 떠오르고 있었다.
“정말 직접 보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마틴의 표현은 진심이었다.
휴대폰 촬영 기능으로는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기색을 온전하게 담아내지 못했기에.
전체적인 그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벅찬 감각이 흘렀다.
마틴 또한 40년 동안 밴드를 이끌어오며 다양한 음악을 접한 사람이었음에도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가히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문득 영상을 보던 마틴은 이내 눈을 휘둥그레 뜨고 하워드에게 물었다.
“잠깐, 이제 2주밖에 지나지 않았습니까?”
“내 말이 그 말일세.”
하워드가 바로 그것이 중요한 포인트라는 듯 미간을 좁혔다.
주제곡 제작을 맡은 만큼 하워드는 주제곡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개막식의 처음을 장식하는 만큼, 분위기를 이끌어 내야 하고,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자연스레 반응할 수 있도록 쉬운 화음의 연속이어야 했다.
그뿐이랴, 악보에 음표를 새길 때는 좋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실전에서는 어그러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아무리 반쪽짜리 주제곡이라지만, 하워드도 한 달 넘게 걸린 작곡 작업이었거늘.
이안은 단 2주 만에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은 물론, 하워드가 만들어낸 곡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각 영상마다 볼륨이 다른데 그마저도 연주의 일부분으로 사용했답니다.”
허어…
마틴은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저 그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금 휴대폰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
하워드의 말대로 온갖 선율들 아래에 베이스 화음을 만들어내는 영상 소리마저 볼륨의 차이를 활용하여 흐름이 존재했다.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느끼지 못할 부분이지만, 밴드의 리더인 마틴과 하워드는 그 차이를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음이 없는 드럼도 세게 칠 때와 약하게 칠 때 느껴지는 뉘앙스가 달라지기에.
음악에서 강세는 무척 중요한 요소였다.
다만,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실전에서 모든 악기들의 선율을 비교하여 즉각 변동시켜야만 하거늘.
그 모든 확인 과정을 머릿속에서 하고, 다른 선율과 완벽하게 맞췄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마틴과 하워드가 이안의 실력에 대해 한창 토론을 펼치던 중.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이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틴씨도 계셨네요.”
마틴은 이안을 보자마자 영상에서 봤던 놀라운 것들을 쏟아내듯 털어놨다.
음악이 좋은 것은 물론, 주제곡으로써 손색이 없을 지경이라고.
이 모든 결과물을 단 2주 만에 만들었다는 것에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이안은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하워드가 만든 곡이 이미 완성에 가까워서 비교적 손댈 것이 없었다고.
기존에 사용된 화음에 덧댄 것밖에 없다며 공을 하워드에게 돌렸다.
“그나저나 자네, 이안씨에게 볼일이 있다고 왔다 하지 않았던가?”
하워드의 말에 이안이 마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마틴은 자신이 이곳에 왜 왔는지 떠올렸다.
‘개막식 마지막을 장식할 곡.’
마틴이 온 이유는 이안에게 편곡한 악보와 음원을 주기 위해서였다.
하워드의 미라클은 주제곡을 선두로 세워 개막식의 첫 장을 여는 역할.
반대로 마틴의 스트롱콜드는 자신들의 명곡을 개막식의 대미를 장식하는 역할이었다.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곡으로 선정된 만큼 좋은 곡이라는 것은 표현할 필요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번 올림픽 무대를 위해 편곡까지 하고, 밴드 멤버들과 연습을 한 상태.
이번에 이안의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참여한 만큼 악보를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상을 확인한 마틴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도리어 이안씨에게 맡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영상을 보니 더욱 확신이 생겼다.
이미 숱한 자작곡을 만들고, 오케스트라 경연곡도 손수 자신이 만든 자작곡이지 않은가.
40년 경력의 밴드 리더, 하워드를 놀라게 하고, 총연출가인 앨런마저 놀라게 만들 정도의 실력자.
그런 인물에게 곡을 내어준다면 더 좋은 무대가 탄생할 것이란 가능성이 몸속에서 일렁였다.
본래라면 가방 속에 있는 악보와 CD를 건네줬을 테지만.
이미 생각을 마친 마틴에게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늦은 시각.
나는 영국 올림픽 위원회에서 제공한 연습실에서 악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낮에 마틴이 건네주고 간 악보.
스트롱콜드의 명곡, 의 악보였다.
“이안씨에게 편곡을 맡기고 싶습니다.”
마틴의 선언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하워드의 표정이 선명했다.
올림픽 개막식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분명 마틴은 올림픽에 맞게끔 자신의 곡을 편곡해뒀을 터였다.
런던 필을 기다리느라 제대로 작업을 시작하지 못한 미라클 밴드와 달리 스트롱콜드는 오케스트라를 추가하는 작업일 뿐이기에.
작업 현황을 따지려면 이미 스트롱콜드는 완성되기 직전의 상태였을 것이다.
자칫하다간 그동안의 노력을 수포로 돌리는 것일 수도 있을 텐데.
마틴의 의견은 무척 강경했다.
“하워드씨가 보여준 영상을 보고 확신이 섰습니다. 보다 곡을 원활하게 만들려면 이안씨에게 전권을 주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선언에는 하워드도 이해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또한 주제곡이 이렇게 풍성해질 줄 몰랐다고.
마치 마법과 같은 상황에 마틴의 생각을 이해한다고 덧붙였다.
마틴은 자신의 팀원들은 자신이 설득할 테니, 원곡을 매만져달라고 부탁하며 원곡 악보와 앨범 파일을 건넸다.
‘도리어 나한테는 좋은 일이지.’
분명 마틴의 실력이라면 편곡된 곡도 무척 좋으리라.
하지만, 2차적으로 뼈대가 만들어진 곡은 다시금 손대기엔 한계가 명확할 것이다.
아무리 곡을 매만지는 것을 받아들이더라도, 편곡했던 부분을 다시금 헤치는 것은 편곡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매력적인 부분을 살리고, 보강할 부분을 찾기엔 원곡을 손대는 것이 훨씬 쉬웠다.
그 부분을 찾기 위해.
나는 음원을 재생시켰다.
‘첼로를 활용한 도입부.’
스트롱콜드의 독특한 선택이 돋보이는 곡이었다.
팀파니의 묵직한 북소리는 마치 심장 소리처럼 쿵쿵 울린다.
거기에 첼로의 스타카토가 더해지자 박자는 더욱 분명해지고 리듬감이 살아난다.
‘세상을 지배하라’라는 제목처럼 세상을 호령할 듯 음색이 앞으로 나아간다.
거기에 덧댄 마틴의 목소리는 하워드의 강렬한 샤우팅과 달리 부드럽게 곡을 감싼다.
마치 묵직한 목소리로 응원하듯.
담담하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곡의 특징이었다.
‘반복적인 화음의 배열.’
눈을 감고 음악을 재차 듣자 머릿속에 악보가 떠올랐다.
첼로의 선율과 팀파니의 박동, 그밖에 전자 키보드가 더해진 멜로디까지.
차근히 맺히는 악보들에 이어 그림들이 그려진다.
묘하게 머릿속에 헹가래를 하는 선수들이 떠올랐다.
축하와 응원의 메시지가 감도는 듯 사람들의 미소 어린 표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잔잔하게 화이팅 하자는 이야기를 건네는 듯한 그림에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하나 더해졌다.
‘이걸 더욱 강하게 만들려면…’
가상의 악보에 새로운 음표들이 맺히기 시작한다.
기존의 화음을 해치지 않은 채 추가되는 선율들.
원곡이 잔잔하게 밴드 멤버들이 사람들에게 응원을 건네는 것이었다면, 편곡 버전은 올림픽을 응원하는 모두의 열성 어린 응원을 담는 것이 목표였다.
마치 2~3명이 응원할 때보다 10명, 100명, 1,000명이 응원하는 스케일이 다르듯.
더해지는 악기들로 올림픽 열기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끔 만든다.
그 기운을 펼쳐내듯,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유영하기 시작한다.
기존 곡의 화음을 답습하듯 이어지는 선율.
머릿속에 떠오르는 악보가 고스란히 현실로 펼쳐진다.
다소 단조로울 수 있는 기존의 소리를 덧대어 피아노가 더해지자 이전보다 훨씬 풍성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지만, 본래 첼로의 음색이 돋보이는 였기에.
피아노만으로 연주를 추가하고 채워가기엔 한계가 극명했다.
현을 튕기는 특유의 분위기는 현악기만의 전유물이었으니까.
우선 피아노로 그림을 그려가려던 찰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을 때 확인한 얼굴은 무척 익숙한 얼굴이었다.
“앗, 단장님 연습 중이셨네요?”
“안녕하세요 단장님!”
첼리스트 서령과 플루티스트 아람이었다.
기본기가 아직 부족한 서령을 위해 아람이 도와주고 있었다고.
최근 오케스트라 경연 때문에 좀처럼 시간을 내지 못한 탓에 늦은 밤을 활용하여 연습하려고 했다고 덧붙였다.
“단장님은 뭐 하고 계셨어요?”
“개막식 마지막 무대 곡을 편곡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피아노 가까이로 다가온 아람은 악보를 보고 옅은 탄성을 질렀다.
유명하다 못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명곡을 편곡한다는 사실이 사뭇 놀라웠는지 아람은 연속해서 탄성을 터뜨렸다.
두 연주가의 등장에 내 머릿속에 악보가 반짝였다.
관현악의 선율이 추가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마침 정확히 관악과 현악을 담당하는 단원이 들어올 줄이야.
“함께 연주해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