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37화 (137/250)

137화

내일이면 개막식을 끝으로 일정이 끝난다.

오케스트라 경연 우승은 물론, 이번 런던 올림픽 개막식까지.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데뷔전은 예정보다 훨씬 성대하게 치러지고 있었다.

개막식 무대를 앞두고 일찍 정리를 하려던 찰나, 큰아버지가 전할 소식이 있다며 방으로 찾아왔다.

“유엔에서 너를 평화 메달 후보로 올리고 싶은 모양이다.”

유엔 평화 메달.

유엔 측에서 전 세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분야별 대표 인물 중에서 세계 평화와 인권 신장을 위해 힘쓴 인물을 후보로 선정하고, 각계 지도자의 투표를 통해 수여하는 것이었다.

큰아버지는 유엔이 문화 부문에서 나를 추대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큰아버지가 건넨 서한에는 유엔의 뜻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To. 이안 박.

그동안 세계 평화와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한 이안씨의 노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 한국 남북 정상회담 축하 무대에서 뛰어난 연주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곡을 전파한 이안씨의 수고를 무척 높게 평가합니다.

국경을 초월하여 음악으로 세계인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이안씨의 행보에 평화 메달 후보에 등재하고자 합니다.

노고를 치하한다는 말과 함께 서한에는 나를 메달 후보로 지정하게 된 이유에 대해 빼곡하게 서술해놓았다.

남북 정상회담 축하 무대에서 <평안>을 연주한 것은 물론, 올림픽 개막식 무대에 참여하는 것까지.

국제적인 무대에서 음악으로 분위기를 만드는 나의 행보를 높게 평가한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그들은 6·25 전쟁 70주년 무대에서 보여줬던 퍼포먼스도 무척 감명 깊었다고 덧붙였다.

“아마 북한을 시작으로 교재 기부를 한 게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북한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는 교재 기부.

교재를 구매하기 힘든 세계의 고아원이나, 개발도상국이 대상이었다.

애초에 내가 원한 것은 곡이 더욱 널리 퍼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것이었으니 내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루트비히 출판사도 내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매번 기부 내역을 보내오고 있었다.

서한에 적혀 있듯, 평화는 물론 세계인의 인권 신장에 크게 기여한 대목이라며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유엔의 뜻과는 달랐다.

“영광스러운 기회지만, 저는 거절하는 게 맞다고 봐요.”

평화라는 이미지.

유엔에서 평화 메달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긍정적인 인식도 높아질 것이고, 나와 리히트 오케스트라에 대한 관심도 높아질 테지.

하지만, 그것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애초에 평화를 위한 곡은 아니었으니까.’

남북 정상회담 축하 무대를 위해 <평안>을 쓴 것은 맞지만, 그것이 평화를 위한 곡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평화의 이미지를 그려내기 위한 곡.

교재를 기부한 것도 더 많은 나라에 곡이 알려지기 위함이지, 평화를 목전에 두고 한 생각들이 아니었으니까.

의도가 그렇지 않았는데, 메달을 받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인정보다 포장에 가깝다면 안 받는 게 낫지.’

평화를 수호하는 일을 하다가 메달을 받는다면 그것은 인정에 가까우리라.

하지만, 평화를 목적에 두지 않은 내가 메달을 수여 받으면 본래의 내 의도를 흐리게 될 것이다.

<평안>이라는 곡도 개인이 느끼는 평화의 이미지를 찾아가는 곡이지, 시작부터 ‘세계 평화’를 목표로 둔 곡이 되어버릴 테니까.

메달 후보에 올라 메달까지 받게 된다면 앞으로의 행보에 색안경을 낄 수 있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었다.

평화 메달은 진정 평화를 위해 몸소 뛰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끝내 거절 의사를 밝혔다.

내 뜻을 전해 들은 큰아버지는 이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영광스런 메달보다는 연주자로서 삶이 더욱 가치 있을 테니까.”

큰아버지는 더 이상 긴말을 하지 않았다.

거절 의사를 밝히겠다는 말뿐.

이내 큰아버지는 내일 있을 올림픽 무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콧대 높은 영국인들 앞에서 무대를 보여줄 준비는 됐냐?”

큰아버지가 커다란 발걸음을 내딛듯 한 마디를 건넸다.

개막식 리허설에서도 보지 않았던가.

영국 최고의 극작가, 셰익스피어를 필두로 시작하여, 영국에서 걸출한 해리포터, 메리 포핀스까지.

챕터 하나를 통째로 문화로 채울 만큼 영국의 문화 의식은 무척 높았다.

락밴드뿐만 아니라, 런던의 4대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심포니 오케스트라까지 초빙할 정도.

그들 사이에서 연주를 펼친다는 것도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올림픽 무대에서 최초로 다른 국적을 가진 연주자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겠다.”

큰아버지가 진지함과 너스레를 섞어서 말했다.

도리어 큰아버지의 얼굴에 기대감이 어린 것 같았다.

***

새벽 5시.

평소 같았으면 단잠에 빠져있을 시간임에도, 몇몇 사람들은 깨어 있었다.

런던 올림픽 개막식.

런던은 오후 9시에 시작하는 무대였지만, 한국에서는 새벽 5시였다.

올림픽 개막식을 보러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사람들.

그들 중에는 이안의 부모, 수철과 은희도 있었다.

둘은 일찍 일어나 잠옷 차림으로 TV 앞에 앉았다.

“이제 시작한다.”

TV에서는 카운트다운이 한창이었다.

사진들의 나열이라는 독특한 기법으로 촬영된 카운트다운에 부부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떴다.

카운트다운이 종료됨과 동시에 새까만 화면이 떠오르던 찰나, 덩그러니 놓인 피아노 앞에 사람들이 다가오는 영상이 재생됐다.

몇몇은 깔깔거리며, 몇몇은 진지하게 피아노를 연주하던 와중.

편집이 더해진 독특한 소리가 집에 울려 퍼졌다.

이윽고 화음이 반복되던 중, 화면이 멀어지더니 무대에 스포트라이트가 켜졌다.

“이안이다!”

은희의 감정 섞인 목소리에 맞춰 이안의 손가락이 유려하게 건반을 훑었다.

이안의 연주가 더해지자 마치 두 대의 피아노가 함께 협주를 하듯 부드러운 음색들이 튀어나왔다.

거기에 이번 주제곡을 맡은 영국 유명 락밴드, 미라클이 합세하자 서리는 더욱 풍성해졌다.

무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락밴드의 연주가 시작될 무렵, 다른 단원에게 피아노 자리를 넘겨준 이안은 뒷자리로 향해 지휘봉을 들었다.

허공에 지휘봉을 흔드는 순간.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에 등장했다.

“저걸 이안이가 다 준비했댔지?”

은희의 물음에 수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형인 현철에게 언질을 받았음에도 수철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저건 피아노를 배웠다고 해서 할 수 없는 경지인데.’

분명 현철은 수철에게 이안이 모든 오케스트라의 구성, 곡의 방향성을 제시했다고 했다.

주제곡을 받아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도록, 더 나아가 밴드와 섞이는 것까지.

게다가 전주로 흘러나왔던 영상의 기획조차 이안이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기술적 기질을 떠나 음악 자체를 느끼는 이안의 모습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국악기가 들어갔음에도 양악기는 물론, 밴드의 전자 악기와도 융화되는 선율이라니.

수철은 더 이상 자신이 따라잡을 경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째 우리 아들이 더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은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화면에는 유명 밴드인 미라클보다 이안을 자주 비추고 있었다.

카메라 워크는 전적으로 영국 송출사에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주목할 대목이었다.

개막식 첫 무대이자, 주제곡을 연주하는 무대임에도.

주목받는 것이 이안과 리히트 오케스트라라는 뜻이었으니까.

‘저건… 말이 안 되는 수준인데.’

처음 아들이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을 때도 놀라웠지만, 지금 보여주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단 1년 반 만에 국내는 물론, 세계 무대를 나아가는 아들의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

무대를 빤히 보고 있던 수철의 머릿속에 문득 과거 생각이 떠올랐다.

좀처럼 바이올린에 집중하지 못하던 아들이 피아노를 잡더니 대단한 재능을 펼쳤던 그때.

순식간에 피아노를 평정하는 이안의 모습에 수철은 우려하던 것들이 단 한 번에 내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 창단은 그때와 이야기가 달랐다.

피아노를 혼자 잘하는 것과 오케스트라를 잘 이끌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의지 짙은 눈빛에 수철은 아들의 행보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무언가 더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서린 눈.

피아노를 잡을 때와 같은 눈이었기에, 우려는 있었지만 막지는 않은 것이다.

그 결과물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

“반응들이 장난 아니구먼.”

빈 필하모닉의 수장, 레오의 말에 방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가 머물고 있는 호텔 방.

그러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단원들이 아니었다.

런던에 존재하는 오케스트라계의 별들.

런던 필과 필하모니아, 로열 필까지.

올림픽 개막식 무대를 맡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제외한 나머지 Big4 런던 오케스트라 단장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저걸 앨런이 아닌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장이 준비했단 말입니까?”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단장이 신비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단장들도 그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락 밴드로 유명한 영국이었지만, 일반적인 경우에서는 보통 조합을 맞추지 않았다.

밴드와 오케스트라가 추구하는 음악의 방향성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규모 면에서 좀처럼 합쳐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백 명이 만들어내는 음악과 열 명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음악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이안의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그 차별점을 도리어 역이용하는 듯 유려한 음색을 펼치고 있었다.

“게다가 저 곡은 스트롱콜드의 명곡 아닙니까.”

개막식의 마지막까지 지켜본 이들은 까지 감상하고 있었다.

현악 선율이 돋보이는 음색들이 터져 나오자 단장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탄성을 짓고 있었다.

무대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한숨을 몰아쉬며 감상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놀랍군요. 저희도 변화를 모색한다고 이모저모를 하고 있지만, 저 정도로는 생각지도, 하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그뿐만입니까. 저렇게 다양한 악기를 한 소리로 묶는 것 자체가 상식 밖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실제로 이루고 있단 말입니다.”

로열 필과 필하모니아 단장은 얼굴을 붉혀가며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그제야 빈 필이 이안의 행보를 따라가겠다고 한 발언을 이해할 것 같다며.

세간에서 ‘젊은 거장’이라는 타이틀을 왜 주었는지 알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어쩌면 저희의 시대가 저물고,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세계 최고로 우뚝 서는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레오의 발언에 모두가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바뀌듯, 음악도 많이 바뀌었다.

클래식이라는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점차 인지도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

그런 면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이안의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오케스트라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정통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빈 필과 런던 필이 참여한 가운데에서도 경연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으니까.

더 이상 이안의 행보에 반론을 다는 이는 없을 테다.

“어쩌면 우리도 리히트를 통해 배워야겠습니다.”

이젠 정말 대중에게 더욱 친숙하게 다가가야 할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그런 면에 대해 이안의 리히트는 나아갈 방향이 무한해 보였다.

악기의 배치와 구성을 바꾸기만 해도 경우가 수백 가지는 넘으리라.

게다가 매번 창작곡을 만들어오는데도 그 수준이 과거 고전 시대를 이끌어갔던 거장들과 다르지 않지 않은가.

두 거장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달리 런던 필의 수장, 모건은 TV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분합니까?”

레오의 말에 거장들의 눈길이 모건에게 꽂혔다.

이미 다른 단장들도 주제곡을 맡기로 했던 모건이 밀려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상황.

힘이 들어간 모건의 눈빛이 분노 어린 눈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건의 입으로 나온 말은 무척 의외였다.

“말 시키지 마십시오. 관찰 중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배우겠다는 듯한 자세.

런던 필의 수장, 모건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매서웠다.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가진 특이점을 파악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머릿속으로 여러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다.

레오도 모건의 생각을 모르지 않았다.

레오 또한 이안의 연주를 처음 보고 수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새로운 천재의 등장에 감탄하고, 받아들이고, 되레 천재의 뒤를 따라가려는 자세.

어느덧 모건의 모습이 레오와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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