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세계에서 영국 왕실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왕의 존재가 상징적인 여타 국가와 달리, 영국은 현재도 여왕의 지휘가 상당한 곳.
특히 예술에 대해 아낌없는 지원을 보낸 덕에 영국이 문화 강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런 곳에서 연락이 왔다는 것도 대단한 거겠지.’
왕실에서 이안에게 개인 연락을 보냈다는 것.
아마 교황청에서 연락이 왔던 것과 동급, 아니 더 많은 파급력을 자랑할 일이었다.
처음 연락이 왔을 때까지만 해도 영국 왕실의 의뢰라고 들었다.
정확히 어떤 인물이, 어떤 일을 의뢰할지 알려주진 않았지만.
영국 왕실에서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한다고 하여 일단 미팅을 가져보자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긋이 나이 든 서양인이 베레모를 벗으며 인사를 건넸다.
백발에 가까운 회색 머리의 노인은 그의 나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가 혼자가 아니었다.
검은 슈트를 빼입은 덩치 좋은 남자들이 무려 다섯.
위풍당당한 기세를 보이는 경호원들에 노인은 손사래를 쳤다.
“경호원을 대동하고 온 점, 양해 바랍니다.”
양해한다고 했지만, 현철은 곧바로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노인의 얼굴은 TV에서 나오던 모습 그대로였으니까.
“왕세자님이 이동하시는데 충분히 이해해야지요.”
아서 조지 웨일스.
그는 영국 왕위 계승 서열 1위이자, 영국의 왕세자였다.
나이와 직위를 고려하면 사실상 대한민국 대통령급의 인물.
그런 거물급의 인물이 지금 현철과 이안 앞에 앉아있었다.
아서는 늦은 시간에 그것도 암암리에 이안을 찾아온 이유를 천천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곧 어머니의 즉위 75주년입니다.”
영국 여왕, 빅토리아 2세의 즉위 75주년.
영원한 영국의 여왕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그녀는 영국 전역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7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있으면서도 여왕에 대한 평은 긍정적이었다.
왕세자인 아서는 그런 어머니이자 여왕에게 조촐한 선물을 주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를 위한 곡을 만들어주시겠습니까?”
이안에 대한 많은 조사를 한 것인지, 아서의 입에서 이안에 대한 이야기가 술술 튀어나왔다.
<염라>처럼 개인의 이야기를 곡에 담아내는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고.
스스로 수많은 자작곡들을 만드는 것은 물론, 최근 교황의 행진곡까지 만들어내며 곡에 원하는 분위기를 담아내는데 이안만 한 사람이 없다며 칭찬 섞인 말을 내뱉었다.
특히 올해는 중요한 일이 많았던 만큼, 이안에게 특별히 부탁하고 싶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올해는 어머니에게 힘든 시간이었을 겁니다.”
아서의 얼굴이 사뭇 어두워졌다.
아직 한 해의 반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여왕에게는 수많은 일이 있었다고.
80년간 함께했던 남편의 죽음과 최근 있었던 둘째의 부도덕한 일, 등 슬픈 일들의 연속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런던 올림픽에, 여타 행사에서 억지웃음을 지었던 어머니가 참으로 고생스러워 보였다고 표현했다.
그렇기에 서프라이즈로 이안에게 곡을 의뢰하려 한다는 의지를 보였다.
‘스케일을 논할 수준이 아니야.’
무려 영국 왕실의 왕세자가 직접 하는 부탁.
왕실과 연관된 만큼 스케일은 물론, 영국에 전해질 파급력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이안에게 이리 직접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영국의 인정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게다가 아서는 해줄 것은 없지만, 향후 영국에서의 지원을 약속하겠다고 말했다.
영국이라는 곳에서 활동할 때 왕실을 뒷배에 안고 활동한다는 것만큼 든든한 것이 없을 것이다.
잠깐 고민을 하던 찰나, 아서가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한 마디를 건넸다.
“어머니가 이안씨를 무척 좋아하십니다. 오시는 것만으로도 큰 선물이 될 겁니다.”
빅토리아 2세가 올림픽 무대를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특히 아서는 어머니가 개막식 무대에 참석한 이안을 보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지긋이 눈을 감고 옅은 미소를 띤 얼굴.
최근 보았던 얼굴 중 가장 편안한 얼굴이었다고 말했다.
이안이라면 다시금 그 얼굴을 만들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
그것이 이안을 찾아온 가장 큰 이유였다.
***
늦은 시간 연습실.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 반응들이 담긴 서류를 다시금 보고 있었다.
올림픽 개막식을 한 지도 며칠이 지난 시점이었건만.
여전히 리히트 오케스트라에 대한 반응이 속속히 올라오고 있었다.
휴대폰을 켜도 개막식 이야기가 회자되는 상태.
여러 기사들을 봄과 동시에 내 머릿속에서도 다른 생각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제 화제성을 옮겨야 할 때야.’
‘더 마스터’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박이안’이 만들었다는 이유로 유명세를 탔다.
기사들에서도 리히트 오케스트라 자체의 음악보다는 내가 만든 오케스트라라는 인식이 더욱 큰 상태.
앞으로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단지 나라는 상징성 대신, 음악 자체로써 주목을 받아야 한다.
리히트는 내 분신이나 다름없는 곳이자, 내가 만들어낸 음악을 더욱 깊고, 넓게 전파할 수 있는 방안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제안은 무척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제공하고 있었다.
‘영국 여왕에게 전하는 헌정곡.’
어떠한 곳보다 강력한 무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무려 영국 왕실과 관련된 행사에 나서는 것이니까.
대중들에게 알려졌을 때의 파급력은 물론, 영국 왕실에서 계속해서 회자될 수 있다면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존재를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으리라.
오랜 역사를 가진 영국 왕실처럼 곡이 전해질 수 있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영국 왕실이자, 한 명의 어머니에게 헌정하는 곡.’
아서 왕세자는 ‘어머니’라고 표현했지만, 빅토리아 2세는 영국을 대표하는 여왕이니까.
그녀의 존재 자체가 영국과 연관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 국가와 한 사람의 생을 동시에 담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번 곡의 주된 포인트였다.
곡에 대한 아이디어를 위해 나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빅토리아 2세.
검색만 해도 수많은 정보들이 나오는 인물.
젊었을 시절부터 여왕의 직위에 올라 평화를 부르짖는가 하면, 자선 사업과 봉사활동, 등을 이어가던 행보가 영국 국민들의 호감을 샀다.
오죽하면 고령의 나이로 비롯된 건강 이상설을 제외하면 빅토리아 2세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
‘영원한 영국의 여왕’이라는 것은 비단 나이 때문이 아닌 듯 보였다.
끼-익
한창 정보들을 찾아보던 중에 묵직한 문이 열리며 경첩음이 울려 퍼졌다.
꽤 늦은 시간임에도 누가 찾아온 것인지.
연습실의 문을 두드린 사람은 다름 아닌 요한나였다.
“여기 있었네요.”
아직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주어진 휴가는 일주일 남짓 남았을 터.
그럼에도 나를 찾아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큰아버지를 통해 전해진 영국 왕실의 의뢰.
요한나는 자신을 비롯해 몇몇 단원들이 소식을 듣고는 휴가도 반납한 채 돌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정말 리히트 오케스트라에 들어온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어요. 고마워요 이안씨.”
뜬금없는 마음 고백이었지만, 요한나의 눈길에는 진심이 가득 묻어났다.
처음에는 주변의 반대와 걱정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고 자백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 수십 년 경력의 피아니스트가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고 신생 오케스트라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가 필요할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도전하길 잘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고.
경연 우승에 이어 올림픽 개막식 무대, 거기다 이번에는 영국 왕실에서 울려 퍼질 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뛴다고 설명했다.
다른 단원들도 벌써부터 설레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잘해야 오래 남는 노래가 되겠죠.”
요한나가 그 말도 맞다며 맞장구를 쳤다.
게다가 그녀는 도움이 될지 모르는 소식을 함께 가져왔다고 덧붙였다.
“과거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헌정한 곡이 있어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영국의 4대 오케스트라로 통하는 거물 중 하나였다.
요한나의 말에 따르면 그들도 왕실에 곡을 헌정한 경력이 있다고 했다.
아마 그들 또한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을 테지.
왕실이라는 곳은 곡이 제대로 회자되는 순간 역사에 남는 것이나 다름없는 공간이니까.
게다가 영국 왕실에 곡을 헌정한 오케스트라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싶었을 것이다.
4대 오케스트라에 들었음에도 왕실에게 곡을 주려고 했다는 점.
왕실이 가지는 입지와 지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하지만, 정작 왕실에서는 곡을 외면했어요.”
한 차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곡을 들어본 요한나는 무척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뛰어난 음악가들이 만들어낸 곡.
요한나도 직접 들어본 입장에서 좋았으면 좋았지, 거부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고 설명했다.
한때 그것 때문에 클래식계에서는 왕실과 필하모니아 사이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구설수까지 생길 정도였다고.
그런 곡을 가져온 이유는 간단했다.
“이안씨가 듣는다면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어요.”
요한나는 오디션 때 이야기를 꺼냈다.
아주 사소한 변화였음에도, 자신이 서령의 연주 스타일을 벤치마킹했던 것.
그리고 그것을 알아챈 내 청음력이라면 왕실이 그러한 선택을 한 이유를 찾아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 또한 요한나의 의견에 긍정표를 던졌다.
왕실에서 거부한 곡의 특성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면, 그 지점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요한나가 좋다고 표현할 정도라면 곡 자체에 문제는 없으리라.
그럼에도 왕실이 거부했다는 것은 누군가가 곡에 들어 있는 특이점을 파악하고,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겠지.
“네, 한 번 들어보죠.”
내 말에 요한나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들어 음원을 하나 재생시켰다.
묵직한 바순의 음색으로 시작하는 곡.
낮은음들의 향연으로 채워진 곡은 점차 악기의 수를 늘려가더니 다채로운 선율을 만들어낸다.
이어서 호른과 트럼펫과 같은 금관 악기들이 마치 팡파르를 연상케 하듯 음색을 내뱉는다.
피아노를 비롯한 기본적인 오케스트라들의 조건을 모두 갖춘 음들이 나아가자 곡은 금세 화려하게 펼쳐진다.
‘화려한 왕실 행렬을 보는 것 같다.’
곡이 흘러가는 가운데 눈을 감으니 악보와 함께 그림이 머릿속에 현현한다.
마치 근위병들의 도열을 보는 것처럼.
엄숙하면서도 활기찬 선율이 한 무리의 행진을 떠올리게 한다.
근위병이 나아가면 중간에 군악대가 갖가지 연주를 펼치며 나아가듯, 소리 또한 풍성해짐과 동시에 묘한 울림을 전했다.
영국 왕실의 위대함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화려한 소리들.
헌정곡을 목표로 만들었다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왜 한편으로 불쾌한 느낌이 들지?’
곡을 듣는 내내 군데군데 인상이 찌푸려졌다.
분명 장조의 선율에 따라 찬양하듯 나아가는 헌정곡이거늘.
승리를 쟁취하고 나아가는 행진과 패잔병들의 행진이 한 끗 차이인 것처럼 특정 부분들에서 소리가 묘하게 비틀어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어색함.
겉으로 듣기에는 무척 손색이 없는 곡이었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에 자꾸만 어울리지 않는 색을 흩뿌리듯 이상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곡이 마무리되었을 때.
나는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를 확인함과 동시에 확신했다.
‘이건… 왕실을 칭송하는 곡이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