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며칠 뒤.
연습실에 단원들로 가득 메워졌다.
아직 주어진 휴가가 이틀 정도 남은 시점이었음에도, 영국 왕실 곡을 맡았다는 말에 한달음에 모인 것이다.
특히 단원 중에서 영국인인 사람은 더욱 눈에 불을 켜고 집중했다.
“오늘은 연습에 앞서 곡을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 수신호에 요한나가 필하모니아에서 만든 헌정곡을 재생시켰다.
묵직한 바순의 선율로 시작하는 곡.
이내 화려한 파트로 들어가자 몇몇 단원들이 괜찮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내가 보는 것은 그런 반응이 아니었다.
‘나와 같은 것을 느낀 사람.’
단원들은 나처럼 감상이 시각적으로 떠오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이미 검증된 실력자들이라면 곡을 듣고 어느 정도 이미지를 생각할 법했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특정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단원이 있다면 내가 느꼈던 것과 동일한 것을 느낄 수 있겠지.
하지만, 처음 곡을 들은 단원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더 들려드리겠습니다.”
두 번, 세 번…
곡을 몇 번씩 반복하던 찰나.
서령의 표정이 다른 단원들과 달리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는 듯 미간을 좁힌 서령의 태도에 나는 곧바로 질문을 건넸다.
“서령씨,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습니까?”
“뭐랄까… 이상하게 우울감이 느껴져요.”
서령의 말에 다른 단원들은 되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들 또한 정상이었다.
깊게 듣는 것을 떠나 전체적인 곡의 분위기는 산뜻하고 활기찬 기세의 연속이었으니까.
나는 한 번 더 음원을 재생시켰다.
그와 동시에 내 눈길은 서령에게 고정되었다.
단원들은 서령의 말에 우울한 기색을 찾으려는 듯 목을 앞으로 뺐지만,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너 울어?!”
아람의 말에 단원들의 눈길이 일제히 서령에게로 향했다.
눈을 감고 차근히 곡을 듣던 서령이 어느덧 코까지 빨개진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애써 부끄러운 듯 눈물을 닦는 서령이었지만, 귀와 눈시울까지 빨개진 것은 감출 수 없었다.
요한나와 선화, 루이사는 다소 놀란 듯 나와 서령을 번갈아 봤다.
한참 울음을 멈추지 못하던 서령이 겨우 진정한 듯 자신이 떠올린 것을 말했다.
“뭐랄까… 화려한 모습 이면의 어두운 것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마치 백조가 아름답게 호수를 거니는 것에 비해 물 아래에서는 처절하게 물갈퀴를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서령은 곡에서 울리는 묘한 이질감에 집중하자 곡의 화려함이 되레 잔인하게 느껴졌다고 답했다.
단원들은 아직 갈피를 못잡은 듯 보이면서도 그러한 해석을 하는 서령을 향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 또한 서령씨와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화려한 이면에 숨겨진 화음들.
그 화음들이 서령이 말한 대로 미묘한 우울감을 표현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단원들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듯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요한나에게 알려주었듯, 단원들에게도 직접 보여주었다.
본래 곡에 숨겨져 있던 피아노 소리.
7도 화음이 이질감을 일으키는 부분을 펼치자 사람들의 표정이 제각기 바뀌었다.
방금 재생시킨 곡에서는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내 연주가 이어지고 나서 재차 음원을 재생시키자 그제야 상당수 단원들이 차이점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시는 분들이 많은 게 당연합니다. 저도 자세히 듣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번에는 변경된 연주를 선보였다.
불협화음이 제거된 본래의 곡조로 추정되는 선율.
불협화음이 없어지자 곡은 본래보다 여유롭게 나아가고, 걸리적거리던 선율이 없어지자 밝은 선율이 더욱 경쾌하게 나아간다.
아주 사소한 변화였음에도 곡조가 달라지는 것을 알아챈 단원들의 표정이 신비함으로 가득 찼다.
몇몇은 그 작은 변화만으로도 분위기가 바뀌는 음악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듯,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흔에 가까운 단원들이 차이점을 알고 나서 생각하는 바가 달라진다.
이를 잘 활용한다면 대중들에게도 새로운 선율을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어왔다.
‘이걸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면 곡의 풍성함이 달라질 거야.’
서령과 단원들의 반응에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선율 이면에 또 다른 이미지.
단원들 중 가장 명확한 그림을 떠올리게 만든 연주를 펼쳤던 서령이 이해했다면, 분명 곡에 무언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었다.
다만, 지금의 형태는 철저한 계획이 아닌 즉흥의 감각을 넣은 것처럼 약했기에.
이를 제대로 활용하는 방식을 깨우치려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했다.
당장 보이지 않는 이미지를 곡조로 미묘하게 숨기는 방식.
아이번을 직접 만날 수 있다면 제대로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면에 곡의 스토리를 담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장 느껴지는 이미지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도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까.
아이번을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머릿속에 수많은 질문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
호텔 앞에 선 아이번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안을 비롯해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있는 호텔.
런던에 거주하던 아이번은 이안의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이안을 찾아왔다.
이안이 일러준 대로 호텔의 홀에 들어서자 이안과 리히트 오케스트라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아이번 클라크라고 합니다.”
아이번의 인사에 리히트 식구들이 일제히 박수로 호응했다.
무대에서 내려온 지 꽤 되었던 아이번은 오랜만에 받는 박수 세례에 묘한 뭉클함을 느꼈다.
그러한 감성들도 잠시.
이안은 아이번을 홀의 한편으로 안내했다.
이안, 아이번, 거기에 리히트의 피아니스트, 요한나와 함께 자리에 앉자 이안은 본격적으로 곡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저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무척 미세한 차이로 분위기를 첨가하셨더라고요.”
이안의 입에서 아이번의 부끄러운 과거가 튀어나왔다.
미묘하게 화음에 음을 덧대어 화음을 바꿨던 것은 물론, 연주하는 손가락의 힘을 달리하여 분위기를 비틀었던 것까지.
아이번은 이안의 말을 듣는 동안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본래 곡의 의도는 무엇이었습니까?”
“주제는 행복이었습니다. 곡의 방향도 그리했고요.”
아이번은 곡을 만들던 당시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영국 왕실에 헌정하기 위한 곡.
나아가는 영국의 이미지와 그러한 바탕 위에 살아가는 국민들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곡에 담고자 했다고.
그렇기에 비교적 밝은 선율이 특징인 악기들을 잘 살렸다고 덧붙였다.
이안 또한 그것을 눈치챈 것인지 말하지도 않은 오케스트라 구성악기들에 대한 이야기가 술술 튀어나왔다.
“하지만, 갑작스레 그리하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이안의 질문에 아이번은 한 차례 더 놀랐다.
갑작스레.
아직 아이번은 이안에게 왜 그렇게 곡을 바꿨는지, 그 의도는 무엇인지 밝힌 적이 없었다.
오직 당시 곡을 만들 때의 배경을 설명해졌을 뿐.
그러나 ‘갑작스레’라고 표현한 것은 아이번이 당시 즉흥으로 곡에 선율을 추가했다는 것을 이안이 알아챘다는 의미였다.
이어지는 질문과 이야기에서도 아이번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갑자기 연주 방식을 바꿨다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곡에 대한 기원을 묻는 것에서부터 곡에 어떠한 점이 바뀌었는지, 특히 어떤 변화가 그런 분위기 변화를 촉발시켰는지까지.
마치 당시에 이안이 곡 작업에 참여했던 것처럼 세세한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저는 갑자기 그리 바꾸신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급하게 변경한 탓에 완성도가 떨어져서 잘 느껴지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게 반전된 이미지를 심어둔 것만으로도 예삿일이 아니니까요.”
화음에 음을 추가하여 행복한 감정에 빠지지 않게끔 만들고, 이질적인 음이 연속될수록 묘한 어긋남을 느끼게 만든 것까지.
되레 그것 때문에 헌정곡을 반려했다는 소식에 죄책감을 가졌던 아이번은 몸 둘 바를 몰랐다.
게다가 이러한 분위기를 어떻게 넣을 수 있냐는 이안의 질문에 아이번은 고개를 저었다.
“민망할 따름입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곡에 넣어버렸습니다.”
아이번은 당시를 반성하듯 침울한 눈빛을 보냈다.
오케스트라는 단체니까.
아무리 곡에 대한 억하심정이 들더라도 그렇게 곡을 망쳐선 안 됐다고.
자신이 넣은 그 묘한 선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끼쳤는지, 자신은 사람을 우롱한 나쁜 사람이라며 후회 섞인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군요.”
이안은 뭔가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맞춰지지 않던 퍼즐이 맞춰지는 듯, 그러면 아주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들어간 이유를 알겠다고.
“아마 오케스트라에서 의도하지 않고 아이번 선생님 독자적으로 하는 과정에서 그리되었을 겁니다. 게다가 얘기하신 대로 혼란스러운 상태셨다면 더욱더 그러셨을 테죠.”
이안의 입에서 당시 아이번의 생각이 고스란히 튀어나왔다.
감정을 삭이지 못해 연주하면서도, 그러면 안 된다고 속으로 되뇌면서 펼쳤던 연주.
아이번은 이미 있는 그림에 먹칠을 한 것과 다름없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도리어 그 얘기를 듣던 요한나가 흥미롭다는 듯 이야기를 덧붙였다.
“마치 미술의 젯소칠 같네요.”
이안과 아이번이 동시에 의문 섞인 눈길을 보냈다.
의문 섞인 눈길에 요한나는 설명을 덧붙였다.
“때론 그림을 그릴 때 피사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물감 따위를 깔아놓거든요. 곡도 그런 것처럼 쌓으면 무언가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배경을 두고 시작하여 그 위에 곡을 덧입혀서 숨기듯이 하면 어떻냐고.
아이번이 그랬듯, 본래의 선율들에 음을 집어넣었듯, 음악에도 그리 적용시키면 어떻냐고 말했다.
요한나의 설명에 아이번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 의문을 떨치지 못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엔 힘들 텐데.’
그림은 물감을 덧칠하면 덮을 수 있겠지.
하지만, 음악은 아니었다.
곡조를 덧입혔을 때 화음의 차이에 의해 소리가 크게 깨지거나 본래의 색을 잃어버리기 마련.
그저 붓을 휘두르는 것과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던 이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마치 그 상황을 이해하고 적용 방안까지 생각났다는 듯.
아이번은 이안의 표정에서 자신감을 들여다봤다.
***
모두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시간.
하지만, 나는 홀에 남아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나는 낮에 있었던 아이번과 요한나의 이야기를 다시금 되새겼다.
숨기려는 의도였기에 더욱 드러나지 않은 아이번의 연주와, 요한나가 말한 젯소칠에 대한 이론.
나 또한 머릿속에 선율을 만들어내면서 그림을 그렸기에.
밑그림 작업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스케치를 하는 것과 그림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었다.
‘꽤 난이도가 높겠지.’
음악은 미술이 아니니까.
음악을 들으면 그림이 그려지듯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완전히 미술과 같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을 고려한다면 요한나가 말한 것을 곧바로 적용시키기엔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면의 그림을 녹여낼 방법이 내심 떠올랐다.
‘반전을 노린 곡은 있었으니까.’
나는 남북 정상회담 축하 무대에서 연주했던 <평안>을 떠올렸다.
평화를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 참혹함을 먼저 부각시켰던 곡.
당시에는 비슷한 화음을 단조에서 장조로 바꿔가며 그 흐름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켰다.
만약 그 흐름을 한 부분에 넣을 수 있다면.
모두 같은 방식이 아니더라도, 한 악장에 이면의 이미지를 넣을 수 있다면 곡의 반전미는 물론, 풍성함까지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선율에 이면을 넣는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에 그려진 악보가 피아노를 통해 떠오른다.
‘시작은 비바체.’
Vivace.
화려함과 문화 강국으로 표현되는 영국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춤추듯 밝은 선율이 피아노에서 튀어나온다.
기존에 아이번이 넣으려고 했던 식민지인으로서 아픔과 고통은 지워버리고.
영국이라는 한 지역에서 만들어진 문화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며 새로운 방식으로 탄생하는 것을 떠올리며 밑그림을 그려나간다.
문화가 퍼지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영국 국민들의 심상 또한 선율에 들어가야겠지.
이를 보여주듯, 더욱 다변화된 화음이 선율에 추가된다.
밝음으로 떠오르는 1악장.
하지만 2악장이 시작되었을 때는 1악장과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음색이 떠오른다.
‘그 과정에서 힘든 것이 없었을 리 만무하니까.’
영국의 지대한 발전에도 흠이 없진 않았다.
유수의 식민 지배를 한 것은 물론, 과도한 성장기에 스모그와 같은 재해가 발생했으니까.
게다가 과한 처사에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지 않았던가.
이러한 쓴맛들도 삼키고, 해결했기에 지금의 영국이 있을 터.
곡조는 마냥 잘못한 듯 강렬하고 낮은음으로 채워지지만, 일전에 숨겨둔 밑그림이 밝음을 더해주자 곡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숨겨둔 음색을 도리어 역이용한다.’
아이번은 불협화음과 단조로 밝은 곡을 낮게 만들었다면, 나는 장조를 숨겨두어 어두운 곡을 밝게 만든다.
깊게 감상하지 않으면 쉽사리 눈치챌 수 없는 선율.
비로소 이 음악을 깊게 감상한 자들만이 알 수 있는 선물과도 같은 소리였다.
위대한 발전 아래에 있었던 것을 기억해야만 비로소 영국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준다.
게다가 그와 동시에.
나는 이러한 반전과 동시에 여왕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교묘하게 선율에 추가한다.
그 내용이 가상의 오선지에 빽빽하게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