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42화 (142/250)

142화

-벌써 말입니까?-

초안을 검토해달라는 나의 요청에 아서 왕세자는 깜짝 놀란 듯 말을 이었다.

전체 곡이 아니라고 말했음에도, 초안이 일주일 사이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놀랍다며 목소리를 잘게 떨었다.

평소와 같았으면 완성된 곡을 제공했겠지만, 이번은 사안이 달랐다.

‘이제 나 혼자가 아닌, 오케스트라의 협주를 만들어야 하니까.’

내가 만든 곡을 나 혼자서 치는 것이라면, 곧바로 수정할 수 있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가상의 악보를 교체하고, 이를 고스란히 펼치면 되니까.

하지만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이상 단원들을 고려하는 것도 단장인 내가 할 일이었다.

괜찮은 것이라는 가능성만 가지고는 단체를 움직일 수 없으니까.

오케스트라 전체를 바꾸지 않기 위해 확정적으로 확인을 받는 절차.

협주로 만들기 전에 그 과정이 필요했다.

“우와아… 저 실수하진 않겠죠?”

서령이 얕게 떨리는 목소리로 요한나를 쳐다봤다.

요한나는 괜찮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그녀 또한 손을 약하게 떨고 있었다.

피아노 선율만으로는 초안을 보여주기엔 한계가 있기에.

첼로를 대동하는 것은 물론, 정확한 박자와 포인트를 살리기 위해 요한나까지 대동했다.

기존의 곡을 편곡한 것은 내가 시범 연주를 하면 될 테지만, 아이번의 기법을 살려 새로 만들어낸 초안 곡은 본 무대에서 피아노를 담당할 요한나가 하는 게 나을 테니까.

“연습했던 대로만 하면 될 거예요.”

짧은 내 위로에 두 사람의 떨림이 조금 멎었다.

하지만, 왕세자가 기거하는 곳에 다다르자 두 사람이 다시금 떨기 시작했다.

궁전 근처로 나아갈수록 근위병이 존재하는 것은 물론, 관저에 다다르자 사설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점차 많아졌으니까.

덩치 큰 사내 여럿이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모습은 무게감이 없으려야 없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아서 왕세자가 알려준 곳에 도착하자 앞에 있는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아서 왕세자님과 약속이 있어서 왔습니다.”

“이야기 들었습니다. 박이안 피아니스트님이시죠? 실례지만 잠깐 살펴도 되겠습니까.”

나를 비롯한 서령과 요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즈막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두 여인의 고개를 절로 움직이게 만들 정도.

영국 왕실과 연관된 만큼 절차도 존재했다.

우선적으로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몸수색과 검문은 기본.

경호원은 간단한 확인 절차라고 했지만,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살벌하기까지 했다.

악기 케이스까지 확인해 볼 정도로 철저하게 확인을 받고 나서야 아서 왕세자가 초대한 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와… 진짜 예뻐요.”

서령이 입을 떡 벌린 채 주변을 살펴봤다.

클라렌스 하우스.

여왕이 거주하는 버킹엄 궁전 옆에 존재하는 왕세자의 공간이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집의 내부에는 그동안 역사를 보여주듯 고풍스런 가구들이 즐비했다.

서령은 물론, 요한나도 이런 광경은 처음이라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경호원은 위층에 있는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작은 소극장을 연상케 하는 넓은 방에는 피아노를 비롯하여 의자 몇 개가 도열되어 있었다.

창문 앞 안락의자에 앉아있던 아서 왕세자는 반가운 미소를 피운 채 다가왔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검문이 있었을 텐데, 어쩔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당연히 이해해야죠.”

아서는 너른 이해에 감사하다며 악수를 청했다.

악수를 함과 동시에 그는 기대감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이렇게 빨리 초안이 나올 줄은 몰랐다고.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초안에 불과하다는 말을 했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도 기대되는 것이 나의 음악이 가진 매력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자리에 앉은 나는 곧바로 곡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이전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서 제공한 헌정곡이 있다 들었습니다.”

나는 곡을 만든 과정을 상세하게 얘기했다.

반려된 곡이지만, 영국의 이미지를 잘 갖추고 있어 일부 차용했다고.

하지만, 반려된 이유를 얼핏 알 것 같다는 말에 되레 아서 왕세자가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거기에 이어 기존의 헌정곡이 가진 취약점을 분석하고, 이를 개선한 새로운 곡 또한 준비했다고 덧붙였다.

두 번째 곡도 있다는 말에 아서 왕세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초안이라 하셨지만, 벌써부터 떨립니다. 그 시간에 두 곡이나 만드실 정도라니.”

떨리는 감정을 고스란히 내비치는 아서 왕세자의 눈빛은 흡사 들뜬 어린아이 같았다.

내가 만든 곡을 듣고 싶다는 기대와 함께, 그만큼 어머니인 여왕에게 어서 들려주고 싶다는 의미일 터.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곧바로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다.

바순의 무거운 음색은 낮은 피아노로 재현하고, 호른을 비롯한 금관악기의 울림은 빠른 트릴로 대변하는 곡.

편곡된 필하모니아의 헌정곡이 내 손에 의해 재탄생하기 시작한다.

***

5년 전.

아서 왕세자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헌정곡을 가져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여왕, 빅토리아 2세의 즉위 70주년을 맞아 필하모니아에서 헌정곡을 만들었다고.

매년 즉위를 기념하는 행사를 열던 영국 왕실에서는 익숙한 일이었다.

런던 오페라 하우스를 대관하여 펼쳐진 즉위 70주년 기념 연주회.

앞선 연주자들이 빼어난 연주를 펼치고 대미를 장식할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들어왔다.

“친애하는 여왕 폐하. 즉위 7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희는 여왕님의 은덕에 행복해하는 영국 국민을 곡에 담아보았습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단장이자, 지휘자가 곡의 창작 배경을 상세하게 설명해주었지.

게다가 들려오는 선율 또한 감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낮은음에서 시작하여 점차 올라가며 풍성해지는 화음들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성장하는 영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듯했다.

끝자락에는 단장의 설명처럼 행복감을 표현하는 밝고 통통 튀는 음색들이 펼쳐지지 않았던가.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아서 왕세자는 물론, 함께 들었던 다른 사람들도 필하모니아의 수고에 박수를 보냈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올해의 왕실 곡을 정해야 한다며 입을 모았거늘.

하지만, 정작 헌정곡의 주인공인 빅토리아 2세는 곡을 듣고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고 불편한 기분을 떨칠 수 없군요.”

아서 왕세자는 어머니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잔잔함과 화려함, 굳센 기세까지 모두 가진 헌정곡에서 답답함이라니.

그러나 깊게 팬 미간과 찡그린 눈빛에서는 여왕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평소에는 항상 온화하던 어머니가 그렇게 불쾌감을 드러내는 모습에 아서 왕세자도 당황할 정도.

결국, 빅토리아 2세의 반려로 필하모니아의 헌정곡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필하모니아의 단장은 소식을 듣고 짧은 답변만 건넸다.

하지만, 단장을 만난 아서 왕세자는 단장이 무척 불쾌한 기색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차마 여왕에게 불평을 할 수 없는 노릇.

그런데 이번 사안은 사실상 오케스트라의 자존심에 흠집을 내는 일이었다.

오케스트라의 정성과 실력 있는 무대를 거부한 사례였으니까.

아서는 지금까지도 여왕이 반려한 이유를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5년 후인 오늘.

이안의 연주를 듣던 아서 왕세자는 그 이유를 느낄 수 있었다.

‘차이가 확연하게 보인다.’

이안이 연주한 곡은 그때의 헌정곡과 같았다.

피아노 하나로도 그 볼륨을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아서 왕세자는 이안의 연주를 들음과 동시에 5년 전 들었던 헌정곡을 떠올렸다.

분명 음의 전개는 같은데.

이안이 연주하는 곡에서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 펼쳐졌다.

‘뭔가 울타리를 거둔 느낌이랄까.’

처음 필하모니아의 곡을 들었을 때 이보다 좋은 곡이 있을까 생각했건만.

이안의 연주를 듣는 순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무게감이 진득하게 들어갔던 그때의 연주와 달리, 이안의 연주는 뭔가 더욱 활기차고 자유로운 기색을 띠고 있었다.

억압받던 선율도 함께 떠오르는 듯.

5년 전 연주보다 훨씬 밝고 활기찬 음색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당시의 선율을 완벽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그때의 것보다 훨씬 좋다.’

게다가 이안의 연주는 혼자 만들어낸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일당백(一當百)이라고 했던가.

눈앞에서 연주를 이어가는 이안은 홀로 피아노를 잡고 있음에도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소리를 내듯 화려한 음색을 자랑했다.

손가락이 유려하게 움직일 때는 현악의 음색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빠르게 소리를 반복할 때는 관악의 울림처럼 강렬하다.

아서 왕세자가 넋을 놓을 정도로 아름다운 음색의 연속.

그와 동시에 아서의 머릿속에 새로운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때는 왜 그랬던 것이지.’

어머니이자, 여왕인 빅토리아 2세가 느꼈던 답답함.

아서는 도무지 생각해도 그 이유를 유추해낼 수 없었다.

당시에도 몇 번이고 녹음된 곡을 다시금 들어봤지만, 아서는 음악에서 답답함 같은 것은 느끼지 못했으니까.

형식 또한 클래식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화음의 전개도 무척 좋았다.

게다가 지금 이안이 연주하는 것 또한 음정의 변화는 크게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다른 점은 하나겠지.

‘연주자가 달라져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인가?’

같은 곡이더라도, 누가 연주했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던가.

가수가 다른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그 또한 색다르듯, 클래식도 연주자가 어떤 스타일로 연주하느냐에 따라 곡이 미묘하게 바뀌곤 하니까.

5년 전에 헌정곡을 들었을 때도 아서는 뭉클한 마음으로 연주를 지켜봤다.

단순히 음표와 악기로 만들어내는 소리인데도, 사람의 감정을 주무를 수 있다는 사실이 음악이 가진 매력.

그런 매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연주자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안은 그들보다 한 단계 앞서 있었다.

악곡에 녹아 있는 감정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다시 끄집어내어 수정하는 일련의 과정.

그러한 것은 단순히 이론을 수학하는 것으로는 배울 수 없는 것이리라.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비단 감상적인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이안씨는 그걸 알아챘다는 것인가.’

처음 곡을 들었을 때, 아서는 이보다 완벽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 않았던가.

하지만, 여왕은 곡에서 남들이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를 느꼈고, 그것은 취약점이나 단점으로 작용했을 터.

분명 이안은 연주를 시작하기에 앞서 취약점을 알아내어 개선했다고 말했다.

헌정곡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어 그때 왜 그랬는지 알것 같다며, 우선 수정을 했다고 했으니.

감상을 녹여낸다는 추상적인 개념을 실체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안이라면 어머니가 왜 그렇게 느꼈는지 알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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