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45화 (145/250)

145화

-오늘 전해드릴 첫 소식은 빅토리아 2세의 즉위 75주년 기념 음악회인데요.-

영국 최대의 공영 방송사 BBC.

TV에서는 BBC에서 보내는 뉴스로 한창이었다.

단연 내용은 오늘 있었던 여왕의 즉위 75주년 기념 연주회.

전직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피아니스트이자, 부단장이었던 아이번 클라크는 방에서 그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가히 놀랍단 말이지.’

음악으로 감정을 전한다.

아이번에게는 그러한 말이 마치 소설처럼 느껴졌다.

과거 그가 연주를 할 때는 감정보다는 클래식의 완성도를 맞추는 데 초점을 두었으니까.

그런 자신에 비해 TV 속 이안의 무대는 놀랍기 그지없었다.

‘완성도는 말로 할 필요가 없다.’

이안이 지휘를 할 때마다 터져 나오는 소리는 완성을 넘어 그 이상의 것을 노리고 있었다.

갖가지 악기들이 합쳐져 만들어내는 화음들이 묘한 울림으로 듣는 이로 하여금 즐거움을 선사할 정도.

게다가 이안을 만나 이야기를 할 때 즉흥으로 펼치던 연주는 머릿속에 악보가 저장되어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곧바로 음을 뽑아내는 것만으로도 신기했거늘.

더욱 놀라운 것은 TV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철의 여왕인 빅토리아 2세가 눈물을 흘릴 정도라니.’

오랜 시간 영국을 이끌어온 빅토리아 2세는 ‘철의 여왕’이라고 불리곤 했다.

숱한 생활 동안 근엄한 자태를 보였기에.

뉴스에 담긴 빅토리아 2세의 눈물은 아이번을 놀라게 만들 정도였다.

‘보통 감정을 건드리는 수준이 아니야.’

이미 곡을 만드는 실력은 일전의 업적들로 익히 알려진 상태.

아이번 또한 이안의 자작곡 독주회를 라이브로 본 사람으로서 이안의 연주 실력은 무척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주 실력이 뛰어난 것과 연주를 이끌어가는 것은 분명 별개의 문제일 터.

그럼에도 지휘봉을 든 이안이 만들어낸 소리는 여왕은 물론, 아이번 자신의 심금을 울리는 데 충분했다.

곧 아흔을 앞둔 나이에 이안을 만난 것이 그저 안타깝다고 생각할 무렵.

TV에서는 새로운 사실을 전하고 있었다.

-즉위 기념 연주회에서 연주를 펼친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이번에 본국인 서울에서 오디션을 열 것이라는 의사를 밝혀…-

아이번은 앵커의 말에 번뜩 고개를 들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서울에서 오디션을 열어 새 단원을 모집할 것이라는 이야기.

하지만, 아이번은 덜컥 겁부터 났다.

‘할 수 있을까?’

무언가 하기에 자신은 너무 노쇠하지 않았던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에 은퇴를 할 정도였으니.

대한민국이라는 먼 타지에 가서 무언가 하기에 분명 어려움은 있었다.

하지만, 아이번의 머릿속 한편에는 새로운 감각이 떠올랐다.

‘할 수 있을지는 중요하지 않지.’

아이번은 이안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자신과 대화를 하고, 즉흥으로 연주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내는 신비로운 힘.

게다가 이미 아이번이 한 연주를 파악하여 그에게 가르쳐주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애써 숨기려고 했던 연주법이 되레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그 자체만으로 음악의 내용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이라고 알려준 사람은 이안이 유일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드는 결심은 하나였다.

‘가고 싶다. 가야 한다!’

기존의 피아노와 다른 새로운 배움.

이안을 통해서라면 그동안 자신이 펼치지 못했던 뜻을 곡에 녹일 수 있을 것이란 가능성에.

아이번은 느릿한 몸을 애써 빠르게 움직였다.

***

“무얼 좋아할지 몰라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내왔어요.”

여왕은 직접 우린 홍차 한 잔을 내밀었다.

연주를 끝낸 후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여왕의 말로 만들어진 티타임.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무척 감동이었습니다.”

간결한 소감을 시작으로 여왕은 여러 감상평을 내놓았다.

첫 번째 곡에 이어 두 번째 곡까지.

단기간에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두 곡의 완성도가 출중했다며 찬사를 보냈다.

특히 첫 번째 곡은 필하모니아에서 연주했을 때와는 또 다른 감성이 돋아났다고.

앞으로 그녀가 살아있는 한, 왕실의 메인 헌정곡으로 삼을 것이라 선언했다.

본래 곡이 필하모니아에서 만든 것을 감안했을 때 다소 어려운 시도였지만, 여왕은 되레 필하모니아가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다고 덧붙였다.

“필하모니아에서는 도리어 긍정적인 반응이더군요. 이안씨가 손댔으면, 그것은 이안씨의 곡이라며 입장문을 보내왔습니다.”

여왕은 모든 것이 내 덕이라며 계속해서 심상을 읊었다.

“두 번째 곡은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경쟁과 핍박, 승리와 패배를 한 곡에서 느낄 줄은 몰랐거든요. 특히 2악장은 두 그룹의 연주가 경쟁하듯 터져 나오면서도 그 아래 피아노 음색이 무척 슬프게 다가왔습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여왕의 눈이 촉촉해졌다.

“뭐랄까… 위로받는 기분이었어요.”

10분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순간 동안은 영국의 여왕, 빅토리아 2세가 아니라 그저 한 명의 인간 빅토리아가 된 것 같다고 표현했다.

자신의 인생 전체를 갈무리하는 것 같은 선율에.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는 감각은 마치 주마등을 연상케 했다고 전했다.

여러 위기가 있을 때마다 여왕은 선왕, 또는 자신의 권력을 활용하여 숱한 위기들을 넘겼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원성을 들을 때도 있었고, 누군가는 잘했다며 칭찬을 덧붙였다.

그러나 그 굴곡 속에서 여왕은 힘들다는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여왕이 무너지는 것은 곧 영국이 무너진다는 의미였으니까.

나의 곡은 마치 7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고생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여왕은 너무나도 좋은 곡을 선물해줘서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홍차로 목을 축이던 여왕은 문득 떠오른 듯 말문을 열었다.

“새 단원을 모집한다고 들었는데. 오디션을 영국에서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뉴욕시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왕은 영국에서 오디션을 진행할 시 수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을 이었다.

런던의 중심가이자, 영국 클래식의 메카인 오페라 하우스를 대관해주는 것은 물론, 왕실에서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줄 수 있다고.

게다가 이러한 욕심이 드는 것은 처음이라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여왕이란 욕심으로 일을 하면 안 되는 자리입니다. 하지만, 이안씨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면 여왕이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 욕심을 내세우고 싶네요.”

빙긋 웃은 여왕은 그만큼 나와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좋았다며 칭찬을 덧붙였다.

애써 부담갖지 말라고 여왕이 연신 말했지만, 그녀의 눈빛에서는 묘한 기대감이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서울에서 오디션을 열기로 마음먹은 상태이니.

겸허하게 거절하는 것도 도리일 것이다.

“제안 감사합니다. 하지만, 여왕님께 완성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드릴 순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차후에 완성된 오케스트라로 만나 뵀으면 합니다.”

여왕의 제안을 거절하되, 보다 부드럽게 내뱉을 수 있는 말.

여왕 또한 내 말에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되레 여왕은 완성된 오케스트라를 본다면 오늘처럼 기쁠 것이라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나와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영국을 방문한다고 한다면, 영국 왕실에서 두 팔 벌려 환영해주겠다는 뜻을 밝힐 정도.

더 나아가 여왕은 남다른 팬심을 드러냈다.

“재탄생 될 리히트가 무척 기대되네요. 연주회를 한다면 꼭 보러 가도록 하겠어요.”

아직 오디션 공지도 나오지 않았음에도 여왕은 벌써부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흐뭇한 미소와 함께 홍차를 넘기던 그녀는 문득 궁금한 듯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제목을 듣지 못했네요. 이안씨가 만든 두 번째 곡 말이죠.”

서프라이즈로 공개하기 위해 제목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여왕에게 내가 만든 13번째 자작곡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영국의 역사를 담았다는 의미에서 <역사(歷史)>라고 부르려고 합니다.”

***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리드미컬 체임버홀에 손님이 찾아왔다.

하나같이 양복을 빼입은 서울시 공무원 넷.

그중 리더 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허리를 숙이며 악수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서울시 홍보담당관 팀장, 정수범이라고 합니다.”

홀에 마련된 소회의실에 들어가자 그들은 곧바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나 또한 미리 그들에게서 파일을 건네받아 내용은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음악인들이 몰려오는 만큼, 음악인들을 매료시킬 축제로 기획하고 싶다고.

서울시 예산을 소모해서 홍보하는 것은 물론, 여타 일반인들도 축제처럼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덧붙였다.

“리히트 오케스트라 오디션은 세계 각국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유동 인구가 엄청날 겁니다.”

그의 말대로였다.

아직 정확한 오디션 일정을 올리지 않았는데도, 세계 이곳저곳에서는 오디션 참가 방법을 묻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큰아버지는 반응 수만 봐도 최소 수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오디션에 참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한 큰 인원이 오가는 일에 축제를 접목시킨다면 큰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수범의 설명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음악으로 크게 두각을 드러낸 건 이안씨가 유일하니까요. 단순한 클래식이나 오케스트라의 고장이라기보다, 이안씨를 주축으로 해서 홍보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수범은 다소 자조적인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동안 서울시가 대한민국의 수도라는 것 말고는 특출난 특징이 없었다고.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서울시를 국내는 물론, 국외에 소개하는 것은 어려움이 많다고 덧붙였다.

한강의 기적으로 유명해졌던 것도 어느덧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서울에는 새로운 명칭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팀장의 말에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긴 하네.’

홍보는 물론, 행사와 접목시키는 만큼 필요한 공간 대절은 모두 부담하겠다고 할 정도.

하지만, 수범의 설명에서 오디션을 직접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빠져있었다.

아마 오디션을 과하게 건드리지 않고, 유동인구를 적절하게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겠지.

오디션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야 내게도 손해는 없는 제안이었다.

자체적으로 홍보해주는 것은 물론, 그들의 말대로 여타 시너지를 생각하면 리히트 오케스트라를 더욱 알릴 수 있는 수단이 될 테니까.

“이안씨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생각을 묻는 수범의 표정에 사뭇 긴장감이 묻어났다.

열정 어린 브리핑에도 큰 표정 변화를 하지 않는 나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듯 보였다.

잠깐 생각을 하느라 크게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으니까.

상황을 타개하려는 듯, 비교적 젊어 보이는 공무원이 나섰다.

“아예 서울시를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도시로 색을 입혀버리는 것 어떻겠습니까?”

그의 입에서 여러 도시 이름이 나왔다.

음악의 도시, 빈. 예술의 도시, 파리. 낭만의 도시, 베니스. 등.

갖가지 이름을 가진 도시들을 나열하는 공무원의 말투에 절실함이 느껴졌다.

“이안씨가 허락만 해주신다면, 이안씨를 중심으로 해서 세계적인 축제로 키워보고 싶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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