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본격적인 리히트 오케스트라 오디션 공지가 올라갔다.
한 달 남짓이 지나면 수많은 희망자들이 한국으로 밀려오리라.
이번 오디션을 치르고 나면 사십 명이던 단원은 두 배로 늘어날 터.
그 전에 미리 해야 할 것이 있었다.
‘혼자 모든 것을 끝까지 할 수는 없으니까.’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커지면 내가 일일이 코멘트를 달 순 없을 것이다.
매번 연습 때마다 백 가까이 되는 숫자를 하나하나 관리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또한 악기에 대해서는 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 터.
그렇다면 단원들의 수준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애초에 오케스트라를 차렸던 것은 조직의 영향력을 이용해 사조를 만들기 위해서였으니까.’
머릿속에 그림을 떠올리며 연주를 하던 나처럼.
단원들도 듣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떠오르는 연주를 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지난 오디션 때 이미 그 수준에 도달한 베테랑도 있었고, 흐릿했지만 몇 번의 연습을 통해 그 수준에 도달한 천재들도 있었다.
유수의 오케스트라가 참여한 경연에서 처음 데뷔전을 치렀음에도 우승을 거머쥘 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으리라.
하지만, 이번에는 단순히 표현하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된다.
그것을 완전히 체득하여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전체 점검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매번 코멘트를 달던 나였기에.
‘점검’이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감이 무척 묵직했는지, 내 선언에 많은 단원들이 사뭇 긴장 어린 기색을 내비쳤다.
몇몇은 긴장 대신 기대감 깃든 눈빛을 하고 있었다.
특히 연습에 연습을 더해 이제 4개의 현을 모두 쓸 수 있게 된 서령의 눈이 무언가 보여주겠다는 듯 특히 초롱하게 빛났다.
“요한나. 먼저 부탁드립니다. 자유롭게 연주해주세요.”
가장 가까이에 있던 피아노가 첫 번째였다.
요한나는 갑작스런 요청에 잠깐 멈칫하다가도 이내 자신 있다는 듯 연주를 시작했다.
즉석 연주를 부탁했던 것에 비해 그녀의 손에서 피어나는 피아노곡은 모든 단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4번.
일명, <마제파>.
리스트의 악명높은 선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음표들이 고스란히 피아노를 통해 현현한다.
손가락이 쉴 새 없이 건반들을 타건하는 것은 기본.
그 속도 또한 단원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든다.
마치 말발굽처럼 연속되는 8분음표와 16분음표의 향연.
게다가 아주 짤막한 16분음표마저 셋잇단음표로 묶어 그 속도를 배가시킨다.
그만할 즈음이라고 생각할 때 다시금 압도적인 선율이 몰아친다.
‘예전보다 훨씬 뚜렷해졌다.’
요한나의 연주 실력은 본래부터 좋았다.
하지만, 그녀의 연주는 윤곽을 그리고 명암을 넣는 데 그쳤을 뿐.
상세한 색채를 넣거나 생동감 면에서는 다소 부족한 면모를 보였었다.
지금은 그 부족한 것이 모두 채워진 듯보다 유려한 음색이 터져 나왔다.
거친 연주는 억센 펜으로 그림을 그리듯 펼쳐지고, 미묘한 차이를 두어 더욱 자연스러운 말발굽 소리가 연상된다.
요한나의 연주를 듣고 있으니 머릿속에서는 자연스레 초원을 달리는 말이 그려졌다.
리스트의 <마제파>처럼 맹렬한 기세로 나아가는 말.
다른 단원들도 이를 본 것인지 박수로 화답했다.
“다음.”
나는 평가를 덧붙이는 대신 다음 사람을 바라보았다.
앞자리에 있던 현악기들을 시작으로, 관악기와 퍼커션들까지.
단원들이 연주를 함과 동시에 머릿속에는 오디션을 봤을 때와 현재의 음악이 교차되어 떠올랐다.
‘상당히 실력들이 향상되어 있어.’
기본적으로 뛰어난 실력자들이었건만.
머릿속에서 직접적으로 비교하자 그 변화는 크게 와닿았다.
이전 연주를 듣고 그려진 그림들도 무척 빼어났는데.
이제는 각자의 재량을 연주에 녹여내는 데 성공한 듯 보였다.
오디션 때처럼 한 달 가까이 하나의 연주를 한 것이 아닌, 즉석에서 곡을 선택하여 연주하게 했음에도 단원들의 연주를 들으면 머릿속에서 선명한 그림이 떠올랐다.
가장 큰 변화는 테레민 연주자, 루이사였다.
‘드뷔시의 <달빛>’
근대와 현대 사이의 연결 다리를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피아니스트.
드뷔시의 대표곡인 <달빛>은 호수에 비친 달을 형상화하듯 편안한 음색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루이사가 연주하는 <달빛>은 그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마치 우주에서 보는 달을 형상화한 것 같다.’
테레민 특유의 오묘한 기계음이 섞이자 드뷔시의 <달빛>이 묘하게 나아간다.
테레민이 만들어낸 선율이 은은하게 달빛을 그려낸다.
옅은 기계음이 여운을 남기자 신비로운 기색이 돋아난다.
단순히 유려하게 연주를 펼치는 것은 기본.
미세하게 떨림을 조절하는 손길은 마치 세밀붓으로 그림을 완성하는 화가 같았다.
그와 동시에 내 머릿속에서도 어두컴컴한 우주에 달만 떠오른 그림이 그려진다.
유일무이한 악기 연주자인 탓에 피드백을 좀처럼 받지 못했을 텐데도 루이사는 이전보다 발전한 연주를 선보였다.
‘모두 눈에 띄게 발전했어.’
아람과 서령, 가야금 베테랑 선화까지.
모든 단원들의 연주는 오디션 때보다 훨씬 향상되어 있었다.
이전에 마치 곡에 적힌 내용들을 그대로 복사하여 펼쳤다면, 이번에 그들이 보여준 연주는 자신만의 독특한 악기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린 듯.
각자가 만들어낸 완벽한 그림들이 내 머릿속에 하나둘씩 새겨졌다.
***
에비게일 스트링.
그녀는 미국 음악가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거물이었다.
유튜브 구독자는 천만을 넘긴 지 오래고, 누적 조회수는 무려 20억이 넘었다.
‘전자 바이올린은 클래식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음에도 유일하게 클래식계에서도 인정받는 바이올리니스트.
지금은 클래식에 새로운 입히고 있다는 평을 받을 정도였다.
이미 완성된 음악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에비게일이거늘.
그녀가 향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서울이었다.
‘새로운 단원을 모집한다고 했지.’
박이안.
에비게일은 이안이 처음 등장할 때부터 많은 관심을 보였다.
본래 한국 K-pop에 관심이 많은 에비게일은 한국의 유명 아이돌, 한유라의 곡을 접했다.
독특한 피아노 전개와 곡 해석으로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끈 곡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유려한 연주를 펼칠 줄 아는 피아니스트라고만 생각했다.
그런 인물이 다수의 자작곡으로 세계에 충격을 준 것은 물론, 이제는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었다.
불과 스무 살의 나이에 오케스트라 창단을 하는 모습에.
에비게일은 단번에 이안의 생각을 눈치챌 수 있었다.
‘사조를 만들고 전파하기 위해서.’
이안의 의중을 단번에 알 수 있었던 이유는 에비게일 또한 그렇게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클래식이 따분하지 않고, 되레 흥미를 이끌어내고 독특한 장르로 부각되길 원했기에.
에비게일은 자신만의 음악 스타일을 더욱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걸 완성하고, 전파하기 위해. 에비게일은 오랜 세월 동안 음악에 몰두했다.
유튜브를 운영하는 것은 물론, 자작곡을 만들고, 세계인들에게 친숙한 게임 BGM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했다.
그녀의 유튜브가 크게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하지만, 따라오는 사람이 없었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연주로 녹여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상대방이 알아채고, 이해하고, 직접 연주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사람들은 에비게일의 연주를 대단하다고 평가했지만, 딱 거기까지.
화려하게 펼쳐지는 선율을 따라 하려고 하지 않았다.
마치 범재들은 천재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사조를 만드는 것은 물론, 그것을 타인에게 전파하는 것도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해냈단 말이야…’
이미 이안의 연주가 좋은 것은 정평이 나있었다.
에비게일 또한 이안의 연주, 자작곡이 좋은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설명은 에비게일에게도 있었다.
같은 사람, 같은 연주, 같은 칭찬.
그럼에도 이안은 가능하고, 자신은 할 수 없는지 묘한 궁금증이 일렁였다.
‘그라면 알려줄 수 있을까?’
그 작은 질문이 에비게일의 한 달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평소 같았으면 새로운 곡을 만들거나, 유튜브 영상에 올릴 곡을 찾고 있었겠지만.
오디션까지 주어진 한 달 동안 에비게일은 하나의 곡에 열중했다.
비행기를 타고 있는 지금도 그녀의 손에는 악보가 들려있었다.
<염라>
서울에서 열리는 리히트 오케스트라 신인 단원 모집.
그 과제 곡은 이안의 자작곡이었다.
***
중소벤처기업부.
중소기업과 벤처 기업을 지원하고, 보호하고, 육성하는 일의 사무 대부분을 관장하는 곳.
여러 기업들의 연결을 돕거나 새롭게 창업하는 청년들을 지원하기도 하는 곳이었다.
그중 대외협력팀은 여타 기업의 협력 업무를 담당하거나, 중요 행사를 관장하는 팀이었다.
대외협력팀의 대표적인 기획 아이템은 중소기업과 창업 청년들을 지원하는 기업 박람회였다.
매번 하는 것이라 익숙했건만.
이번 행사의 팀장을 맡은 최한영이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안일했어. 변수를 생각하지 못할 줄이야.’
본래라면 서울시 홍보담당관과 협업하여 일을 진행해야 했거늘.
하지만, 이번에는 좀처럼 협조가 잘 이뤄지지 않았다.
리히트 오케스트라 오디션에 힘입어 서울시에서 행사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바람에 협업이 되지 않은 것이다.
특히 이번 오디션의 인기를 통해 서울시가 음악과 관련된 업종 종사자들을 몽땅 불러내는 바람에 이번 기업 박람회는 더욱 약세를 보였다.
‘신청한 기업들도 몇몇 취소할 정도였지.’
특히 음악과 관련된 일부 중소기업들은 본래 박람회에서 불참을 선언했다.
별도의 이유를 밝히진 않았지만, 음악과 관련되었다는 것에서 이미 눈치챌 수 있었다.
기업 박람회에서 소개하는 것보다 음악가라는 고정 이용객이 몰리는 오디션 현장이 더욱 좋을 것이란 판단을 했을 테니까.
한영 또한 자신도 그랬을 것이라며 씁쓸한 기색을 내비쳤다.
‘박이안 피아니스트의 인기라면 그럴 만도해.’
매번 주최한 행사를 말아먹는다는 이야기가 오가던 홍보담당관이었건만.
예산 잡아먹는 부서라는 험담이 오갔음에도, 이안이 등장하자 그러한 소리는 단숨에 사라졌다.
이미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거장급 인정을 받고 있는 이안이었으니까.
이안이 관련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벌써부터 서울시는 숱한 홍보물을 뽑아내고 있었다.
그뿐만이랴.
‘그쪽에서도 박람회 형식으로 진행할 줄이야.’
음악 박람회.
악기와 엔터테이너, 등 음악과 관련된 업종을 모아 박람회를 한다는 소식은 이미 한영도 들은 상태였다.
거물들은 물론, 전 세계 음악인들이 모이는 상황인 만큼 그 사람들을 겨냥하겠다는 의지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전략.
거기에 이안이라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 들어가면 그 효과는 더욱 클 것이다.
‘주제가 달라도 분명 비교되겠지.’
음악과 창업.
중소벤처기업부가 진행한 박람회와 서울시에서 진행한 박람회는 내용은 다르지만, 비교되기 쉬운 구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끝나버린 기업 박람회를 다시 열 순 없는 노릇.
이젠 사후 방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업 하나 엮어서 성과를 내면 좋을 텐데…’
앞으로 오디션까지 2주가 남은 상태.
중소기업 하나 정도는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음악 박람회에 참여시킬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여력이 있는 것뿐만 아니라, 그래야만 중소벤처 기업부의 체면이 선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장소와 시기에 행사를 주최하는데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음악과 관련된 중소기업을 생각하려니 좀처럼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한영의 눈길을 끈 것은 이번 박람회 부스들 중 가장 큰 인기를 몰았던 VR 기업의 팜플렛이었다.
‘박이안 피아니스트의 음악은 ‘보이는 음악’이라고 표현한댔지.’
한영은 애써 이안에 대한 평을 하나 떠올렸다.
보이는 무언가를 음악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돋보인다고.
그 말을 떠올리자 한영의 머릿속에 전구가 켜졌다.
한영은 곧장 휴대폰을 들어 VR산업을 주관했던 기업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