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서령은 눈을 감은 채 이안이 말했던 것을 다시금 떠올렸다.
합주를 하면서 했던 이야기와, 개인 피드백을 하면서 받았던 조언들.
오케스트라에 있으면서 체득했던 것들까지 그녀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듣는 것을 넘어 느낄 수 있는 음악.’
서령은 이안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연주를 잘하는 것만으로는 리히트에 들어올 수 없다.
“수고하셨습니다.”
서령은 연이어 맡은 참가자들에게 불합격을 주었다.
꽤 잘한다고 평가할 수 있는 연주가도 있었지만, 대부분 기교적인 면에서 출중할 뿐 개인의 생각이나 해석이 없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리히트에서 음악은 직접 느끼고, 배우는 것이지 곡을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인정할 수 없습니다. 왜 불합격인 겁니까?”
몇몇은 서령을 향해 자신이 탈락한 이유라도 알려달라고 물었다.
예전이었으면 되레 우물쭈물해서 말도 못 했겠지만, 지금의 서령은 달랐다.
“오케스트라는 절제가 생명입니다. 그런데 참가자께서는 감정이 과잉된 나머지 속도나 운지법에서 오류를 범하셨더군요. 가령 트레몰로를 이어가는 부분에서…”
리히트에 들어온 서령은 누구보다 노력했다.
남들보다 부족한 지식을 채우기 위해 매일 다른 단원에게 교습을 부탁했고, 연습이 끝나도 이론 서적을 다시금 탐독했다.
그 덕에 서령의 평은 무척 객관적이면서도 분석적이었다.
어떤 것이 부족했고, 왜 탈락시키는지 이유를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추상적인 표현을 쓰면서도 어느 부분이 주된 탈락 요인이었는지 짚어주는 통찰력까지.
완벽에 가까운 설명에 참가자들은 자신의 상태를 반성하며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여인의 등장에 참가자들은 물론, 단원들도 술렁였다.
“헐! 에비게일 스트링이야!”
눈을 짙게 칠한 독특한 화장법에 옅은 금발이 돋보이는 여인.
바이올린을 잡은 에비게일이 천천히 연단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바이올린 하나로 클래식계는 물론, 음악계에 큰 반향을 가리킨 인물.
새로운 음악의 선두주자나 다름없는 사람이 오케스트라 오디션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반응이 뜨거웠다.
에비게일은 살짝 웃어 보이곤 심사위원들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참가 번호 546번입니다.”
에비게일의 악수를 받는 서령의 손이 묘하게 떨렸다.
에비게일은 참가자이기 전에, 서령의 롤모델이었다.
‘내가 진짜 닮고 싶어 했던 사람.’
성공적인 음악가라는 타이틀에 굴곡 없는 인생을 살았을 것 같지만, 에비게일의 인생은 무척 험난했다.
마약 중독자인 부모 아래서 태어난 것은 물론, 바이올린 하나 살 돈도 없었던 각박한 상황.
그럼에도 최정상급 음악가로 성장한 것에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불우한 형편과 교회에서 음악을 시작했다는 점까지, 서령과 에비게일은 묘하게 어딘가 닮아있었다.
‘이 사람도 찾아올 정도라니…’
리히트 오케스트라에는 요한나처럼 기존의 커리어를 내려놓고 찾아온 사람이 많았다.
유명 오케스트라의 수석이나, 나라에서 인정하는 음악가, 등.
그런 인물과 비교해도 에비게일의 명성은 월등히 높았다.
이미 성공을 넘어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니까.
그런 위인이 리히트 오케스트라를 온 이유는 단 하나,
‘박이안 단장님 때문이겠지.’
서령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지금 자신은 이안을 대신하여 심사를 하는 것이라고, 그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책임감이 들끓었다.
사람들의 이목도 집중되었다.
지금까지 불합격을 연발하는 서령이 이번에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또 에비게일이 어떤 연주를 보여줄지 기대 어린 시선을 보냈다.
“연주 시작해주세요.”
서령의 요청에 에비게일은 곧바로 바이올린 현 위에 활을 올렸다.
순식간에 여러 개의 음표들이 바이올린을 통해 현현한다.
속주(速奏)를 펼치면서도 박자는 바뀌지 않고 온건한 기세로 나아간다.
약하게 몸을 움직이며 연주를 펼치는 에비게일은 무언가 상상하는 듯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연주에 임했다.
연주가 시작됨과 동시에 서령은 그 곡이 무엇인지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염라>, 단장님의 첫 번째 자작곡이다.’
***
넓은 콘서트홀의 사각 무대, 두 부분으로 나눈 채로 악기들에 대한 오디션이 한창이었다.
내가 있는 곳에서는 피아노를, 반대편에서는 현악기를 주축으로 오디션이 진행되고 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아이번은 나를 향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참으로 신기한 광경입니다. 자신의 전공이 아님에도 면밀하게 파악하고 있군요. 실로 놀랍습니다.”
“그것도 알아보셨습니까.”
“오랫동안 연주가들을 봐서 그런지 얼핏 자세만 봐도 알 것 같습니다.”
아이번의 안목도 상당했다.
겉으로 보면 각 단원들이 어떤 악기를 전공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터인데.
오랜 오케스트라 경력을 방증하듯, 아이번은 잠깐 단원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전공을 이루 짐작했다.
“단원들의 안목 또한 길러야 할 테니까요.”
본래라면 피아노는 피아노대로, 바이올린은 바이올린대로, 전공자들을 앞세워 심사를 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이번 오디션의 심사위원은 모두가 전공자는 아니었다.
서령만 해도 첼리스트이지만, 바이올린과 비올라 등을 심사했고, 피아니스트인 요한나도 가야금 심사위원으로 보낸 상태였다.
“심사를 맡은 악기와 자신의 악기가 어떻게 융화될지도 생각해보세요.”
내가 단원들에게 당부한 내용이었다.
오케스트라는 개인의 기량이 출중하다고 해서 이뤄지는 그룹이 아니다.
다른 악기와 섞일 가능성을 판별하는 것 또한 단원들이 익혀야 할 것들.
그래야 더욱 자유로운 음색을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단원들에게 준 숙제이자, 앞으로 리히트가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었다.
내 말을 이해한 듯, 아이번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무척 떨리네요. 이안씨에게 평가받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는데 말이죠.”
“꾸밈 없이 연주에 임해주세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이번은 이미 수없이 오케스트라에서 심사도 봤을 테니까.
내 말이 어떤 뜻인지 이해한 듯, 아이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준비한 곡은 <염라>입니다.”
아이번이 곡을 소개하고 손가락을 움직이려는데,
무대의 한편에서 강렬한 현악 선율이 터져 나왔다.
순간, 각자의 악기에 집중하고 있던 참가자와 심사위원들도 일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한 화장과 금발이 돋보이는 여인.
에비게일 스트링이 <염라>를 연주하고 있었다.
오디션장이었던 콘서트홀은 순식간에 개인 연주 무대로 탈바꿈했다.
연이어 터져 나오는 화려한 보잉에 사람들의 눈길이 한꺼번에 쏠렸다.
나 또한 그들 중 하나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이번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반응하면서 눈길은 에비게일에게 떨어지지 않았다.
나 또한 워낙 강렬한 소리에 오디션을 잠깐 중단하고 바이올린 파트로 향했다.
무수한 사람들의 시선 아래.
연이어 바이올린 현을 긋는 에비게일의 모습은 무척 여유로웠다.
그러나 입가에 핀 여유로운 미소와 달리 곡은 강렬함, 그 이상을 보여주었다.
‘스케르초를 저렇게 활용할 줄이야.’
짧고 빠른 박자가 특징인 스케로초로 시작하는 <염라>의 도입부.
그 시작에 에비게일은 자신의 장기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오른손은 여유롭게 활대를 잡으면서도, 왼손은 끊임없이 진동을 일으키며 비브라토 음을 만들어내었다.
끝없이 움직이는 사람의 심리를 고스란히 표현하듯 높은음과 낮은음을 오가며 소리가 터져 나온다.
놀라운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자 바이올린이 아닌데도 저런 소리를 낼 줄이야.’
현을 누르는 세기에 따라 소리 크기가 달라지는 아날로그 바이올린과 달리, 전자 바이올린은 조정만 해두면 현이 닿는 것만으로도 소리가 난다.
현의 마찰에 따라 소리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현에 자극만 가더라도 소리가 나오기 때문.
에비게일은 이 특이점을 활용하여 아날로그 바이올린으로는 낼 수 없는 소리를 활용했다.
속주를 펼치면서도 음이 어긋나거나 약해지지 않게 만들었고, 여러 개의 음을 한꺼번에 펼치며 새로운 바이올린 음악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지금 에비게일의 손에 쥐어진 바이올린은 목재로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에비게일은 전자 바이올린을 켜듯 여러 개의 음을 내는 것은 물론, 속도 또한 유지하면서 정확한 음색을 표출했다.
게다가.
‘해석 또한 굉장히 독특한데?’
에비게일의 연주가 이어질수록 머릿속에서는 악보뿐만 아니라 그림이 차례대로 그려졌다.
내용은 원곡 <염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생의 굴곡을 나타내듯 혼란스런 음색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중심 화음은 흐트러지지 않고 나아간다.
마치 묵묵히 제 갈 길을 갔던 큰아버지를 표현하듯.
곁가지 음색을 한꺼번에 묶는 중심 화음이 돋보인다.
그런데, 기존의 <염라>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묵직하지만, 어둡지 않게 곡을 조금 변경했네.’
곡이 가진 위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곡의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마치 나이 오십이 넘은 큰아버지가 아닌, 젊은 사람을 표현하듯.
에비게일 특유의 생동감이 넘치는 연주였다.
연주를 하는 중간중간 나를 쳐다보는 에비게일의 눈빛에서 그 의중을 눈치챌 수 있었다.
분명히 나를 바라봤다.
‘염라에 나를 대입해서 곡을 연주했어.’
내가 만든 <염라>가 큰아버지의 인생을 고스란히 펼쳤다면, 에비게일이 연주하는 <염라>는 내 인생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전생이 떠올랐던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당시 내가 했던 혼란이 연주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약동하듯 연한 음색을 터뜨리면서도, 콩쿨 우승과 같은 굵직한 업적에 찬사를 더하듯 활기찬 음색이 더해진다.
점차 화음을 더해가는 연주법은 마치 내가 <영감>을 작곡했을 때 화음을 사람에 빗대어 표현했던 것과 같았다.
그리고 대망의 3악장.
본래 큰아버지가 스스로를 되돌아본다는 의미로 피아노 독주를 펼쳤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에비게일이 해석하고 표현하는 3악장은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동시에 묘하게 섞여들어온 다른 화음에 머릿속에서는 다른 이미지가 그려졌다.
‘마치 무대 때 연주했던 느낌이 나는데?’
큰아버지의 지휘와 나의 독주가 한데 섞여 펼쳤던 무대.
기자들은 그 장면을 보고 이렇게 표현했다.
‘마에스트로가 천재를 목도했다.’고.
그때 나와 큰아버지 사이에 흘렀던 흐름을 표현하듯, 서로 다른 두 화음이 섞여들어 가듯 펼쳐졌다.
그제야 나는 에비게일이 연주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본인을 천재로 인정하고, 목격하고 있다는 의미.’
원곡의 큰아버지를 나로, 원곡의 나를 에비게일로 표현한 것.
큰아버지가 나를 지금껏 믿고 응원해주었듯, 에비게일 또한 내가 그녀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믿어줄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만약 부드럽게 곡이 전개되었다면 믿어달라는 부탁, 또는 아첨으로 느껴졌겠지만, 그런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되레 느껴지는 것은 반대였다.
‘강한 자신감과 여유로움.’
이미 자신은 내가 아는 것보다 천재적이라고 광고하듯, 강렬한 음색의 연속이었다.
이미 합격이 확정된 양 자신 있게 펼치는 연주에는 묘한 거만함도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거만함이 거북하지 않았다.
되레 그 자신감을 크게 부각시켜 줄뿐더러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마저 심어주었다.
‘수천 번을 연습했겠군.’
피아노곡을 바이올린으로 옮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피아노의 풍성한 음계를 바이올린으로 표현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 눈에 선했다.
게다가 의도적으로 바꾼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든 연주에 박자와 운지법까지 완벽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악보에 정확하게 새겨질 정도였으니까.
이미 천만이라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은 바이올리니스트다.
게다가 영상에서 보여줬던 여유로움을 이토록 많은 사람 앞에서 보여줬다는 것으로 강단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곡이 끝나자 사람들은 지금이 오디션이라는 것도 잊은 채 환호성과 박수를 보냈다.
에비게일은 자신이 보여줄 것을 모두 보여주었다는 듯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서령을 바라봤다.
“어때요? 저 합격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