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다시금 오디션 분위기를 이어가려던 찰나.
이번에는 피아노 쪽에서 화려한 연주가 튀어나왔다.
아이번의 연주는 이안 특유의 표현력까지 그대로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끄러웠다.
에비게일의 <염라>가 폭풍 같았다면, 아이번의 <염라>는 산들바람 같았다.
하지만, 산들바람 같은 흐름이라도 결코 그것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자꾸만 보게 돼.’
심사가 미뤄지면 짜증 내는 사람이 있을 법한데,
되레 다음 차례 참가자도 서령이 아닌 아이번의 연주를 지켜보고 있었다.
정적이고 느린 템포의 곡은 쉽게 지루해지기 마련인데, 아이번이 펼치는 선율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느릿하면서도 풍미가 살아있는 듯한 선율은 들으면 들을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었다.
‘마치 염라에 빙의되어서 연주하시는 것 같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마에스트로가 된 것처럼.
아이번이 만들어내는 선율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걸음을 떠올리게 했다.
그 걸음이 안타까워서, 그 걸음이 나아가서 어떤 이야기를 펼칠지 궁금해서.
서령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아이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던 중 3악장에 들어서자 다시금 곡은 반전을 더했다.
힘주어 누르는 건반에서는 강한 선율이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변환시킨 낮은음에 서령의 목에 소름이 돋았다.
‘연주에 저렇게 카리스마가 가득할 수 있구나.’
마치 처음 아이번이 이안을 마주했을 때의 감정을 토로하듯, 낮게 시작한 음색이 콘서트홀에 울려 퍼졌다.
전화를 받았을 때 놀라웠던 감정들과, 자신의 뜻이 이안의 입에서 튀어나왔을 때 느꼈던 경외감, 등.
늦은 나이에 천재를 목도한 강렬한 마음이 선율에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저분은 당연히 합격이겠지?’
정확한 박자와 소리, 거기다 노장의 발걸음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력.
서령은 아이번이 리히트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인재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곧바로 합격 멘트를 할 줄 알았는데.
이안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아이번과 이안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불합격 드리겠습니다.”
아이번의 불합격 소식에 곁에 있던 사람들이 크게 술렁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방금 펼친 연주는 완벽 그 이상이었고, 이미 검증된 피아니스트인 아이번을 왜 떨어뜨렸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불합격 소식에도 정작 당사자인 아이번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들어주어서 감사합니다.”
입가에 맺힌 미소에는 되레 후련함이 드러났다.
약하게 다리를 떨며 걸어 나가는 모습에 사람들이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었다.
동시에 몇몇은 저리해도 떨어지는 것이냐며 불안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모두가 이안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
서령은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참가자가 뭐가 부족했던 거지?’
서령은 이안의 선택을 의심하기보다는 왜 떨어졌는지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지금껏 마주했던 이안은 누구보다 음악에 대한 안목이 높은 사람이니까.
분명 이안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했다.
혹 자신이 놓친것이 있진 않을까.
문득 서령은 에비게일을 다시 쳐다봤다.
“에비게일 스트링님, 죄송하지만 한 번 더 와주시겠어요?”
갑작스런 호출에 에비게일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에비게일이 무대에 다시 올라오자 서령은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한 번 더 연주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편곡이 아닌 원곡으로요.”
잠잠해지려던 장내가 한 번 더 술렁였다.
에비게일도 지금 상황은 예측하지 못한 듯 멈칫거리다가 이내 바이올린을 고쳐잡았다.
바이올린을 턱에 둔 에비게일은 언제 당황했냐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현을 바라보았다.
현이 마찰함과 동시에 빠르고 경쾌한 음색이 터져 나온다.
카타리네 애니메이션에 수록된 <추격>이 에비게일의 바이올린으로 펼쳐진다.
급박한 상황을 나타내듯 현란하게 나아가는 선율은 조금의 흔들림 없이 박자를 지켜나가며 진행한다.
‘대체 얼마나 연습을 하신 거야?’
차마 감도 오지 않았다.
마치 CD를 튼 것처럼 곧바로 새로운 곡을 연주한 것도 놀라운데, 그 수준 또한 갑자기 부탁받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아직 <염라>를 연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체력적으로도 무리일 텐데도 연주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자신 있는 에비게일의 표정을 보면 이안의 자작곡 중 어느 것을 요청해도 곧바로 연주할 것만 같았다.
‘완벽해.’
서령은 그제야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앞서 펼쳤던 <염라>가 에비게일의 천재성을 보여줬다면, 이번에 펼친 <추격>은 에비게일이 얼마나 오케스트라에 잘 녹아들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무대였다.
유튜브에서 봤던 화려하고 재치 넘치는 컨셉뿐만 아니라, 정적이고 진중한 연주도 할 수 있을 보여줬기에.
서령은 이전보다 더욱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에비게일님. 합격입니다.”
***
[리히트 오케스트라 오디션 성공리에 마무리.]
[에비게일 스트링, ‘리히트에 감사, 앞으로 리히트에서 선보일 새로운 모습에 기대 바란다고 발표.]
[리히트의 첫 공연은 어디에서? 관심이 주목되는 가운데…]
.
.
오디션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각국에서는 연이어 리히트 오케스트라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는 사이, 합격한 단원들은 본국으로 돌아가 채비를 하곤 다시금 한국으로 들어왔다.
리드미컬 체임버홀이 이전보다 더욱 북적였다.
한 단원당 한두 명씩 뽑았으니 당연할 수밖에.
이젠 식구가 80여 명으로 늘어난 셈이다.
새로 뽑힌 단원들은 자신의 심사위원이자, 선임 단원들에게 다시금 인사하며 분위기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다들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 왔네.’
내 손에는 합격자들을 정리한 프로필이 쥐어져 있었다.
단원들에게는 프로필을 공개하지 않았음에도, 단원들이 뽑은 사람들은 최고의 실력자들이었다.
유명 음대 수석 졸업생 출신은 물론, 유수 콩쿨에서 입상한 경력이 있는 사람까지.
에비게일도 들어가 있었으니 그 수준을 알 수 있었다.
그중, 에비게일만큼 독특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 하나 있었다.
‘이 사람도 참여했었지.’
옅은 은발에 굵은 눈썹을 가진 남자.
조지 크레이머였다.
그는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왓슨’의 음악감독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이름보다 음악으로 더 잘 알려진 사람.
한국 사람에게도 이름 대신 그가 만든 음악을 들려주면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특히 대표곡은 간주만 들려도 모든 초등학생들이 따라부를 정도였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호른 연주가로 리히트에 들어온 것이다.
‘제대로 들어봐야겠군.’
조지를 넘어 다른 사람들의 프로필도 찬찬히 읽는 사이.
내게 한 단원이 다가왔다.
“아까는 정말 뜻밖이었어요 단장님.”
서령의 합격표로 리히트에 들어온 에비게일이었다.
영상에서 보여준 말괄량이 같은 이미지는 모두 컨셉인 줄 알았는데.
연주는 물론, 평소 모습에서도 쾌활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왜 아이번 선생님을 떨어뜨렸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궁금증 가득한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진중한 기색이 묻어나오는 질문이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진지한 표정은 그녀가 얼마나 궁금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나는 가볍게 그때의 상황을 얘기했다.
“아마 아이번 선생님은 제가 합격을 드려도 거부하셨을 겁니다.”
내 말에 에비게일은 그럴 리 있냐며 손사래를 쳤다.
자신도 얼마나 합격하고 싶었는지 모른다며, 아이번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번은 영국에서 만났을 때부터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보며 나한테 배우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다며 이야기했던 사람이니까.
하지만.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난데없는 표현에 에비게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어느 정도 갈피를 잡았다는 듯 안타까운 기색이 표정에 퍼졌다.
아이번의 표정이 바뀐 것은 2악장이 끝날 무렵이었다.
겉으로는 내색을 안 하려는 듯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군데군데 입꼬리가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마치 엄습해오는 고통을 참으려는 듯 연주하는 손에 의도적으로 힘이 들어가는 것도 보였다.
연주를 끝마쳤을 때는 대체 어떻게 연주를 지속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손이 쉴 새 없이 떨렸다.
아이번은 그런 손을 한참 동안 쳐다보기만 했다.
“연주를 끝마쳤을 때 무척 후련한 표정을 지으시더군요.”
옅은 아쉬움이 내비치는 얼굴을 했지만, 후회하진 않는 얼굴이었다.
마치 마지막 힘을 짜내어 연주를 완성한 사람처럼.
지친 듯 힘 빠진 얼굴이면서도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참 그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지 못했던 것은 그 표정 때문이었다.
“선율을 그려내려면 오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마 아이번 선생님도 해보시면서 깨달으셨을 겁니다. 이 상태로는 연주를 지속할 수 없다고요.”
리히트가 추구하는 음악의 방향성.
더욱 완벽한 연주를 만들기 위해 리히트는 다른 오케스트라보다 더 많은 연습을 하곤 했다.
특히 그런 상황에서 아이번은 되레 자신이 방해가 될 것이라 생각했겠지.
나 또한 합격표를 줘도 본인의 손으로 찢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미 우수한 실력을 가졌음에도 나는 아이번에게 불합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아이번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으니까.
에비게일은 상황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녀는 내 말에서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는 듯 물었다.
“표현이 독특하네요. 선율을 그려낸다라.”
“에비게일씨도 하셨습니다.”
“제가요?”
에비게일은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로 대답했다.
하지만, 분명 에비게일은 그런 연주를 펼치는 데 성공했었다.
‘누구보다 머릿속에 이미지가 잘 그려지는 연주였지.’
절로 머릿속에 큰아버지와 연주를 펼쳤던 때가 떠오르지 않았던가.
마치 붓질에도 힘 조절이 필요하듯, 에비게일은 현을 가지고 놀듯 그 강세를 잘 살린 연주를 선보였다.
누군가에게 배운 것이 아닌, 자신의 몸에 완전히 체득하여 자연스럽게 나오는 노하우.
그리고 그것을 특이점으로 살린 에비게일 또한 천재였다.
정확한 개념을 모르는데도 자연스럽게 곡에 더 많은 심상과 이미지를 불어넣었다는 것.
아이에게 덧셈과 뺄셈만 가르쳤는데 도형의 넓이와 부피, 더 나아가 미적분을 깨우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작 본인은 그것이 미적분, 그 이상의 실력인 줄 몰랐지만.
충분히 인사를 마쳤다고 생각한 나는 악보대를 몇 번 두드렸다.
철로 된 악보대가 떨리는 소리에 단원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내 쪽으로 모였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단장, 박이안입니다. 모두 리히트의 일원이 된 것을 환영합니다.”
짧은 인사에 사람들이 연이어 박수를 쳤다.
기본적인 몇 가지를 알린 나는 곧바로 우리 오케스트라가 가지는 특이점에 대해 설명했다.
“우리 리히트는 음악을 듣는 것 이상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내 말에 기존 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완벽하게 체득한 단원들이기에 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제 갓 단원이 된 사람들은 조금은 어리둥절한 듯 보였다.
“리히트가 생각하는 음악은 상대에게 경험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연주에서 더 나아간 생각으로 연주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악보에 있는 음악을 펼치고, 당대를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
그 이야기마저 자신의 것으로 가져오고, 자신의 생각을 곁들여 재창조할 수 있는 연주.
그렇게하여 다른 이들에게도 음악을 들려주고, 보여줄 수 있는 음악.
내가, 리히트가 원하는 음악이란 그런 것이었다.
“아마 처음 접하시면 어려울 겁니다. 개념이 굉장히 추상적이기 때문이죠.”
이번에는 기존 단원들이 격하게 인정했다.
미세한 손가락의 차이, 관악의 경우 숨의 차이로 연주의 차이가 드러난다.
하지만, 선율을 그리듯 만들어내는 것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었다.
그것을 더욱 쉽고 빠르게 가르치기 위해.
나는 한 가지를 생각해냈다.
“그래서 VR 기술을 활용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