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50화 (150/250)

150화

시각과 청각이 합치된 음악.

애니메이션 음악감독으로 일했던 조지 크레이머는 그 특이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잘 활용하면 장면과 음악, 두 가지가 시너지를 일으키지만, 반대로 자칫 잘못하면 음악도, 장면도 못쓰게 된다.

이미 그는 수많은 음악을 주무르고, 제 손으로 가차 없이 삭제했던 사람이었다.

분명, 이런 장르는 섭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지금 조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무언가였다.

귓가에 연주가 들려오고, 눈앞에서는 장면이 펼쳐진다.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에 건물이 들어서고, 사람들의 발길은 더욱 많아진다.

런던의 상징인 빅벤이 기초공사부터 차근차근 만들어지는 모습이 생생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모습이 변하지 않는 버킹엄궁은 영국의 무너지지 않는 역사를 보여주듯 굳건하다.

‘영국의 성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음악.’

그의 귀에 영국 왕실의 헌정곡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헌정곡의 백미는 단순히 영국의 찬란한 역사만을 보여주지 않는 데 있었다.

‘처참하군.’

한 마디가 절로 나오는 모습이었다.

백색 군복을 빼입은 영국군이 총칼을 들고 있다.

아편전쟁을 비롯하여 영국이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벌였던 수많은 참상들이 고스란히 보여졌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화려한 영국의 발전이,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지금의 영국이 있기까지 있었던 어두운 일들이 보인다.

오른쪽만 보면 화려한 영국을 볼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왼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묘하게 음악이 이리로 이끄는 느낌이란 말이지.’

이안의 헌정곡은 높고 빠른 박자로 화려한 영국의 모습을 형상화하면서도, 그 과정에 있었던 이면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는 듯 낮고 중후한 음색이 이어졌다.

어느덧 조지는 귓가에 맴도는 멜로디에 이끌려 영국의 두 얼굴을 차근히 바라보고 있었다.

뒤이어 흘러나온 음악은 <염라>였다.

눈앞이 한순간에 밝아짐과 동시에 현철의 사자후를 연상케 하는 선율이 터져 나왔다.

엄청난 위용에 조지는 놀라움과 감격스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3악장의 스케르초는 이미 농익은 거장을 표현하듯 강인하면서도 풍성한 음색을 자랑했다.

‘이게 마에스트로의 은퇴를 기념하여 만든 곡이랬지.’

조지는 귀와 눈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귓가에서 들어오는 소리를 최대한 곱씹는 것은 물론, 눈앞에 펼쳐진 이미지를 더해 더욱 풍미를 더한다.

높고 낮은 옥타브를 오가며 화려하게 펼쳐지던 연주는 어느 순간부터 차분한 음을 더해가며 속도를 줄였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나타난 영상도 조금씩 바뀌었다.

‘아, 이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였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찬사와 환호를 받는 것의 이면.

홀로 방에서 지휘에 대해 생각하고, 악보를 보며 연구하는 지휘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단순히 남들에게 선망받는 지휘자의 이미지가 아닌, 현실적인 지휘자의 인생.

조지는 <염라>를 들으면서 지휘자의 삶에 대해서 다시금 돌이켜보았다.

그 또한 비슷한 인생을 살았으니까.

한때 음악감독으로 많은 사람들을 다뤘던 조지의 가슴에 뭉클함이 벅차올랐다.

‘지휘자의 심장은 차가워야 한댔지.’

지휘자는 무대 위에서도 심장이 뜨거워져서는 안 된다.

지휘자의 흥분은 곧 오케스트라 전체의 와해를 의미했으니까.

애니메이션 음악을 컨트롤하는 조지 또한 지휘자의 역할과 같았다.

객관적으로 음악을 바라보고, 조금이라도 틀어지는 부분은 곡조를 바꾼다.

아무리 신나는 음악이어도, 우울한 음악이어도, 슬픈 음악이어도, 음악감독으로서 곡에 동요되어선 안 된다.

매번 그렇게 곡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던 조지가 곡을 감상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되는 기분.

영상 속에 나오는 인물이 조지, 자신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체험이 모두 끝났음에도 조지는 한참 동안 헤드기어를 벗지 못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VR기기를 벗은 조지 크레이머가 탄성을 터뜨렸다.

‘이게 경험한다는 뜻이었나?’

단순히 화면을 보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선율이 조지를 안내하듯 펼쳐졌고, 그 뜻에 맞춰 조지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이안이 말한 대로 정말로 곡이 인도하는 세계를 경험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맡아도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본래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는 장면을 만들고, 그 위에 음악을 입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안이 코멘트가 들어간 VR 영상은 어떤 것이 먼저라 평할 필요 없이 그저 훌륭했다.

지금도 머릿속에 곡조가 맴돌고, 자연스레 장면이 떠오를 정도였으니까.

머릿속으로는 어떤 방식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음악을 만들어가는 것인지 이해했으나, 이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다만, VR은 그 감각을 익히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곡에 일치되는 이미지를 펼쳐졌듯, 청중들에게는 이미지 없이 곡만으로 속에 담긴 이야기를 전달한다.

추상적인 개념임에도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음악을 펼칠 수 있다는 생각에 묘한 기대감도 떠올랐다.

게다가 그에게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 더 있었다.

그가 몸담았던 왓슨 스튜디오는 수많은 사업을 겸한 거대 기업이었다.

조지는 왓슨 사가 새로운 컨텐츠를 만들기 위해 VR 사업체도 하나 인수한 것을 떠올렸다.

아직 VR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홍보용으로 제작했던 몇몇 애니메이션이 박람회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기억이 있었다.

‘아예 VR컨텐츠를 리히트의 시그니쳐로 만들면 어떨까?’

이미 다른 오케스트라에서도 자신들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음반을 내고 있다.

하지만, 조지는 청각 컨텐츠만으로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요즘 사람들은 정적인 컨텐츠보다 자극적인 것을 원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VR로 음악을 탐닉하는 것은 무척 좋은 시너지가 있을 거란 기대감이 있었다.

음악감독으로서 촉이 확신에 가득 찬 채 움직였다.

다짐 가득한 주먹을 쥐던 조지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

왓슨 스튜디오.

세계 영화, 애니메이션 시장을 대부분 점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애니메이션의 시초라고 불리는 왓슨 스튜디오는 캐릭터 로열티는 물론, 영화 판권 수익만 해도 수억 달러에 달했다.

게다가 막대한 자금으로 공격적인 인수합병을 한 덕에 지금은 수십 개의 자회사를 계열사를 거느린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 상태.

그런 왓슨 스튜디오이기에, 회의실의 분위기도 남달랐다.

“박이안 피아니스트와의 접선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다음 주 중으로 공문을 보낼 예정입니다. 카타리네에서 ‘반딧불숲의 환상화’ 일부 OST에 대한 저작권을 이안씨께 둔 상태로 계약을 체결해서 우선 이에 대한 협약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례적인 계약으로 신작인 ‘반딧불숲의 환상화’을 서비스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왓슨 스튜디오는 이 또한 기회로 활용하기로 했다.

새로운 작품의 OST를 이안에게 맡기고 싶었기에.

협약 진행과 함께 제안을 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미 숱한 업적을 쌓은 이안인데다, 심지어 뉴욕에서 제시한 막대한 후원도 마다하고 한국에서 오디션을 개최할 정도였으니, 어떤 것을 제시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조지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정말입니까? 프랭크씨?”

회의실의 중심에 있는 남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끄덕였다.

프랭크 테이텀.

그는 왓슨 스튜디오의 CCO이자, 무려 15년 동안 조지와 일한 동료, 친구였다.

미국에서 애니메이션계의 미다스라고 불리는 프랭크였기에.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간부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리히트 측에서 VR산업에 손을 뻗고 싶다더군요. 조지가 적극 추천한 모양입니다.”

프랭크의 입에서 전화로 들었던 이야기들이 몇 차례 흘러나왔다.

VR 기술로 신입 단원들을 가르치려는 면모는 물론, 이를 더욱 크게 만들어보자는 조지, 조지의 의견을 수용하여 연락을 하기까지.

프랭크의 설명에 간부들은 입을 모아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좋은 생각이네요. 빅토리랩에서 협업을 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겁니다.”

빅토리랩은 미국 내에서 VR업계 최고인 곳이었다.

기술력은 물론 우수한 품질로 전 세계 VR시장을 장악하다시피 한 회사.

왓슨 스튜디오가 콘텐츠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 몇 년 전 인수한 회사이기도 했다.

프랭크는 조지가 그곳에서 이안의 세계관을 그려 더욱 큰 세계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고 덧붙였다.

“역시. 젊은 거장은 생각도 남다른가 봅니다.”

몇몇 간부들은 이안의 실행력에 사뭇 감탄했다.

아무리 애니메이션 음악계의 거장이라고 해도, 리히트에서는 신입 단원일 텐데.

단장인 이안이 그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는 것은 물론, 이미 VR이라는 것으로 단원을 가르치려 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모든 이들이 긍정표를 던지자 프랭크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젊은 거장의 세계를 한번 만들어봅시다.”

***

VR기기로 단원들을 가르치겠다는 이야기를 전한 지 한 달 남짓이 지났다.

예술의 전당에서 진행한 박람회에 참여한 VR회사 덕에 보다 빨리 단원들에게 공급할 VR영상을 만들 수 있었다.

약 2주가량의 시간을 들여 만든 체험 영상.

그사이에 내가 몇 번이나 피드백을 보냈는지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보다 확실하게 리히트의 색깔을 보여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곡에 담은 이미지가 무척 중요했으니까.

탄생한 영상을 본 신입 단원은 물론, 기존 단원들도 자신들이 생각한 바로 그 장면이라고 입을 모았지.

‘일전에 눈여겨보길 잘했네.’

아주 잠깐이었지만, 에비게일의 라이브에서 봤던 VR.

당시 이미지가 부족했을 뿐, 부스 중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고 전해 들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연주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니, 신입 단원 교육 목적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차후에 더 크게 사용해볼 의향이 있었다.

그때 마침 뜻밖의 소식을 더한 것은 다름 아닌 조지였다.

“단장님, VR로 더욱 음악을 대중화시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직 왓슨 스튜디오 음악감독답게, 조지가 꺼내놓은 방안은 무척 대중친화적인 것들이었다.

연주회라는 제한된 시공간에서 벗어나 연주를 들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들자고.

특히 교육에 사용되었던 VR 컨텐츠가 무척 좋았다고 덧붙였다.

게다가 조지의 입에서 나온 기업은 상상 이상이었다.

‘빅토리랩이면 이미 유명한 회사잖아.’

빅토리랩.

VR업계의 선두주자이자 블루칩으로 떠올랐던 기업.

독자적인 기술로 이미 자체 기기는 물론, 여러 게임을 런칭하여 여러 유튜버에게 소개된 기억이 있었다.

오죽하면 유명 게임 플랫폼의 60%가 빅토리랩의 제품을 사용한다고 했으니까.

인프라는 물론, 검증된 곳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곳이었다.

‘대중적으로도 접근하기 좋은 컨텐츠겠지.’

나 또한 몇 번이고 대중들에게 다가가려고 하지 않았던가.

유튜브를 운영한 것은 물론, 라이브 송출로 무대를 보여주고, 음원을 발매하는 것, 등.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나아가기 위해서 더 많은 이들에게 음악을 공유하고 펼치는 데 큰 노력을 기했었다.

그런 방면 중 하나로 VR을 활용할 수 있다면 내게도 좋은 일일 테니까.

다만, 과연 일반 대중들이 그것을 얼마나 빨리 습득할 수 있을까.

그 고민을 한 번에 날려준 것도 조지였다.

“단장님이 보여주려고 하셨던 것은 그 그림 너머의 무언가이지요?”

어느덧 조지의 눈은 기존 단원이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 2주 만에 리히트의 사조를 익히고, 그것을 당장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VR이 가진 힘이 이 정도라면 교육용으로 남겨두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내 긍정표에 되레 조지가 더욱 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한 번 왓슨 스튜디오에 연락을 넣어보겠습니다.”

그러고 며칠이 채 지나지 않은 무렵.

이번에는 조지가 아닌, 왓슨 스튜디오에서 공식적인 연락을 보내왔다.

카타리네 스튜디오 인수 과정에서 나와 맺어야 하는 저작권 협약은 물론, 조지의 시도로 더해진 제안서가 더해져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보내온 것은 상상 이상이었다.

저희 왓슨 스튜디오는 박이안 단장님의 무궁한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에, 리히트의 음악이 단순한 컨텐츠로 소모되지 않도록 세계관을 구축해보고 싶습니다.

메타버스.

단순히 VR로 체험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의 음악들을 모아 또 다른 세계를 만든다는 답변이었다.

내가 만든 세계에 사람들이 직접 들어가서 음악을 공유하고 느낄 수 있다.

이전에 시도했던 대중친화 향방보다 더 큰 효과를 보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첨부한 세계관 설정집을 확인했다.

자세하게 펼쳐지는 설정들에 나는 오랜만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묘한 떨림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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