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왓슨 스튜디오의 시도는 단순히 음악으로 VR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마치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 듯, 내가 만든 곡들을 어떻게 엮을지에 대한 로드맵을 제시한 것이다.
꽤 많은 조사를 토대로 만들었는지 내가 만든 곡들에 대한 전사들이 로드맵에 빼곡히 기재되어 있었다.
마치 박물관에서 유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곁들이듯.
이것으로 내 사조는 물론, 리히트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을 더욱 쉽게 넣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지금 기틀을 잘 마련해놓으면 앞으로 사람들이 내가 만든 음악에 더욱 빠르게 흡수할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그렇다면 접하기 쉬운 장소를 미리 파악해놔야겠지.’
메타버스 세계관을 보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장소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다만, 단순히 대관의 개념이 아니었다.
‘앞으로 나올 음악도 차례대로 전시할 수 있는 곳.’
내가 지금 필요한 공간은 일정 기간이 아닌, 앞으로 쭉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래야 차후에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그 또한 VR 컨텐츠로 만들었을 때 전시할 수 있을 테니까.
고정적인 전시회장을 만들고, 더욱 발전시킨다.
대중들에게는 연주회와는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적당한 건물이 있을까요?”
“글쎄다. 찾아보긴 해야겠지.”
큰아버지도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꽤 고심했다.
대부분의 전시회장은 타인에게 대관을 하고, 그 로열티를 받는 구조였으니까.
내가 원하는 것처럼 상설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서울시 전역을 둘러봤음에도 해당하는 매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것도 전시회장으로서 가치가 더해져 매물들의 금액은 수억 원대를 호가했다.
하지만, 내게 문제는 돈이 아니었다.
‘여긴 공간 활용이 너무 안 좋고, 여긴 전기 끌어오는 게 힘들어. 여긴 또 접근성이 안 좋고…”
왓슨 스튜디오에서 보낸 계획서와 설정집을 보았을 때.
전시회장은 넓은 공간은 물론 전자기기를 활용할 수 있는 인프라가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매물로 나온 공간들은 비교적 오래된 것은 물론, 여러 방면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이라도 충분한 값어치를 한다면 구매할 의향이 있었다.
지금껏 저작권료는 물론, 이외 유튜브 수익과 음반 수익까지 차곡히 쌓이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이런 현실적인 일에는 큰아버지가 가진 인프라가 빛을 발했다.
“자금은 걱정 마라. 자금 확보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큰아버지는 부동산을 알아보기 이전부터 자금 확보에 대한 확인을 마친 상태였다.
이미 내 명의로 대출을 받으면 얼마까지 되는지도 알아본 상태.
주기적으로 저작권료와 수익이 들어온 덕에 신용도가 꽤 높았다고 덧붙였다.
“아니면 앞으로 재단을 만들고 차근히 진행해도 늦지 않을 게다.”
큰아버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아직 리히트는 별도의 재단 없이 운영되고 있는 상태.
앞으로 후원이나 공연 수익을 확보하려면 재단 법인을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거기에 큰아버지가 자금을 융통해서 더욱 불릴 수도 있겠지.
이미 대한이라는 거대 오케스트라를 이끈 큰아버지의 노하우를 이길 순 없을 테니까.
“마음에 드는 곳은 없어?”
적어도 둘러본 매물 중에는 없었다.
그나마 매물 중 가장 나은 곳이 있긴 했지만, 그곳도 크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어쩌면 머릿속에 자리 잡은 곳이 하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기면 딱일 텐데.’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일명, DDP.
이미 여럿 전시들을 성공적으로 끝마쳐 유명세를 탄 곳이었다.
게다가 지하에는 쇼핑몰까지 존재하여 유동인구가 많은 것은 기본.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을 알리려는 내 입장에서는 무척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상설 전시를 할 수 없는 게 흠이지.’
공간, 유동인구, 등 모든 것을 갖췄지만, 일정 기간 대관 서비스만 진행할 뿐, 공간 자체를 통째로 살 수는 없는 곳이었다.
서울시 소유의 건물이니까.
개인에게 장소를 판매하는 것도 어불성설이겠지.
“일단 조금 더 생각해보죠.”
아직 VR컨텐츠가 제대로 출시되기 전이니까.
당장 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우선은 메타버스 전시에 알맞는 공간을 찾는 게 먼저다.
***
Allegro.
나의 첫 자작곡인 <환생>이 이전보다 커진 볼륨으로 체임버홀에 퍼졌다.
홀로 피아노로 만들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강세.
피아노로 만든 선율이 인생곡선을 그렸던 것에서 이제는 수많은 악기들이 한데 모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전에 내가 만들었던 자작곡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재탄생시키는 과정.
신입 단원들에게 곡을 가르침과 동시에 차후 VR 컨텐츠에 넣을 수 있도록 하는 과정 중 하나였다.
“단장님은 참으로 대단한 것 같습니다.”
조지는 매번 연주를 할 때마다 혀를 내둘렀다.
음악감독으로서 편곡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아는데도, 그걸 순식간에 해내는 것이 놀랍다고 표현했다.
자신 또한 여러 가상 악기를 만져 봤지만, 내가 아는 것보다 더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 와중에 단번에 곡의 의도와 분위기를 알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은 작곡가로서 기량도 엄청나다고 칭찬을 이어갔다.
심지어는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전혀 모르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이에 맞지 않는 말 같지만, 뭐랄까… 이 과정이 너무 재미있군요.”
마치 음악을 새로 배웠던 때가 떠오른다고.
하나부터 다시금 수학하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새롭고 놀라운 개념들이라 되레 다음날 무엇을 배울지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조지는 그것이 비단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신입 단원들도 그리 생각하고 있다며 당찬 웃음을 터뜨렸다.
“아, 매니저님께 들었는데, 단장님께서 요즘 VR 체험관 장소를 물색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조지는 큰아버지와 대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평소 마에스트로인 큰아버지의 음악을 무척 좋아하기도 했고, 이번 VR 관련 이야기가 겹친 탓이었다.
공문으로 보내온 것에 더해 조지는 왓슨 스튜디오의 여러 이야기들을 큰아버지에게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에 힘입어 큰아버지도 왓슨 스튜디오를 대하는 자세를 맞춰가는 듯 보였다.
“네. 몇몇 장소를 보면서 자금 확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자금 확보 말입니까?”
내 말에 조지는 뭔가 고민하는 듯 망설였다.
이내 그는 내게 도움이 될 거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왓슨에서도 여러 지역을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뉴욕, 도쿄, 베를린, 등
조지의 입에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도시들이 나열되었다.
조지는 이곳들이 향후 내 음악을 활용한 VR 컨텐츠가 완성될 경우, 어디에 배치시킬지에 대한 후보군들이라고 설명했다.
왓슨 스튜디오 특유의 빠른 실행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내가 생각했듯, 그들 또한 컨텐츠를 어디에 배치해야 큰 효율을 얻을 수 있는지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이번 일은 내 음악이 널리 알려지는 기회도 되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VR기기를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니까.
내가 VR기기로 내 음악을 퍼뜨리려고 하듯, 그들 또한 내 음악으로 VR기기를 퍼뜨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 정도 기브엔테이크면 충분히 납득 가능한 수준이었다.
‘나한테는 되레 좋은 기회지.’
앞으로 신입 단원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협주에 힘을 실으려면 다른 것에 시선을 돌리기 힘들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왓슨 스튜디오 측에 내 의견을 전달하면 그들 또한 한국 땅을 살펴보겠지.
이미 업계에서 최고로 통하는 그들이니까 안목 또한 남다를 것이다.
장소는 물론, 공간의 인테리어 및 장비 설치도 그들이 더욱 빠삭할 테니.
그사이에 나는 그들이 만들 컨텐츠에 필요한 음악에 집중하면 될 것이다.
“괜찮습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말에 조지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아마 왓슨 측에서 별도의 말 없이 진행한 것에 내가 기분 나쁘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다행입니다. 아마 왓슨에서는 되레 단장님이 먼저 허락해주시면 전폭적인 지원은 물론, 더욱 속도를 올려서 유치할 겁니다.”
***
서울시 홍보담당관 팀장인 수범이 연신 손님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손님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수범은 계속해서 감사표를 전했다.
“덕분에 저희가 남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수범은 그때만 생각하면 아찔했다.
뚜렷한 성과가 없었으면 팀 전체가 와해될 뻔했던 상황, 이안이 서울에서 오디션을 개최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수범은 이 자리에 없을 사람이었다.
“무슨 부탁이든 하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이뤄드리겠습니다.”
수범의 눈이 당장이라도 불꽃이 튈 듯 이글거렸다.
현철은 수범이 내어준 녹차를 한 모금 하고는 입을 열었다.
“전시를 열 만한 공간이 필요합니다.”
현철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왓슨 스튜디오와의 협업을 차근히 설명했다.
이안의 음악을 기점으로 VR 컨텐츠를 만들겠다는 이야기, 거기에 더해 전시관을 만들어 각국에 거점을 만들겠다는 계획까지.
더군다나 그 VR 컨텐츠 기반 메타버스 세계관까지 더하면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 넓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란 생각도 있었다.
이야기를 차근히 듣던 수범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안의 VR컨텐츠 계획은 물밑작업만 이뤄지고 있을 뿐, 아직 공개되진 않은 상태였으니까.
“왓슨 스튜디오라면 제가 아는 그곳 맞습니까?!”
대한민국에서도 왓슨 스튜디오를 모르는 사람은 몇 없었다.
일본보다 훨씬 이전부터 애니메이션의 위상을 높인 것으로 평가받는 곳이었으니까.
어린 딸의 아버지이기도 한 수범은 왓슨 사의 애니메이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세계적인 기업에서 이안에게 러브콜을 보냈다는 사실에 수범은 혀를 차며 웃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의문도 들었다.
“이안씨의 명성에, 왓슨 스튜디오까지 합세한 일이라면 모든 전시회장이 눈독 들이고 달려들 텐데 공간이 필요하다니요?”
수범은 이미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오디션 유치에도 얼마나 많은 경쟁자가 있었는지 경험해본 사람이었다.
만약 이 사실을 공표만 한다면 전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전시회를 대관하겠다는 말이 끊이지 않을 것인데.
이 사실을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에게 하는 것에 놀라우면서도 어리둥절했다.
“우리 젊은 단장님이 DDP에서 진행하고 싶어 하거든요.”
“DDP 말씀이십니까?”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해외 굵직한 작가들의 초청 전시회를 여는가 하면, 패션위크를 유치시켜 동대문을 패션의 메카로 띄우는 데 큰 일조를 한 곳이었다.
수범 또한 여러 행사나 박람회에 관련하여 DDP와 협업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미 전시회장 대관 시스템이 잘 마련된 DDP가 아닌, 자신에게 이 이야기를 꺼낸지 의문이 들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건 단기간 대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향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공간.
이안이 내다보는 것은 단순히 이벤트성으로 펼치는 VR체험관이 아니었다.
앞으로 나오는 음악 또한 빠른 시일 내에 VR로 만들어 제공하고, 새로운 컨텐츠를 만들어내는 것.
그렇기에 최대 6개월 동안 대관하는 기존의 대관 시스템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현철의 의견을 들은 수범은 꽤 오랫동안 고민 어린 표정을 지었다.
“흠… 아마 여러 기관의 협조가 있어야 할 겁니다.”
수범의 머릿속에서 빠른 속도로 DDP와 관련된 사업부가 떠올랐다.
기본적으로 동대문구를 비롯하여, DDP를 직접 관리하는 부서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뿐만이랴, 이미 대관 일정이 잡혀있는 곳을 제외하고
수범은 문득 몇 가지 자료를 살펴보았다.
분명 한 공간이 골칫거리라 들었는데…
“2층 갤러리에 유치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DDP에 마련된 갤러리.
루키 작가들의 작품을 걸어 무명 작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하지만, 게시 비용이 만만치 않은 탓에 좀처럼 새로운 작품이 들어오지 않는 참이었다.
그러나 갤러리도 작은 문제가 있었다.
“갤러리로 상정되어 건설된 탓에 아마 이안씨가 원하는 대로 사용하시기엔 불편할 겁니다.”
작품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둔 여러 유리 판넬들.
테마를 나누겠답시고 여러 격벽을 쳐둔 탓에 폐쇄적인 모양을 띠는 곳이었다.
게다가 VR기기들이 들어오려면 전기도 회선도 많이 필요할 텐데, 그림을 전시하기 위한 장소라 전기 배선도 몇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한번 건의드려보겠습니다.”
DDP측에서도 공간이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되면 좋아할 테니까.
게다가 무려 박이안 피아니스트,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전시다.
만약 수범이 관리자였다면 싹 리모델링을 해서라도 유치했을 것이다.
수범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할 것이라 확신했다.
이미 이안의 명성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엄청났으니까.
“뭐, 정 안 된다고 하면 제가 시장님께 가서 무릎이라도 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