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VR에 메타버스 컨텐츠까지 진행한다고 하니 자기가 발 벗고 나서 도와준다더라.”
서울시 홍보담당관, 수범을 만나고 온 큰아버지가 말했다.
일전에 서울에서 오디션을 개최한 것은 물론, 자신들이 돕게 해주어 고맙다는 마음을 표현했다고.
덕분에 팀이 살아남았다며 어떠한 것이라도 수용하겠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고 설명했다.
“DDP도 자신들이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했는데. 한 번 지켜봐야지.”
큰아버지의 말에 나는 수범이 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서울에서 오디션을 개최할 때, 예술의 전당은 물론, 서울 전체에 배너를 깔게 만든 것도 그 아니었던가.
직접 버스 회사까지 설득했다고 했으니.
그 실행력을 믿어볼 만했다.
이외에도 큰아버지는 현재 들어온 제안들을 몇 가지 읊어주었다.
당장은 VR 컨텐츠를 위한 재녹음 일정 때문에 굵직한 제안을 받아들이긴 힘든 탓에 큰아버지도 가능한 것으로 추려온 상태였다.
“이번에 국내 게임사에서도 요청이 들어왔더라. 네 음원을 사용해도 되겠냐고.”
여전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유명 게임사의 제안이었다.
“네, 기존의 음원을 사용하는 것이라면 저야 괜찮죠.”
VR 컨텐츠 때문에 다시금 곡을 완성하는데 바쁜 시점.
다시금 녹음을 해야 한다면 당장 시간을 내기 어려웠지만, 기존의 곡을 활용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문득 곡에 대한 생각을 떠올릴 무렵.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새 곡을 만들 때가 됐지.’
앞서 리히트를 만들었을 때도 <항해>를 비롯해 <조선>을 만들지 않았던가.
이미 다른 곡들의 편곡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위대한 음악가가 되는 길은 아니었다.
VR, 게임, 영화에 이르기까지.
음악이 좋은 것과 음악가가 좋은 것은 별개의 문제였으니까.
‘음악가는 음악을 다루는 사람이니까.’
나는 피아니스트에 음악가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니까.
위대한 음악가라는 목표를 위해서 어떤 것을 가장 먼저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을 하니 새로운 곡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게다가 이제는 리히트라는 더 큰 우군이 있으니까.
유명한 마에스트로는 오케스트라를 거대한 악기라고 표현했다.
조심스럽게 다루고, 조율이 필요하며, 화음에 따라 전혀 색다른 음악이 터져 나올 수 있는 악기.
나 또한 리히트를 통해 세상을 울리고, 사조를 남기고 싶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어떤 곡을 만들지 떠올렸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내게 스쳐 간 수많은 일들이었다.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네.’
전생을 떠올리고, 피아노를 잡고, 여러 콩쿨에 도전했던 것까지.
정신없이 달려왔던 탓일까.
21살 때 전생을 떠올렸던 나는 어느덧 23살이 되어 있었다.
이미 언론에서는 수많은 업적을 만들어냈다고 했지만, 가장 절정은 지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케스트라에, 여러 방면으로 음악이 퍼져나가고 있으니까.’
처음엔 유튜브, 하르모니아의 음반 발매만으로도 음악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내가 떠올린 음악 사조를 펼칠 수 있는 단원들이 있는가 하면, 앞으로 사람들에게 더욱 음악을 가깝게 느끼도록 만들 컨텐츠도 제작되고 있다.
그렇게 연이어 행보를 이어가는 모습.
그 모습을 곡에 녹여낼 수 있을까?
한창 고민에 고민을 더하던 찰나.
큰아버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짧은 통화를 마친 큰아버지는 내게 좋은 소식을 안겨주었다.
“서울시에서 DDP 공간을 제공해주겠다고 한다. 리모델링까지 고려하면 아마 봄쯤 사용할 수 있을 거라네.’
추가로 보낸 왓슨 스튜디오의 로드맵이 큰 역할을 했다고 덧붙였다.
서울시장에게까지 로드맵을 들고 갔더니 시장은 물론, DDP 관리자도 흔쾌히 허락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큰아버지의 말에서 떠올린 아이디어가 더 크게 와닿았다.
‘다음 곡 주제는 그게 좋겠다.’
***
에비게일이 리히트에 들어온 지도 두 달 남짓이 되었다.
그 사이, 에비게일과 서령은 참가자와 심사위원 때의 인연으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서령은 롤모델과 함께 있는 것에 놀라워했고, 에비게일은 어린 서령의 천재성에 매번 감탄사를 내뱉었다.
연습 이외에도 자주 만나던 둘은 오늘 이안이 만든 리히트의 새로운 곡 초안 악보를 앞두고 있었다.
“<개화>라, 참 독특한 이름이네.”
에비게일은 단 두 자로 여러 의미를 가진 이안의 곡을 신기해했다.
특히 ‘개화’라는 단어가 꽃이 핀다는 의미를 가졌다는 서령의 소개에 무척 들뜬 기색을 내비쳤다.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의 봄을 나타내는 것일까, 아니면 항상 곡에서 반전을 숨겨뒀던 것처럼 이번에는 새로운 반전을 넣어두지 않았을까.
문득 악보를 보던 에비게일은 궁금한 마음에 서령에게 물었다.
“단장님은 항상 오케스트라 곡을 혼자 만드셔?”
“네, 초안이나 완성된 곡도 대부분 단장님이 혼자 만드신 곡이에요.”
<항해> 때 단원들이 만든 곡을 녹여낸 적도 있지만, 그 또한 이안의 편곡을 거쳤지 않은가.
사실상 리히트에서 만든 곡들은 모두 이안의 손에서 탄생한 곡이나 다름없었다.
홀로 곡을 만든다는 사실에 에비게일은 사뭇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래도 단원들의 도움을 조금이라도 받을 줄 알았어.”
에비게일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단원들 중에서도 세계적인 연주가들이 있지 않던가.
빈 필하모닉의 수석 피아니스트 출신, 요한나를 비롯하여 오케스트라에서 굵직한 행보를 이어갔던 연주가도 대거 리히트에 들어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도움 없이, 홀로 곡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에 입을 떡 벌렸다.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 끝은 어서 곡을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에비게일의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서령도 곧바로 전달받은 음원을 재생시켰다.
서령이 눈을 감으며 감상을 준비하자 에비게일도 따라 눈을 감았다.
곡이 서서히 펼쳐지는 순간.
에비게일의 눈이 놀라움으로 떠질듯 말듯 움찔거렸다.
‘이게 정말 피아노 단독 곡이라고?’
꽃이 핀다는 제목에 걸맞게, 시작은 아주 사소한 멜로디였다.
두세개 남짓 되는 건반들로 만드는 간단한 음색.
간결한 선율에 싱그러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빗방울처럼 들리는 스타카토가 이어지자 곡은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마치 씨앗에 불과하던 것이 자라서 꽃을 피우기까지 과정을 그려내듯.
어느덧 늘어난 음표들이 점차 퍼져나간다.
분명 단신으로 피아노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음은 10개가 최대일 텐데.
이안이 만든 <개화>는 그 이상의 소리가 들려온다.
교묘하게 연속되는 화음들은 층을 쌓듯 점차 곡의 풍성함을 키워간다.
게다가 페달로 음을 끌어 만들어낸 은은한 선율은 마치 꽃에서 꽃가루가 터져 나오는 착각을 일으킨다.
곡이 끝났을 때, 에비게일은 그제야 긴장된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그런 모습에 서령은 자신도 처음에 그랬다며 얕게 웃었다.
그만큼 이안이 만들어낸 곡은 대단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내가 들었던 천재라는 말이 무색해질 지경이다.’
에비게일도 신동, 천재, 비르투오소, 등 천재와 관련된 호칭을 매번 들어왔다.
기교가 가득한 바이올린 실력, 곡을 창작하는 작곡가의 면모, 무대를 구성하고, 계획을 짜는 것까지.
에비게일은 단순한 연주가를 넘어 엔터테이너였다.
온갖 행보로 명성이 자자했던 에비게일이었건만, 이안은 그보다 더한 사람이었다.
‘이게 선율을 느끼는 것이다!’
이미 VR로 얼핏 익힌 감각에, 이안이 새롭게 만든 곡을 듣자 그 감각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반복되는 화음과 형식 속에서도 펼쳐지는 고유의 소리.
적절한 강세로 마치 선을 긋는 듯 흐름이 강렬하게 꽂혔다.
‘개화’처럼 단순히 꽃이 핀다는 것이 아닌, 그 과정에서 한 생명이 자라나는 과정을 모두 그려내듯.
이안의 곡은 들을수록 볼륨을 키워가는 특징이 있었다.
“어서 전체 곡을 보고 싶다.”
한 편으로는 총보를 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그 총보에 일부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떠올랐다.
어느덧 에비게일은 바이올린을 든 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선율을 곱씹고 있었다.
그런 모습에 서령은 무척 흐뭇한 표정을 지은 채 바라봤다.
“에비게일도 곡에 자신의 선율을 입혀보고 싶죠?”
“맞아! 어떤 부분은 일부러 틈을 두신 것 같은데, 단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처럼 말이야.”
에비게일의 말대로 초안의 일부는 의도한 듯 음을 연하게 만든 부분이 있었다.
마치 그 위에 선율을 얹어보라고 인도하듯.
미묘한 끌림에 스스로 적응하고,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에비게일의 이야기를 한참 듣던 서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에비게일은 단장님이 찾던 인재가 확실한 것 같아요.”
“왜?”
“선율을 느낄 수 있잖아요. 오디션 때부터 에비게일이 선율을 느끼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펼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거든요.”
“그동안은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걸 가르쳐주는 사람도 있고, 갈고 닦을 방법도 생겼잖아요. 저도 단장님이랑, 에비게일이랑 함께 음악을 듣는 것 이상으로 만들고 싶어요.”
서령의 눈에 총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결코 흥분하거나 격앙된 반응은 아니었다.
이미 마음속에 완전히 자리 잡고 나아갈 방향을 찾은 냉정한 말투.
그 모습에 에비게일은 자신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리히트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거장 같아.’
지금 순간도 그렇지 않았던가.
자신보다 8살이나 어린 서령이 결코 어려 보이지 않았다.
되레 위로 올려다봐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에비게일은 경외감과 함께 더욱 큰 기대를 걸었다.
‘이것이 앞으로 음악이 나아가야 할 길이겠지?’
에비게일은 리히트의 사조를 차근히 받아들이며 계속해서 생각했다.
혹자는 이안을 보고 앞으로 클래식, 음악이 갈 방향성을 알려주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단순히 듣는 것을 넘어 곡을 느끼고, 스스로 곡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
에비게일 또한 음악의 미래는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사람들에게 선보이기엔 쉽지 않았다.
그동안 에비게일이 영상에 더욱 힘을 주고, 의상과 화장으로 강조점을 준 것도 보이지 않는 예술인 음악을 보이게끔 만들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안은 그런 시각적 효과 없이 음악만으로 그 추상적인 개념을 현실로 만들었다.
‘역시, 오길 잘했어.’
에비게일 또한 한국행을 선택했을 때 사람들의 반대가 없지 않았다.
리히트의 위상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동안 에비게일이 해온 것을 내려놓기엔 도전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스태프들에게 안식년 셈 치고 쉬라며 재치 있게 말했지만, 에비게일도 긴장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걱정이 조금도 나지 않았다.
바이올린을 꺼내든 에비게일에 맞춰 서령도 첼로를 꺼내 들었다.
활대를 점검하던 서령은 당연하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아마 곧 무대를 준비해야 할 거예요.”
하지만, 에비게일은 그 뜻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아직 총보도 나오지 않았고, 초안에 나온 것에 불과한데 벌써부터 무대를 준비한다니.
완성된 곡이 나와도 오랜 준비를 거쳐 영상을 만들었던 에비게일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서령을 쳐다봤다.
“매번 그러셨거든요. 아마 단장님이 음악을 만드실 때부터 어디서 공개하실지 생각해두셨을 거예요.”
에비게일도 알고 있었다.
<염라>는 대한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 은퇴식, <동행>은 교황의 행렬에, 심지어 <역사>는 여왕의 즉위 75주년 기념식에서 울려 퍼지지 않았던가.
이번 곡, <개화>도 그에 걸맞은 이벤트가 있을 것이란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