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53화 (153/250)

153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2층.

본래 갤러리였던 공간은 정리가 한창이었다.

큰아버지가 내 일정을 고려해 혼자 다녀온다고 했지만, 나는 함께 오는 것을 택했다.

계속 음악 작업 때문에 좀처럼 나오지 않은 것도 있고, 더욱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면 이렇게 나올 시간도 없을 테니까.

“오늘 나오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DDP를 사용하게끔 허락을 받아온 수범부터, DDP의 관계자, 게다가 DDP 사용 허가 연락에 왓슨 스튜디오 관계자까지 모두 오기로 한 상태였다.

DDP는 물론, 왓슨 스튜디오에서 사람이 온다고 했으니, 첫인사에 당사자인 내가 나가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기존에 갤러리로 사용된 공간에는 여러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나둘씩 그림들이 정리됐음에도, 이전에 전달받았든 당장 사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공간 전시를 위해 임시로 만든 격벽도 있었고, 전시품을 보호하기 위한 유리 칸막이도 꽤 많았다.

차근히 바라보는 동안, 서울시 홍보 담당관인 수범이 먼저 나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는 수범에게 나는 먼저 감사 표시를 했다.

“다소 어려운 부탁이었을 텐데,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제가 입은 은혜를 생각하면 이것만으로도 부족한걸요. 게다가 이안씨 이름을 듣고 되레 다들 반기는 눈치였는걸요.”

수범은 DDP에서 거절했으면 서울시장에게라도 갈 생각이었다고.

하지만, DDP에서는 내가 장소를 사용하고 싶다는 말에 되레 놀라워하면서도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게다가 이미 갤러리 내부 철거 작업까지 진행할 예정이라고.

수범의 손에는 차후 왓슨 스튜디오 담당자가 왔을 때 함께 볼 내부 도면까지 있었다.

“다행히 벽들 대부분이 가벽이라 지난번에 얘기하신 넓은 공간 마련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수범은 정리가 된 모습이라며 도면을 펼쳐 들었다.

현재 보기에는 격벽들로 무척 좁아 보였지만, 그 모든 것들이 철거된다면 지난번 부동산 물색 때 본 공간들보다 훨씬 넓었다.

수범 또한 예상외로 넓은 공간이 나와서 무척 다행이라며 덧붙였다.

한창 수범과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갤러리 한편이 누군가의 방문으로 시끌시끌했다.

한 사내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은 흉상을 바라보며 스태프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입구에 이런 흉한 흉상이 있어서 사람들이 안 온 거 아닌가 몰라요~”

“그럴 리가요. 오히려 관객분들이 재익씨 흉상을 제일 재미있게 보고 갔어요. 이걸 보려고 오는 팬들도 있었던걸요?”

재익이라고 불린 남자의 농담에 스태프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짧은 머리에 실내에도 선글라스를 낀 남자.

푸근한 미소가 일품인 남자는 나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강재익.

강렬하고 중독성 있는 후크송들을 연이어 발간하며 대한민국에서는 ‘축제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익살스러운 가사와 춤, 큰 고민할 것 없이 즐길 수 있는 부담 없는 음악이라 그의 음악을 모르는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제목은 몰라도 들어보면 ‘아 이 노래?’라는 반응이 단박에 나올 노래들이었다.

최근 공개한 곡, <서울 패션>이라는 곡이 미국에서 큰 화제를 몰아서 뮤직비디오 조회수 30억을 돌파했다고 들었다.

수범은 재익이 갤러리 폐쇄 결정에 흉상을 가져오려고 온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다.

스태프와 이야기를 하던 재익은 문득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환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젊은 거장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박이안 피아니스트님, 굉장히 팬입니다. 아니, 이제 단장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재익은 호탕한 웃음과 함께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내가 만든 음악들을 너무 잘 듣고 있다며, 비엔나 하르모니아에서 나온 음반도 직접 구매했다며 팬심을 드러냈다.

특히, 독일에서 펼쳤던 독주회는 스케줄 때문에 직접 가지 못해 무척 아쉽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재익의 관심에 더욱 놀란 것은 수범이었다.

“뉴욕에서 공연을 앞두고 있다고 들었는데, 언제 귀국하셨습니까?”

수범의 입에서 재익이 해외에서 얼마나 인기를 끌고 있는지 고스란히 나왔다.

<서울 패션>이 미국을 강타한 후로 반년 동안 미국에서 살 정도.

미국에서 유명하다는 토크쇼나 TV 프로그램을 모두 섭렵한 것은 물론, <서울 패션>의 시그니쳐 춤은 SNS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재탄생되고 있었다.

그뿐만이랴.

미국 대통령도 그의 인기를 실감하고 뉴욕 새해 공연에 재익을 올렸다.

팝의 전설, R&B의 대가,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재익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대가에 가까운 사람들이 재익의 춤을 따라 추는 것에 놀람과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고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재익씨 덕분에 서울에 대한 위상도 함께 올라간 것 아십니까? 종로, 명동, 동대문에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곡에 ‘패션’이 들어가서 그럴까.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이 패션의 메카로 향하고 있다고.

연이어 수범은 감탄사를 더했다.

하지만, 수범의 칭찬에도 재익은 그저 손사래를 쳤다.

“다들 반짝 관심일 뿐입니다. 이안씨야말로 진짜 월드스타죠. 다음에 기회 된다면 술 한 잔이라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엄청 영광일 것 같은데.”

“그럼요. 스케줄 잘 마무리하시고 연락 주세요.”

내 말에 큰아버지는 곧바로 명함 한 장을 꺼내어 재익에게 건넸다.

재익은 꼭 연락하겠다며 명함을 받아 갔다.

재익이 자리를 떠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외국인 셋이 갤러리로 들어왔다.

그중 한 인물이 심상치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왓슨 스튜디오의 CCO, 프랭크라고 합니다.”

CCO라는 말에 수범을 비롯한 스태프들은 물론, 큰아버지도 사뭇 놀란 표정을 지었다.

최고 컨텐츠 기획자.

왓슨 스튜디오의 대작들을 만든 인물이 바로 프랭크였다.

회사에서 간부급 위치에 있을 거물이 직접 한국행을 택할지는 나 또한 모르고 있었다.

“직접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게다가 음악에 집중하셔야 할 박이안씨가 직접 움직이시지 않으셨습니까.”

프랭크는 가장 먼저 감사 표시를 했다.

되레 이렇게 장소를 미리 확보해주어서 고맙다며, 자신이 한 일인데 신경 쓰게 해서 죄송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게다가 무척 좋은 곳을 선정했다며 감탄을 늘어놓았다.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높은 유동 인구는 물론, 전시회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이안씨의 컨텐츠를 그냥 지나갈 리 없지 않겠습니까.”

프랭크의 입에서 내가 생각했던 부분들이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지하철 역을 끼고 있어 국내는 물론, 해외 방문객도 접근이 쉬울 뿐만 아니라, 플라자의 쇼핑 고객들을 자연스럽게 유치하면 더욱 많은 인기를 끌 수 있을 것이라고.

프랭크도 지금껏 사업을 하면서 이러한 자리를 찾진 못했다며 공을 모두 내게 돌렸다.

그는 VR에 대한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VR 홍보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안씨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아마 소식이 전해지면 이안씨의 음악을 깊이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많은 고객들이 관심을 가질 겁니다.”

프랭크는 회사의 작품들 스토리가 모두 연결되듯, 나의 곡도 그렇게 모두 스토리를 연결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이미 곡의 완성도는 물론, 그 안에 깃든 스토리가 무척이나 매력적인지라 개발팀에서도 세계관 구축에 속도를 올리고 있다고 전했다.

기본이 잘되어 있어 세계관 또한 무척 탄탄할 것이라고.

나를 기점으로 메타버스의 선두주자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내비쳤다.

“이안씨께서 음악에 집중하실 수 있도록 이곳은 물론, 여타 다른 지역의 홍보도 저희가 주관하겠습니다. 언제든지 요청하시면 현황을 알려드릴 테니, 편안하게 말씀해주십쇼.”

이미 뉴욕과 홍콩, 도쿄까지 일차적인 확보를 마쳤다고.

이제 컨텐츠만 제대로 개발되면 빠른 속도로 홍보를 진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러 계획들이 있다는 말에 나는 곧바로 물었다.

“그럼 계획을 미리 들을 수 있을까요?”

내 제안에 프랭크는 슬며시 미소를 띠었다.

마치 내가 그럴 것을 미리 알기라도 했듯,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럼 이곳부터 둘러보면서 말씀 나눠볼까요?”

***

재익은 이안에게서 건네받은 명함을 한참 만지작거렸다.

하얀 바탕에 이름과 번호만 간단하게 적힌 명함.

간결하지만, 항상 올곧게 자신만의 길을 가는 이안의 이미지에 알맞은 명함이었다.

“참 대단한 사람이야.”

재익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용케 들은 매니저가 옅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형님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말하는 거 엄청 오랜만이네요. 코스모 친구들 대단하다고 얘기하고 처음인 것 같아요.”

연예계에서 살아온 지도 어언 20년째다.

무척 푸근하고 인간미 넘치는 이미지인 그였지만, 그 또한 날카로운 안목의 소유자였다.

이제는 슬쩍 보기만 해도 ‘아 이 친구 성공하겠구나.’하고 감이 왔고, 그 감이 틀린 적은 여태껏 거의 없었다.

그가 대단하다고 평가했던 코스모는 지금 2년 만에 국내 아이돌들을 제치고, 이제는 해외투어 공연을 다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재익은 이안을 더욱 높게 생각했다.

“코스모보다 더하지. 이안씨는 혼자 저렇게 해나간 것도 모자라, 클래식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잖냐. 국내 반응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지.”

몇 년 전만 해도 국내에서 클래식은 어렵고 따분한, 부자만 하는 어려운 예체능에 불과했다.

연주회에 가려면 비싼 푯값을 내야 하고, 배우려면 수백이 깨진다는 클래식.

하지만, 이안이 행보를 이어가면서 그 트렌드 또한 바뀌어 갔다.

여러 오케스트라에서도 이안을 따라 유튜브 라이브를 진행하는가 하면, 소규모 클래식 음악 그룹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게다가 공부에 혈안이던 목동과 대치동 부모들이 이제는 자녀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는 트렌드도 생겼다.

박이안, 단 한 사람이 만든 결과물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전체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

재익은 이것보다 대단한 것이 또 어디 있겠냐며 중얼거렸다.

그때 매니저의 휴대폰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뉴욕에서 공연을 담당해주기로 한 에이전시의 연락이었다.

“잠시만요 형님.”

매니저가 전화를 연결하자 에이전시 담당자의 말이 여럿 들려왔다.

뉴욕으로의 복귀 일정과 향후 일정들에 대한 이야기가 스피커폰으로 벤에 울렸다.

그런데, 마지막 말을 하는 에이전시 담당자가 조금 망설이는 듯 떨렸다.

-아무래도 세트 설치가 힘들 것 같습니다.-

“예? 그때는 가능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에이전시 담당자의 말에 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에이전시 담당자가 차근히 설명했다.

-모닝쇼에서 다소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에이전시 담당자가 애써 에둘러 표현했지만, 재익은 곧바로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모닝쇼.

이번 록펠러 광장에서의 공연을 방영하기로 한 프로그램이었다.

미국 최초의 아침 프로그램이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면서도, 내부적인 규율이 무척 엄격한 곳이기도 했다.

미국에서도 꽤 유명세를 가지고 있는 가수들도 모닝쇼 출연에 무대를 제공받지 못하곤 했다.

그래미상 수상자나, 명실상부 톱스타처럼, 말 그대로 ‘초특급’ 음악가가 아니면 모닝쇼에서는 무대를 만들어주지 않았다.

유튜브를 통해 유명해지기도 했고, 한국에서는 월드스타라고 소개되곤 하지만, 뉴욕 공연의 문턱은 무척 높았다.

물론 재익에게 무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대학 축제에서 운동장을 무대 삼아 공연을 펼쳤던 그였으니까.

음악과 공간만 주어진다면 어디서든 공연을 펼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뉴욕 무대는 단순히 재익의 유명세나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 가수의 위용을 알리는 곳이자, 한국이란 나라를 뉴욕을 넘어 전 세계로 알릴 수 있는 기회.

앞으로 같은 무대에 오를지도 모르는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그 시작을 땅바닥에서 끊고 싶진 않았다.

“어찌 방법이 없겠습니까?”

-음… 선례가 있긴 합니다. 이전에 팬들의 독촉으로 모닝쇼가 무대를 만든 적이 있거든요. 아니면 게스트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건…-

순간, 재익의 뇌리에 누군가 스쳐 갔다.

그는 곧바로 유창한 영어로 몸을 앞당겨 담당자에게 직접 말했다.

“초특급 게스트면 무대를 만들어줄 건지 물어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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