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왓슨 스튜디오의 CCO, 프랭크가 한국을 다녀간 지 어언 2주가 지났다.
그 사이, VR컨텐츠에 들어갈 곡들의 녹음이 끝나 빅토리랩과도 한 차례 미팅을 가졌다.
왓슨 사의 VR 자회사, 빅토리랩에서는 예상보다 빨리 곡 작업이 끝났다며 놀라워했다.
또한, 왓슨 스튜디오에서는 이전 만남에서 확인했던 뉴욕과 홍콩 지역에 배치할 체험 부스 위치가 확정되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VR 컨텐츠와 세계관 초안이 완성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왓슨 스튜디오에서 제시한 로드맵 또한 프랭크가 방문했을 때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눴다.
이미 만들어진 로드맵도 꽤 매력적이었지만, 나는 몇 가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을 일러주었다.
게다가 몇 가지 비하인드 스토리를 일러주자 프랭크는 이전보다 더욱 풍성한 세계관이 될 거라면서 기대감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이제 <개화>에 집중할 수 있겠다.’
최근 여타 일이 겹쳐 <개화>에 손을 제대로 대지 못했다.
이전 같았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완성을 했겠지만, 신입 단원들이 들어오기도 했고 우선 리히트 스타일의 곡이 어떻게 될 것인지 보여주는 기회로 삼으려고 했다.
체임버 홀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온 서령이 에비게일과 함께 연주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는 내가 만든 곡과 묘하게 달랐다.
‘이건 <개화>의 초안과는 조금 다른데?’
분명 내가 제시한 초안은 하나였다.
그 또한 초안에 불과한지라 부족한 부분을 보강하여 중간 단계의 곡.
오늘 곡을 가져온 이유는 미리 곡에 대한 배경을 제시하고, 차후 <개화> 본 연주 때 도움이 될 만한 곡들을 일러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서령과 에비게일이 연주하는 곡은 <개화>와 비슷하면서도 사뭇 달랐다.
잠자코 연주를 듣고 있자, 그 강세와 선율이 뚜렷하게 머릿속에 맴돌았다.
단번에 가상의 악보에 음표가 맺힐 정도로 완성도 높은 연주.
둘의 연주가 끝났을 무렵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초안에 곡을 입혔구나.’
초안은 1악장부터 4악장까지, 앞으로 <개화>가 진행될 방향성에 대해 알려주려고 줬던 것이었다.
하지만, 서령과 에비게일은 아직 완성도 되지 않은 곡임에도 스스로 곡에 걸맞은 연주를 준비해왔다.
그런데, 두 사람이 끝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갈 즈음 체임버 홀은 모든 단원들로 북적였다.
대부분 단원들은 내가 제시한 초안을 각자의 악기로 연주하기도 했지만, 되레 다른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또한 내가 제시한 초안, <개화>에 맞춘 듯 그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연주를 선보였다.
심지어 일부는 무리를 지어 미리 합을 맞춰본 듯, 합주를 하는 단원들도 있었다.
그들의 연주 또한, 앞서 서령과 에비게일의 연주처럼 머릿속에 곧바로 악보가 떠오를 정도로 뚜렷하고 명확했다.
단원들이 제각기 악기로 연주를 만들어왔다는 사실에.
나는 모든 사람들의 연주를 듣고 나서야 악보대를 두드려 주목시켰다.
“다들 초안에 저마다 곡을 얹은 겁니까?”
내 질문에 몇몇 어리둥절한 채로, 몇몇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되레 내가 한 질문에 손을 들어 재차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걸 위해서 미리 초안을 주신 것 아니었나요?”
플루티스트 아람이었다.
아람의 말에 몇몇 단원들이 자신도 그런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존 단원들은 자신들의 오디션 곡, <항해> 때처럼 자연스럽게 만들어보았다며, 오히려 내가 빈자리를 마련해주어 곡을 만들게끔 인도한 것이라고 느꼈다고 답했다.
신입 단원인 에비게일 또한 서령과 함께 곡을 만들어온 사람이었다.
에비게일은 서령이 자연스럽게 첼로를 들었고, 곡을 덧입히는 모습을 보았기에 후배된 도리로 따라 했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것이 리히트의 전통인 줄 알았다며, 내가 작곡에 큰 뜻을 가지고 있어서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듣자마자 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에비게일은 초안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바이올린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무언가 소리가 더해지면 더욱 아름다워질 것 같다고, 왠지 나라면 소리를 줄인 이 부분에 다른 악기를 넣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물론, 내가 다른 악기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곳곳에 피아노 약세를 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초안을 보고 곡을 만들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마 초안이 너무 완벽해서 벌어진 일인가 보네요.”
상황을 지켜보던 피아니스트 요한나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 또한 피아노로 된 초안이지만, 이전에 <항해>를 채웠던 생각에 자연스레 연주를 했다고.
분명 초안은 간결했지만, 그 속의 울림과 선율은 초안으로 보기엔 무척 세세하고 완벽했다고 덧붙였다.
요한나의 짧은 말에 대부분 단원들이 동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반응에 나 또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무엇보다 단원들이 만든 곡은 이전에 <항해>를 만들었을 때 선보였던 것보다 훨씬 발전되어 있었으니까.
게다가 이미 <항해>를 통해 어떤 것이 합주에 더욱 어울리는지 알고 있는 듯 <개화>의 초안과 더욱 어울리는 선율을 만들어둔 상태였다.
‘이걸 곡에 녹여내도 좋겠네.’
예상에 없던 단원들의 행동이지만, 뭐 어떤가.
그 결과물이 하나하나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데.
기존 단원은 물론,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입 단원들까지.
어느덧 모두가 리히트의 사조에 매료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연습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곧바로 2층 음악실로 향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 배가 고플 만도 하건만, 그런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단원들이 만들어온 악보로 가득했으니까.
‘원래 <개화>의 의미는 성취가 꽃 핀다는 거였는데.’
씨앗에 물을 주고, 꽃을 피우듯.
그동안 내가 음악에 쏟았던 것들이 결과로 돌아오는 것이 꽃이 피는 것에 빗대어 표현하고 싶었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말처럼.
연한 멜로디의 시작으로 점차 화음을 더해가며 만개하는 꽃을 형상화한 곡이었다.
하지만, 단원들의 곡을 떠올리자 그 생각에 다른 생각 하나가 더 얹어졌다.
‘마치 정원에 핀 꽃들처럼.’
하나의 색깔이 아닌, 여러 색깔이 모여서.
꽃들은 형형색색의 조합으로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단원들이 만든 곡들 또한 그랬다.
누군가는 장미처럼 화려하면서도 날이 선 곡을 만들었고, 누군가는 개나리처럼 간결하면서도 밝은 곡을 만들었다.
각기 다른 악기의 매력으로 만들어낸 곡도 있었고, 같은 악기여도 개인의 기량, 취향에 따라 전혀 색다른 곡이 탄생한다.
마치 꽃꽂이를 하듯.
초안에 맞춰 가장 알맞은 곡들이 새롭게 떠오른 가상의 악보에 하나둘씩 맺혔다.
저마다 각기 다른 매력, 색을 가진 곡들이 <개화>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갔다.
‘<영감>을 만들었을 때가 생각나네.’
카타리네 스튜디오 곡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만들었던 <영감>.
홀로 표정을 묘사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반대로 <개화>에 영감을 받은 단원들의 연주를 묶어내고 있었다.
나는 단원들의 연주를 조합하면서도 최대한 원래 형태를 유지했다.
완전히 독단적으로 튀어 나가는 음이 아닌 이상 건드리지 않았다.
되레 이게 자연스러우니까.
한 시인이 봄에 들꽃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사람이 재단하지 않아서라고 했던가.
그 뜻에 맞춰 나 또한 단원들의 곡을 최대한 유지하되 연결시킨다.
머릿속에서 완성된 <개화>가 피어나기 직전의 상태로 악보에 스며들었다.
이제 정말 끝.
마지막 음표까지 새겨넣은 나는 그제야 펜을 내려놓았다.
총보가 나왔을 때는 이미 창문 밖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
-이안이라면 지금쯤 집에 갔을 텐데, 아마 못 볼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이안을 찾는 재익의 전화에 현철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집으로 데려다주는 차에서 내내 악보만 보고 있었으니까.
곧장 음악실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을 것이 뻔해 보여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재익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안씨 집으로 가자.”
“형님, 정말로요?”
어떻게든 이안을 섭외하려는 모습에 매니저는 놀라운 기색을 보였다.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재익은 한 번도 다른 사람과 콜라보 무대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의 에너지를 대중에게 전하기 위한 선택.
이번에 <서울 패션>이 유명해지면서 할리우드 배우에게서 콜라보 제안이 왔지만, 그마저도 재익은 거절했다.
그런 독불장군 같던 재익을 이안이 움직인 것이다.
세계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클래식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박이안.
삼고초려(三顧草廬)는 무슨. 백(百)고초려, 아니 만(萬)고초려를 하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섭외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어쩌죠. 이안이는 지금 연습 들어가서 아마 꽤 오래 걸릴 거예요.”
현철의 도움으로 이안의 집에 왔지만, 이안의 어머니, 은희는 이안이 연습을 시작했다고 알렸다.
끝날 때까지 나오는 법이 없다고.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말에도 재익은 괜찮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당연히 기다려야죠.”
재익도 음악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음악을 만들 때 방해받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작곡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이안이라면 더욱 그럴 테지.
게다가 그런 예술가의 집중을 깨고 자신의 욕심을 내세우는 것만큼 실례인 것이 없었다.
재익은 챙겨온 약소한 선물과 함께 은희에게 밖에서 기다려도 되겠냐는 양해를 구했다.
“안에서 기다리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이안씨께 제대로 말씀도 안드리고 불쑥 찾아왔는데 가족분들께마저 폐를 끼칠 순 없죠.”
재익은 은희의 배려에도 겸허히 차량으로 돌아왔다.
저녁시간이 막 지난 시간이었으니까.
재익은 조금 지나면 이안이 연습을 끝내고 늦은 저녁을 먹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몇 시간째냐?”
“12시가 넘었으니 5시간째입니다.”
분명 저녁이 지나면 나올 줄 알았는데, 이안의 연습은 끝날 줄 몰랐다.
새벽 시간을 넘어 집의 불이 모두 꺼졌음에도 2층 음악실 창가만은 환했다.
오죽했으면 은희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재익에게 내일 오라고 얘기했겠는가.
“실례가 안 된다면 주차장에 차를 세워도 될까요?”
재익은 갈 생각이 없었다.
날밤을 새워서라도 이안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가정집 앞에서 이렇게 기다리는 것도 사실 도리가 아니겠지만,
재익의 머릿속에서 새롭게 피어난 생각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동안 작품들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구나.’
재익은 이안이 고유의 천재성으로 쉽게 곡을 만들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재익이 목도한 이안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밤을 새워 가며, 몇 시간 째 피아노를 멈추지 않고 칠 정도로 이안은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와 연습을 통해 곡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창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이제는 존경심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4시를 넘어 5시, 어두컴컴했던 하늘은 점차 푸르스름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무려 10시간이 넘어가는 시점, 이미 매니저는 잠에 빠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재익만큼은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되레 그는 조심스레 차량을 나와 발걸음을 죽인 채 창가 아래로 다가갔다.
점차 가까워질수록 이안의 연주가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분명 처음보다 달라져 있어.’
연습실에 들어간 직후부터 이안의 곡은 이미 좋았다.
하지만, 이제는 좋다는 말을 한참 넘어 어떤 말로 형용해야 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적절한 강세와 은은한 표현력.
곡 하나에 이 모든 것을 녹여낼 수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문득, 곡을 가만히 듣던 재익은 이안이 한 곡만 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