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집 식탁에 평소와 다른 음식들이 올라왔다.
옆에서는 정갈한 요리사 복장을 한 사람이 정성스레 회를 썰었다.
즉석에서 썬 회를 단촛물을 입힌 밥에 감싸자 금세 초밥이 완성되었다.
요리사는 내 접시에 초밥을 올리곤, 또 다른 초밥을 만들어 재익의 접시에도 올려주었다.
“저녁 내내 한 끼도 안 드셨다면서요. 간편하게 드시라고 스시 오마카세를 불렀습니다.”
나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어째 재익이 더욱 초밥에 눈독을 들였다.
정중하게 얘기하면서도 초밥이 접시에 올라올 때마다 재익의 눈동자가 자꾸만 초밥으로 향했다가 돌아왔다.
자꾸만 침을 삼키는 것이 꽤나 오랫동안 굶은 듯 보였다.
하긴, 계산해보면 그럴 만하지.
“저분들 어제 저녁부터 기다리고 계셨어.”
출근을 하시기 전 어머니가 일러준 말이었다.
내가 음악실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익이 찾아왔다고.
평소처럼 내가 연습을 끝내면 알려주겠다는 말에 기다렸다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연습을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지.
“다음 날 다시 오라고 했는데도 기다렸어.”
오죽했으면 어머니가 주무시러 들어가시기 전 당부했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재익은 끝내 고집을 부렸다고 했다.
어머니 또한 그 눈에 뭔가 강한 집념이 보여서 차마 가라고 밀어붙이진 못했다고 덧붙였다.
‘일단 기본적으로 10시간은 넘겼겠네.’
내가 음악실에 들어온 것이 7시 남짓이었으니까.
<개화>의 총보를 완성한 것이 새벽 5시 무렵이었다.
하지만, 내 작업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그려진 악보와 현실에 써놓은 악보가 같은지 확인해야 하고, 그 완성된 악보도 다시금 다듬는데 또 여러 시간이 걸렸다.
지금이 12시가 넘었으니 얼핏 18시간가량 기다린 셈이었다.
기다린 시간을 방증하듯, 재익의 눈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깔려 있었다.
하지만, 재익의 눈빛만큼은 살아있었다.
“혼자 먹으면 무슨 재미인가요? 여기가 정말 좋은 맛있는 집이라 이안씨께도 소개시켜 주고 싶었습니다. 맛은 어떤가요?”
맛있네요.
초밥 하나를 먹은 내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내 관심은 초밥보다 재익에게 가 있었다.
‘분명 원하는 게 있어 보이는 눈치인데.’
무려 18시간을 오매불망 기다린 사람이다.
그만큼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했을 테니, 그가 생각하는 일도 보통 일은 아닐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누가 18시간 동안이나 잠도 자지 않고 남의 집 주차장에서 기다리겠는가.
새로운 곡을 부탁하거나, 방송 출연을 부탁하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
‘하지만, 그것들은 아닐 거야.’
재익이 여기 왔다는 것은 큰아버지와 이미 연락을 했다는 셈이었다.
그가 혹 작곡이나 방송 출연에 대해 말했다면 큰아버지가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일정이 가득 찬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은 큰아버지였으니까.
그렇다면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건데.
재익도 내가 초밥보다 자신에게 눈길이 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 보였다.
재익은 이내 담담한 나에게 천천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사실, 이안씨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새로운 곡이나 방송 출연과 같은 것이 아닌 무언가.
상황을 듣고 큰아버지가 방문을 허락했을 만큼 무언가가 재익의 입에서 나왔다.
“록펠러 센터 광장에서 무대를 하기로 했는데, 함께 해주실 수 있습니까?”
재익의 부탁은 간결했다.
뉴욕의 심장인 맨해튼, 그중에서도 역사적인 건물로 유명한 록펠러 센터 광장에서 무대를 함께 해달라는 것이었다.
숱한 거물급 팝스타만에게 주어진다는 록펠러 센터 무대.
하지만, 최근 예정되었던 무대에 대해 브레이크가 걸렸다고 말했다.
공연은 하되, 무대 제작을 할 수는 없다는 것.
모닝쇼에서 재익이 그만한 인기는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인기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는 해당 무대의 잔혹한 이면이었다.
“염치 불고한 일인 건 알지만, 이안씨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내가 가면 모닝쇼 측에서도 버선발로 달려와 무대를 만들어주리라 확신한다고.
그래서 나를 찾아왔다고 이야기했다.
만약 재익이 자신의 유명세를 위해 찾아왔다면 나는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재익이 꺼낸 이야기는 사뭇 달랐다.
“제가 그곳에서 첫 무대를 하는 것은 한국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한국 예술가들이 그곳에서 공연을 하게 될 텐데, 그 시작을 닦아두고 싶습니다.”
자신의 소신을 털어놓는 재익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무려 뉴욕.
예술의 메카 한중간에서, 최초로 한국인으로서 무대에 오르는 것이다.
재익에게도 뮤직비디오 조회수 3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전성기를 안아준 현 상황.
하지만, 재익은 이번 기회에 자신의 성공 그 이상을 담으려고 했다.
“이번 일이 K-pop이 도약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뉴욕에서 펼치는 무대에 관심이 쏠릴수록, 세계인들의 눈이 한국을 향할 테니까.
업계에서도 재익의 행보가 앞으로 K-pop인기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집중하고 있다고 전했다.
재익이 성공적으로 미국 진출을 마친다면, 이후 후배 가수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이 높을 테니까.
“그래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이안씨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이니까요.”
이야기를 이어가는 재익의 눈빛이 강렬했다.
단순히 자신의 욕심이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한 일이라는 것이 여지없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
딸랑-
비교적 이른 시간임에도 위스키 바의 도어벨이 울렸다.
이미 한 모금을 마신 듯 재익의 얼굴에는 취기가 올라와 있었다.
“아직 해도 안 떨어졌는데 술판이야?”
재익의 눈에 백발이 성성한 사내가 나타났다.
대중음악계의 거장이자, 남북 정상회담 때 남측 예술단장으로 나섰던 오현춘이었다.
월드스타로 발돋움하는 재익에게도 현춘은 까마득한 선배였다.
그런 현춘에게 재익은 시작부터 이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안씨를 섭외하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네가 섭외를 다 해?”
현춘은 재익의 말에 사뭇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동안 재익의 행보를 고스란히 알고 있는 만큼, 재익이 누구와도 콜라보를 한 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독불장군과도 같았던 재익이.
누군가를 섭외하고 싶다는 말을 직접 내뱉을 줄이야.
“하긴, 이안씨 정도면 그럴 만하지.”
현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익의 고민을 이해한다며 등을 토닥였다.
이미 현춘은 이안의 실력을 눈앞에서 본 사람이었다.
망가진 피아노로도 곡을 펼치는 것은 물론, 육안으로 전혀 구분할 수 없던 망가진 건반들을 피해 그 자리에서 새롭게 편곡하지 않았던가.
만약 현춘이 지금의 지식을 가지고 20살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러진 못할 것이다.
재익은 연신 한숨을 쉬면서 술로 목을 축였다.
이미 꽤 취한 재익은 이안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젊은 건 둘째치고, 음악 자체가 말이 안 돼요!”
재익의 입에서 새벽에 들었던 <개화>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마치 한 곡이 아닌 여러 곡이 동시에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고.
음악을 갈고 닦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그게 수 시간 만에 이뤄지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라고 털어놓았다.
“하긴, 이안씨가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지금 새로운 곡을 만든다던데.”
“응? 새 곡을 쓰고 있다고?”
“네. 이름이… <개화>라고 했어요.”
<개화>라.
재익의 말에 현춘의 가슴 한편이 울렸다.
이미 현춘이 들었던 <평안>도 놀랍지 않았던가.
벌써 그 무대를 펼친 지도 1년이 넘어갔다.
그 사이 이안의 행보를 모르지 않았던 현춘은 그 사이 얼마나 이안이 발전했을지 차마 예상할 수 없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나? 첫 콜라보 대상을 정한 이유 말이야.”
“글쎄요… 이안씨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가장 크죠. 이번 무대는 제 무대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후배들이 밟을 땅이니까요.”
게다가 지금의 재익은 단순히 자신의 무대를 만들기 위해 이안을 초청한 것이 아니었다.
재익이 생각했듯, 록펠러 센터 무대는 단순히 인기를 실감하는 무대가 아니니까.
앞으로의 한국.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재익의 가슴 한편에는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안씨가 올라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죠. 저보다 한국을 더욱 알릴 수 있는 위인일 테니까요.”
***
“곡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안의 선언에 단원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몇몇은 어서 보고 싶다는 듯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이안이 모두에게 악보를 배부하자, 사람들은 저마다 악기로 자신의 파트를 몇 번씩 연주해보았다.
조지 또한 악보를 받아들었다.
차근히 악보를 쳐다보던 조지는 점차 눈을 크게 떴다.
‘이걸 대체 얼마 만에…’
수많은 곡들을 작곡해본 조지는 누구보다 작곡에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악상이 그대로 펼쳐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잘 연결될 것이라 생각했던 화음도 다른 악기들이 더해지면 삐뚤어지기 마련이다.
사람이 모든 악기의 특징을 이해하고, 소리를 완벽하게 익힐 순 없으니까.
10년 동안 왓슨 스튜디오에서 몸담았던 조지도 온갖 가상 악기를 한데 섞어 곡을 만들어냈지만, 화음이 틀어지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그럼 오늘 연습은 그 틀어지는 부분을 바로 잡는 건가?’
그것 이외에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잠깐의 연습 시간 후.
이안이 손을 들어 지휘를 시작하자, 조지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Dolce.
악보에 담긴 지시 아래에 피아노 선율이 부드럽게 나아간다.
마치 봄의 햇살을 닮은 듯한 멜로디로.
거기에 중후한 더블베이스의 음색과 바이올린의 밝은 음색이 더해지자 체임버홀에 활기가 돈다.
바이올린과 더블베이스 다음은 플루트다.
마치 봄이 온 것을 축하하기라도 하듯, 플루트가 새 지저귀는 소리를 내고, 오보에의 선율이 더해지자 새들의 발걸음이 현현하듯 펼쳐진다.
아직 도입에 불과한데도 조지는 연주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선율들이 마치 환상으로 인도하듯 펼쳐졌으니까.
하지만, 조지는 곧 자신의 차례가 나옴을 알고 호른을 고쳐 들었다.
호른 단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울림이 모든 소리를 감싼다.
은은하게 진행되던 것은 새로운 국면을 맞은 듯 호른을 필두로 소리를 더해간다.
이전보다 빨라진 속도로.
현악과 관악이 따로 이어지던 연주 또한 이제는 함께 섞여 화음을 이룬다.
산들바람처럼 터져 나오는 관악의 부드러운 소리와 군데군데 터져 나오는 현악의 스타카토는 마치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을 연상케 했다.
‘왜 <개화>인지 단번에 알겠다.’
만약 조지가 왓슨 스튜디오에서 일했다면 그는 당장 꽃으로 가득한 그림을 요청했을 것이다.
씨앗에서 시작하여 싹을 틔우고, 굳건한 줄기와 꽃망울을 만들기까지.
단계적으로 이어진 연주는 앞으로 어떤 연주가 펼쳐질지, 연주하는 자신마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호른 연주를 이어가는데 펼쳐지는 곡조는 무척 익숙한 것이었다.
‘이건 내가 만들어본 것인데.’
장조에 단조를 집어넣는 것은 조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분명 다른 선율에 쉽사리 섞이기 힘든 조합의 화음인데도, 이안이 손댄 선율은 더할 나위 없이 매끄럽게 연주를 진행시켰다.
자신감에 힘입어, 호른을 부는 조지의 입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절대 속도가 빨라지거나 소리가 예정된 것보다 커지지 않는다.
이미 무언가 그려지듯 환상적인 것이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이게 음악을 느끼며 연주하는 거구나.’
조지는 마치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눈빛을 한 채 연주를 이어갔다.
더 많은 악기가 섞여 만들어내는 하모니는 어느덧 커다란 선을 그려가듯 함께 나아간다.
마치 제각기 꽃이 모여 색다른 꽃다발을 만들어내듯.
그리고 그 꽃다발의 꽃들이 한꺼번에 만개하여 새로운 조화를 만들듯,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만들어가는 음악은 조지가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웅장함을 표현한다.
연주가 끝났을 때는 마치 자신마저 개화한 듯, 조지의 몸에 활기가 넘쳤다.
기분 좋게 마무리를 하려는데,
조지는 문득 지휘를 하던 이안을 보고 의아함을 느꼈다.
연주에 몰입하여 느끼지 못했는데.
이안이 있는 곳은 지휘석이 아닌 피아노 앞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