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The Morning Show. 일명, 모닝쇼.
미국 최초의 아침 TV쇼이자, 유수의 연예인들이 지나간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재익의 출연은 한국인 최초 공연이라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무대에 함께 올라갈 수 있냐는 질문은 내게도 무척 좋은 제안이었다.
프라임플러스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긴 했지만, 미국 공중파에 출연하는 적은 없었으니까.
프라임플러스가 전 세계 입지를 다지는 것이 가능했다면, 모닝쇼 출연은 미국의 청년층은 물론, 아침 소식을 확인하는 연령층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다만, 그때 확답을 주지 못한 것은 아직 끝맺지 못한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개화>를 단원들과 연습하는 것은 물론, VR 컨텐츠에 사용될 음악들을 재녹음하는 과정까지.
당장 앞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아 말을 아낀 상태였다.
‘녹음도 끝났고, <개화>도 얼추 잡혀가니까.’
녹음 작업 때문에 <개화>의 연습이 늦춰진 것도 있었다.
하지만, 녹음 작업을 마무리 짓고 <개화>에 시간을 쏟자 단원들이 훨씬 빨리 갈피를 잡아갔다.
이제는 제익과 이야기할 수 있는 타이밍으로 생각했기에.
나는 곧장 재익을 불렀다.
“저를 선택한 이유를 한 번 더 물어봐도 될까요?”
사실 이유는 단순했다.
재익이 표현했듯, 내가 있어야 무대가 만들어질 수 있을 테니까.
모든 음악가가 그렇듯, 가수에게 무대가 필요한 이유는 뻔할 테지.
하지만, 재익의 속내를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다.
내 물음에 재익의 눈빛은 사뭇 달랐다.
그는 거대한 철학이라도 담은 듯 진지한 눈길로 말을 이어갔다.
“제가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하지만, 지난번에 말씀드렸듯, 이번 기회는 단지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음악을 하는 후배들이 많이 거쳐 가려면 그 첫 삽을 뜨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재익은 무척 솔직하면서도 담백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더 큰 무대에서 활약하고 싶은 욕심과 함께, 앞으로 K-pop이 더욱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
진중한 목소리는 그가 허울이 아닌,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해주었다.
“그래서 이안씨께 부탁드리고 싶은 겁니다. 제가 아는 한, 파급력에 대해서는 이안씨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재익은 내가 필요한 이유를 한 번 더 설명했다.
모닝쇼 측에서 검증된 가수가 아니라면 무대를 만들어줄 수 없다고 했다고.
이미 오랜 세월 음악 활동을 하면서 인맥을 쌓아왔지만, 단번에 그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파급력을 가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재익의 설득에 나는 다시금 머릿속에 여러 생각들을 떠올렸다.
음악가들 사이에서는 뉴욕에서 무대에 오른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성공이라고 하곤 한다.
카네키홀을 비롯하여 유수의 예술 음악당이 있는가 하면, 연극의 성지 또한 뉴욕 맨해튼에 있지 않던가.
그중에서도 록펠러 센터는 맨해튼의 중심지이자, 심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록펠러 센터 광장에서 무대를 하는 것이 얼마나 큰 파급력을 지니고 있는지 나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재익이 출장 오마카세를 데리고 왔을 때 내 생각은 끝난 상태.
나는 재익에게 확답을 전했다.
“좋습니다. 확인해보시고 연락주세요.”
내 수락에 재익의 얼굴이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폈다.
다소 흥분된 듯, 격앙된 목소리로 지금의 기분을 고스란히 표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걸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혹 원하는 것이 있으시다면 뭐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재익의 입에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들이 그대로 나왔다.
국내에서 무대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마련해줄 수 있고, 인맥을 동원해 연예인과 콜라보를 진행할 수도 있다는 것, 등.
하지만, 이미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나중에 DDP VR전시관이 열리면 홍보에 동참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미 VR 전시관에 대해서는 왓슨 스튜디오를 비롯하여, VR 자회사인 빅토리랩에서도 무한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지.
뉴욕과 홍콩, 등 다른 지역에서 열리는 체험 부스도 걱정하지 말라며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홍보 전문가 섭외는 기본, 유명인 초청까지 하여 공격적인 마케팅을 진행한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재익만 한 인재가 없었다.
‘국내에서 인지도 하면 재익을 따라올 사람이 없지.’
현지 상황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현지 사람이 잘 알기 마련이다.
그중 재익은 국내 인지도가 누구보다 넓은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유의 ‘병맛’을 자랑하는 곡들과 꾸준한 SNS 활동으로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10대들에게 꽤 많은 인기를 끌고 있으니까.
대학 축제 일인자로 20대에게 인지도가 높을뿐더러, 오랜 경력 덕에 대중가요에 문외한인 장년층에게도 재익의 노래는 익숙했다.
국내 전 연령층을 모두 포섭할 수 있는 사람.
재익이 홍보에 가담한다면 국내에서는 누구보다 강한 효과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내 요청에 재익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내가 그의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프로젝트 홍보를 맡길 줄은 몰랐다는 눈치였다.
갑작스런 제안에 당황할 법도 한데 되레 흥미진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음악과 무대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게릴라 콘서트도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윽고 재익은 홍보와 관련된 사안들을 여럿 늘어놓았다.
유명한 가수임과 동시에 재익은 뛰어난 사업가로서 기질도 보였다.
아마 소속사를 운영하면서 쌓인 노하우일 테지.
게릴라 콘서트를 비롯, 홍보 시안을 며칠 내로 주겠다는 등, 사뭇 날카로운 구석이 엿보였다.
“게릴라라… 차차 생각해보죠.”
내 말에 재익은 고개를 끄덕이곤 뉴욕 일정에 대해 설명했다.
앞으로 일주일가량 남은 뉴욕 일정.
출국 및 숙소 등을 알려주던 재익은 빈 홀을 바라보더니 내게 물었다.
“이안씨만 괜찮다면 오케스트라와 함께 가도 좋지 않겠습니까? 엄청난 무대가 될 것 같습니다.”
재익은 일전에 런던 올림픽에서 펼쳤던 무대가 생생하다고 설명했다.
굵직한 영국 밴드와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협주를 펼쳤던 무대.
자신은 밴드와 오케스트라가 협주를 할 줄은 몰랐다며.
내 지휘가 오케스트라를 넘어 밴드까지 통솔하는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분명 모닝쇼에서 주최한 무대.
심지어 록펠러 센터 광장이라면 뉴욕의 중심지에서 음악을 펼칠 수 있는 기회다.
음악은 물론, 리히트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이미 결정을 마친 상태였다.
“아뇨. 이번에는 저 혼자 갑니다.”
***
이안의 뉴욕행.
재익과 합동 무대를 준비한다는 말에 몇몇 단원들은 벌써부터 기대된다는 말을 더했다.
특히 재익을 익히 알고 있던 한국인 단원들은 그와 무대를 할 수 있다는 말에 기대감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뉴욕 공연은 혼자 다녀올 예정입니다.”
지휘자가 아닌, 피아니스트로서 뉴욕을 다녀오겠다는 말.
K-pop을 누구보다 좋아하던 에비게일은, 한국에서 ‘축제의 왕’으로 통하는 사람과 콜라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마나 들떴는지 모른다.
에비게일을 비롯한 단원들은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 의문을 가졌다.
‘유명해지려면 이보다 더한 기회가 없을 텐데.’
무려 뉴욕의 중심에서 펼치는 무대다.
무대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으리라.
특히 신입 단원을 받은 리히트 오케스트라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중요한 이 시점에.
홀로 뉴욕행을 한다는 사실에 모든 단원들이 일제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그동안 이안이 한 결정에는 항상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이번 무대의 본래 주인공은 재익씨이기에 한 결정입니다.”
어디까지나 이번 모닝쇼의 주인공은 재익이다.
<서울 패션>으로 전 세계에 ‘서울 춤’ 붐을 일으키고 있는 강재익.
그 유명세를 활용할 수도 있겠지만, 음악의 결을 완전히 다른 것은 무시할 수 없었다.
마치 드레스 코드처럼.
무대에도 어울리는 곡이 있는 법이니까.
“여러분의 데뷔전은 보다 제대로. 저희의 음악을 보여줄 수 있는 곳에서 치를 겁니다.”
이안의 말에 에비게일은 머리가 띵한 느낌을 받았다.
그 한 마디에 이안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모두 묻어있는 것 같았다.
리히트가 주인공인 무대, 온전히 리히트의 진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잡겠다는 생각.
단순히 유명세를 활용해서 리히트를 띄우는 것이 아닌, 음악을 선보임으로써 사조를 펼치겠다는 생각까지.
더 많은 생각이 느껴지는 언변에 에비게일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님이 얼마나 오케스트라를 아끼는지 알겠어.’
만약 자신이었다면 오케스트라를 알리는데 혈안이 되어 곧바로 수락했으리라.
하지만, 이안의 말대로 이번 뉴욕 무대의 주인공은 재익이다.
과하게 튀어버리면 무대를 빼앗는 꼴이고, 그렇다고 완전히 서포트하기엔 신입 단원이 들어오고 첫 무대이지 않은가.
유명세를 생각하면 신입 단원을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수락했을 텐데.
신입 단원의 데뷔전까지 생각해주는 면모에 에비게일은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일주일 정도 걸릴 테니, 그사이에 개인 연습에 집중해주세요.”
“예!”
동시에 대답한 단원들의 대답이 체임버홀을 울렸다.
며칠 뒤.
에비게일은 이른 아침부터 체임버 홀로 향했다.
이안이 뉴욕으로 출국해서 사실상 휴가인데.
‘더욱 정진해야지.’
이미 에비게일을 비롯한 개인 실력은 어느 곳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월등했다.
오케스트라에 감응된 것도 있겠지만, 이미 실력 면에서는 최고인 사람들이 모였으니까.
하지만, 이안은 그런 대단한 사람들의 미세한 차이를 이해하고, 더욱 뛰어나도록 만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에비게일도 숱한 커리어를 쌓으며 실력에는 자신 있는 사람이었건만.
이안 앞에 서면 처음 바이올린을 만졌을 때를 절로 떠오를 정도였으니까.
이안이 출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일러줬던 것을 연습하기 위해 체임버 홀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이른 시간인데도 안에서 피아노 선율이 들려왔다.
에비게일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요한나가 <개화>를 연주하고 있었다.
“어머 요한나씨, 나오셨네요?”
“에비게일씨야말로 웬일이에요?”
하지만, 체임버 홀에 방문한 사람은 둘이 끝이 아니었다.
서령, 아람, 루이사, 조지까지.
기존 단원과 신입 단원 모두 체임버홀에 들어서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장면이 펼쳐졌다.
누구 하나 약속한 것도 없고, 일정을 조율한 것도 아닌데도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단원들이 체임버홀에 모인 것이다.
되레 단원들은 당연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개인 연습에 열중했다.
“자, 이렇게 다 모였는데, 단체 연습 한 번 해볼까요?”
요한나의 말에 사람들이 되레 기다렸다는 듯 악기를 고쳐잡았다.
누구 하나 ‘좋다’든가, ‘그러자’든가 같은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자연스럽게 연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요한나를 향해 일제히 시선을 옮겼다.
Dolce.
부드럽게 나아가는 선율이 시작되고 악기들이 하나씩 추가된다.
하지만, 이안이 없는 탓일까.
에비게일은 연주를 하는 내내 빈자리가 있음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빈자리를 채우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되레 이안이 말한 그대로를 표현하기 위해, 매번 하던 대로 보잉을 진행해간다.
에비게일뿐만 아니라 다른 단원들도 그랬다.
빈자리를 채우기보단 이안이 해줬던 피드백을 다시금 곱씹는 듯.
이안의 자리를 남겨둔 <개화>가 서서히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