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공연을 앞두고, 재익은 거의 밤을 새워 가며 무대를 준비했다.
모닝쇼 PD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무대를 설계하는가 하면, 스태프와 댄스팀을 준비하는 것까지.
소속사 대표로서 오랫동안 시간을 비우는 것에 대비한 것까지 모두 해야 했다.
이안도 바쁜 것은 마찬가지였다.
재익과 협의를 하는 것은 물론, 뉴욕에 가 있는 동안 리히트가 연습을 이어갈 수 있도록 당부하는 것까지.
단장이 된 이후 오케스트라와 떨어지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이안도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렇게 속절 없이 흐른 시간에, 두 사람은 어느덧 뉴욕행 비행기를 타고, 중심지인 맨해튼 땅을 밟고 있었다.
‘높긴 엄청 높네.’
재익은 첨탑처럼 높게 솟은 건물을 올려다봤다.
록펠러 센터.
무려 70층에 달하는 뉴욕 맨해튼의 초고층 건물이자, 1987년에 미국 역사기념물로 선정된 곳.
센터 앞 광장은 수십 개의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 중심의 커다란 공간에서는 앞으로 펼칠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T자 형태를 한 무대, 재익의 생각이 고스란히 반영된 무대였다.
‘뉴욕의 중심가에서 무대를 하게 될 줄이야.’
누구보다 오랜 무명 생활을 했던 그였다.
축제의 왕이라는 타이틀을 얻고,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가수이지만, 미국 무대에 서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MAMA를 비롯한 굵직한 뮤직 어워드 무대에서도 떨리지 않았던 재익이건만.
무대 주변에 점차 모이는 인파를 보자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전 시간대라 사람이 크게 없으리라 생각했거늘.
정장을 입은 직장인은 물론, 관광객들까지 합치니 1,000명은 훌쩍 넘겨 보였다.
긴장되는 마음에 재익은 이안을 향해 물었다.
“이안씨는 긴장 안 돼요?”
“조금요.”
말은 조금이라고 했지만, 이안의 표정에서는 긴장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안은 되레 무대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동선이나 위치를 파악하는 듯, 매서운 눈길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보면 나보다 이안씨를 보러 온 사람들일 텐데.’
이미 모닝쇼에 이안이 나온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 된 지 오래였다.
모닝쇼 PD가 말했듯, 스페셜 게스트로 소개하면서 아주 조금씩 소개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이안이 ‘더 마스터’에 나왔던 장면 일부분을 모자이크해서 업로드하거나, 이안의 눈만 보여주는 사진 등, 무척 난해한 힌트들이 난무했는데.
그럼에도 네티즌 수사대는 귀신같이 증거들이 이안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덕에 모닝쇼는 일주일 내내 포털 사이트에서 연이어 검색 순위 1위를 달성하고 있었다.
실제로 궁금해서 록펠러 광장에 찾아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준비에 앞서 모닝쇼의 MC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휴 아닙니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재익은 특유의 너스레를 떨며 MC의 인사에 답했다.
가슴을 펴고 의기양양한 모습이었지만, 되레 그건 재익이 긴장한 것을 감추기 위한 방법이었다.
오랜 무명 시간을 견디고, 한국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는데, 지금은 세계를 무대로 온 자신이 신기한 상태였다.
재익과 인사를 나눈 MC는 곧바로 이안에게 다가갔다.
더욱 반짝이는 눈을 한 채 이안의 손을 잡은 MC는 보물 만지듯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이게 그 유수의 곡을 만든 손이군요. 무척 팬입니다.”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팬, 오십대를 넘긴 것 같은 MC가 이안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만약 재익이 같은 상황이면 놀라우면서도 긴장돼서 얼어붙어 말은커녕, 행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이안의 반응은 무척 익숙했다.
마치 몇 번이고 본 익숙한 이웃을 만난 듯, 담담하고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환대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이안의 출연 소식에 모닝쇼 제작진에서는 이안과 재익을 위한 퍼스트 클래스까지 제공했다.
좌석 하나에만 천을 호가하는데.
이안이라는 이름 하나에 두 개를 내놓았다는 소식에 재익도 혀를 찰 정도였다.
그보다 더한 것은 이안의 반응이었다.
‘저런 사람들, 이렇게 큰 무대를 앞두고도 저렇게 차분할 수 있다니.’
TV에서 보던 유명 MC, 벌써부터 무대 주변에 맴도는 수천의 사람들, 거기다 커다란 위용을 뽐내는 무대까지 모든 것이 새로우면서도 엄청났다.
몇 번이고 공연을 뛰며 베테랑 이상의 심장을 가졌다고 생각한 재익도 떨리는데.
떨림 없이 상황을 차근히 살피는 이안의 모습에 재익은 존경심마저 들었다.
이안의 대단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재익씨. 볼륨 조절이 필요할 것 같네요.”
첫 번째 리허설을 마친 시점이었다.
무대 위에서의 동선과 악기를 비롯한 음향시스템을 조율하는 과정.
재익에게도 익숙한 일이었지만, 이안은 재익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고 있었다.
“피아노 기타의 볼륨이 조금 과합니다. 둘 다 좀 낮춰야 할 것 같고… 혹시 기타리스트에게 스트로크를 조금 약하게 해달라고 할 수 있나요?”
단 한 번의 리허설이었음에도, 이안의 입에서는 피아노를 비롯한 모든 악기에 대한 볼륨 피드백을 건넸다.
이안의 모습에 재익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저걸 한꺼번에 다 캐치해?’
지금껏 리허설이라면 골백번도 했으리라.
하지만, 여러 소리가 한데 섞이는 상태에서 각자의 소리의 특이점을 분석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볼륨 조절뿐만 아니라 악기 연주에 대한 방식까지.
결코 한 번에 잡아낼 수 없는 소리들을 한 번에 잡아내는 모습에 현지 음향 감독도 놀라운 듯 눈을 크게 뜬 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아직 대단하다는 여파가 가지 않았는데, 이안은 담담하게 재익을 쳐다봤다.
“리허설 가시죠.”
***
“이안씨, 마지막 스타일 받고 준비하죠.”
예전에 몇 차례 방송에 나갈 때도 좀처럼 화장을 하지 않는 나였다.
음악만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대중의 인지도도 쌓였고, 연이어 내 얼굴이 드러나는 상황이다.
게다가 무대에서는 몰랐지만, 모니터로 확인한 조명은 내가 생각한 것 그 이상이었다.
환하다 못해 눈코입을 지워버릴 정도였으니.
스타일리스트가 화장품을 더할수록 얼굴에 선이 살아나고, 눈의 크기가 커진 듯한 착시가 일어난다.
머리 세팅까지 하자 거울 속에 다른 사람이 비친 듯 조금은 어색하기도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재익이 박수 치며 칭찬을 더했다.
“이안씨, 원래도 잘생겼는데, 무대화장까지 받으니까 완전 아이돌이네. 우리 회사랑 계약하는 건 어때요?”
업계 최고 대우를 해주겠다는 둥.
연예인 좋아하는 사람 누구 있냐는 둥.
재익은 연이어 재치 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몇 번의 농담에 준비하는 공간에는 활기가 일렁였다.
‘많이 들뜬 모양이네.’
마치 당장이라도 무대에 뛰어나갈 사람처럼.
재익은 이 상황을 벌써부터 즐기는 듯 보였다.
리허설 때까지만 해도 조금 긴장한 기색이 엿보였는데, 지금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슛 들어가기 5분 전입니다!”
스태프가 천막으로 들어와 곧 방송이 시작된다고 알려주었다.
이제 진짜 시작.
은은한 피아노 선율과 함께 록펠러 센터 광장에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모두가 숨죽이고 내 연주를 지켜보던 찰나.
드럼스틱 신호와 함께 연주의 결이 완전히 뒤바뀐다.
대한민국을 넘어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서울 패션>이 재즈풍으로 편곡되어 록펠러 센터 광장에 울렸다.
Vivace.
공중에 떠오른 비눗방울을 터트리듯, 톡 건드리는 듯한 반주에 음들이 튀며 재치 있게 뻗어나간다.
재즈 느낌이 물씬 풍기는 꺾임음과 특유의 소리들이 연이어 들려오자 사람들의 고개가 흥겨움이 흔들린다.
이내 피아노 선율을 중심으로 트럼펫, 기타, 등 여러 세션이 더해지자 마치 하나의 오케스트라처럼 선율이 터져 나온다.
그 선율 위에서 재익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신만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Dress Classy, Dance, Cheesy.’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단정한 정장을 입은 상태에서 격한 춤사위를 보여주었다.
반복되는 후렴구에서는 마이크를 청중을 향해 뻗으며 호응을 유도하기까지.
‘축제의 왕’이라고 불렸던 재익의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무대가 끝났을 무렵에는 땀범벅이 된 재익이 숨을 헐떡이면서도 얼굴에는 환한 미소를 피우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가수 재이입니다.”
벌써부터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현장에서는 재익의 미국 활동명인 ‘재이’를 부르짖으며 열띤 환호성을 보냈다.
이윽고 MC는 미국을 강타한 곡, <서울 패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토크쇼를 이어갔다.
어떤 생각으로 만들었는지, 이 정도의 인기를 예상했는지, 등 흔한 토크쇼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처음에 이안씨가 출연한다는 소식에 저도 놀랐습니다. 두 분은 어떤 사이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친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악에는 경계가 없으니까요.”
굳이 비교하면 삼촌과 조카뻘 정도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재익의 표현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순간에는 나이가 상관없었으니까.
이미 그런 것 일절 신경 쓰지 않고 무대를 펼치지 않았던가.
연이어 MC가 집요하게 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했지만, 나는 최대한 간결하게 대답했다.
일부 질문은 교묘하게 방향을 틀어 재익에게 돌리기도 했다.
이번 무대는 어디까지나 재익이 주인공이니까.
재익도 그런 내 생각을 알아챈 것인지 MC 몰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모닝쇼가 막바지에 달할 즘.
MC가 조심스레 내게 한 마디를 전했다.
“혹 실례가 안 된다면 곡 하나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여기 관객분들이 무척 원하실 것 같아서요.”
MC의 질문에 관중들이 잘한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사람들은 ‘앵콜’이란 단어 대신 내 이름, ‘이안’을 반복해서 말했다.
열띤 호응에, 나도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댔다.
“그럼 함께한 재이의 곡 하나를 제가 연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관중에서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나는 피아노가 있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주 잠깐의 사이, 피아노로 향하려던 내게 재익이 걱정스러운 듯 작게 물었다.
“괜찮겠어요? 준비할 시간도 없었잖아요.”
뉴욕에 오기 전까지는 <개화>와 VR 준비, 이번 합동 무대 준비 때문에 바빴으니까.
실제로 나 또한 합동 무대를 제외하고 재익의 곡을 연습한 적은 없었다.
재익도 그것을 아는 눈치였다.
“네. 연주할 게 하나 생각났거든요.”
나는 그런 재익에게 편안한 눈길로 말했다.
어떤 곡을 할 것인지,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 전혀 말하지 않았음에도.
재익은 그 한마디에 걱정 어린 눈을 거두고 응원하는 눈빛을 했다.
되레 한편으로는 묘하게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는 피아노 앞에서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했다.
가요로 들었던 재익의 곡이 내 머릿속에서 편곡되며 악보로 재탄생되었다.
높은음자리표에서 시작하여 끝세로줄까지 모든 악보가 완성되었을 때.
손가락이 가지런히 건반을 두드렸다.
둥-
낮은음을 내는 건반이 울리자 사람들의 함성이 일제히 멎는다.
간결한 음들로 시작한 선율은 어느덧 하나둘씩 음이 늘어나며 화음을 더해간다.
잔잔하면서도 아련한 기색이 엿보이는 흐름에 사람들의 고개가 천천히 좌우로 움직인다.
‘부드럽지만 강하게.’
재익의 3집 타이틀곡, .
사랑하는 여자에게 무엇이든 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를 담은 노래.
불타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중독성이 강한 후크가 연이어 터지는 곡이었다.
전자음의 연속으로 강렬하게 터져 나가던 음악이, 피아노로 재탄생되고 있었다.
클래식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일부분에서는 재즈처럼 톡톡 튀며 반전미를 더했다.
가사 내용처럼 사랑하는 대상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천천히 음을 이어가면서도 힘 있게 건반을 누르며 그 세기를 더해간다.
약 3분가량 이어진 짧은 연주.
곡이 끝났음에도 사람들은 가슴 한편이 뭉클한 듯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자신의 첫사랑이 생각난 듯 아련한 눈길.
MC도 같은 눈길을 보내다 애써 정신을 차리고 박수를 쳤다.
MC의 박수를 방아쇠 삼아 사람들이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보냈다.
“재이! 당신의 곡이 이렇게 변했대요. 어떠셨어요?”
“저도 어리둥절합니다. 제 곡이 이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전혀 새로운 곡을 들은 것 같기도 합니다.”
재익 또한 이런 편곡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여러 감정이 한데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또한 이렇게 이안씨를 보내드리기 정말 아쉽군요. 꼭 기회가 있으면 뉴욕에서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MC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에도 기대감이 한껏 들어갔다.
또 다른 뉴욕 무대.
사람들은 소식만 들려온다면 당장 찾아올 기세로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기회는 일찍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