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모닝쇼 측에서 연 만찬회.
4대 방송사 중 하나인 CBC답게 만찬회 수준 또한 기대 이상이었다.
거대한 홀을 통째로 만찬회장으로 만든 것.
화려하게 반짝이는 샹들리에는 물론, 드레스코드를 맞춘 사람들이 샴페인을 든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 또한 모닝쇼 측에서 준비해준 정장을 입은 채 홀로 들어섰다.
“이야… 엄청나구만?”
재익은 주변을 둘러보며 연이어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동안 모닝쇼가 굵직한 스타들을 배출한 만큼, 만찬회에 참석한 인원들도 범상치 않았다.
20살 나이에 빌보드 차트에 이름을 올린 싱어송라이터.
미국 랩의 대부라고 불리는 흑인 래퍼.
곡만 냈다 하면 미국은 물론, 바다 건너 우리나라에도 곡이 유명세를 떨치는 가수까지.
모닝쇼를 거쳐 간 톱스타들이 여럿 보였다.
나와 재익이 파티장에 들어서자 몇몇 유명인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특히 재익의 붙임성 있는 성격은 미국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다가오는 이들에게 격한 반응으로 환영하는가 하면, 유명인들 사이에 둘러싸여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Dress Classy, Dance, Cheesy.
‘옷은 세련되게, 춤은 저렴하게’라는 독특한 슬로건에 걸맞게 정장을 입은 채 추는 익살스러운 춤.
뻔뻔한 표정으로 춤을 이어가는 모습에 여러 사람들이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며 칭찬을 더했다.
따라 하기 쉬운 춤을 가르쳐달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재익에게 다가온 손님 중 하나인 래퍼는 엉거주춤하면서도 열심히 재익의 춤사위를 따라 하려고 노력했다.
선글라스에 휘황찬란한 금목걸이를 착용한 래퍼.
미국 랩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그가 재익을 따라 춤을 추는 모습에 사람들은 신선하다며 박수와 함께 찬사를 보냈다.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나는 주변을 훑어봤다.
나를 향해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질 즈음.
몇몇 사람들이 반가운 기색을 띤 채 내게 다가왔다.
“음악 정말 잘 듣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실례가 안 된다면 저희 프로그램에서 인터뷰 한 번만…”
“이번 리히트 오케스트라 무대로 어딜 생각하고 계신지 물어봐도 될까요?”
참석자가 그렇듯, 내게 다가온 사람들도 무척 다양했다.
자신을 음악가로 소개하는 사람부터, 방송국 PD라는 등, 음악가와 제작진을 구분하지 않고 상당수의 사람들이 내게 다가왔다.
음악가들은 내게 음악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는가 하면, 무대에 대한 철학을 묻기도 했다.
“이안씨, 이안씨의 음악 모토는 무엇입니까?”
한 음악가의 질문에 곁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한 수 배우려는 눈치도 있었지만, 내 발언을 기사화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질문한 사람에게 무척 담담하게 대답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제 음악은 듣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아마 제가 음악 전체를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꺼내놓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머릿속에서 악보가 차근히 채워지는 능력.
하지만, 단순히 악보가 만들어진다고 설명할 순 없었다.
내가 음악을 들을 때 묘한 이미지를 느끼고, 그것을 그림처럼 받아들이는 것처럼.
어느덧 들을 때가 아닌, 곡을 만들고 표현할 때도 그 감각을 이용했다.
‘<개화>에서 그걸 크게 느꼈지.’
단원들이 만들어낸 연주를 악보로 한데 녹아내는 과정.
마치 꽃 하나만 피운 정원에서 단원들이 또 다른 꽃을 심어두듯,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결과물이 펼쳐지는 것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개화>의 방향성을 변경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내가 본 것을, 들은 것을, 느낀 것을 무대에서 펼쳐낸다.
내 관점대로 만들어낸 것을 다른 사람이 저마다의 관점으로 바라보듯.
내가 만든 음악도 나의 관점을 전달하되, 사람들도 그 관점을 단순히 듣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사고를 더할 수 있길 원한다고 내 의사를 전달했다.
몇몇은 이해한다는 눈치로, 몇몇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는 눈치로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내게 다가온 사람은 박수까지 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역시, 젊은 거장이라고 불리시는 분의 마인드는 다르군요.”
이 때 이야기를 차근히 듣던 그래머가 다가왔다.
한 발자국 뒤에서 음악가들과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그런 철학이 있어서 곡이 뛰어난 것 아니냐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데 그래머 PD 옆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아, 여기 이안씨를 만나고 싶어 했던 손님입니다.”
그래머의 소개를 받은 남자는 모닝쇼 무대를 모두 보았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듣기만 해도 심장이 뛰는 음악에 자신도 모르게 발을 굴렀다고.
더 나아가 홀로 보인 연주는 뭉클한 감정이 피어올라 첫사랑을 떠올리게 한다고 답했다.
연이어 무대에 대한 감탄사를 늘어놓던 남자는 깜박했다는 듯 제스처를 취하며 명함을 내밀었다.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NBJ의 파이널쇼를 담당하고 있는 제임스 파커라고 합니다.”
자신을 제임스라고 소개한 남자.
명함에 적힌 총괄 PD라는 직급은 그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문득, 나는 NBJ가 모닝쇼의 방송사, CBC와 경쟁사라는 것을 떠올렸다.
잠깐 생각에 잠기던 찰나.
어느덧 다가온 재익이 명함 속의 글자를 보더니 경악성을 터뜨렸다.
“파이널쇼? 미국의 그 파이널쇼?”
“맞습니다. 알아주시니 영광입니다.”
재익의 반응에 제임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재익은 놀라움 가득한 표정으로 제임스 대신 파이널 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파이널쇼.
CBC의 모닝쇼가 미국의 아침을 책임진다면, NBJ의 파이널쇼는 미국의 저녁 시간을 책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표현했다.
하루 시청자가 무려 수백만에 이르는 프로그램.
SNS의 인기를 통해 젊은 층의 인기까지 끌고 있는 대중적인 TV쇼였다.
심지어 유튜브 구독자 수는 약 3천만에 이르면서 전 세계 토크쇼 채널 중 1위라고 덧붙였다.
“게다가 쇼호스트 파이씨는 우리나라로 치면 국민 MC랑 같다고 보면 될 거야.”
파이 드제너러스가 진행하는 미국 내 명실상부 최고의 티비쇼.
특히 진행자인 파이 드제너러스는 특유의 입담과 게스트를 다루는 솜씨에 미국 전역에서 사랑받는 스타라고 설명해주었다.
“특히 파이쇼는 우리나라 연예계에서도 유명해. 오죽하면 미국 등용문이 바로 파이널쇼라고 하겠어.”
나 또한 자세한 설명을 듣자 어떤 프로그램이었는지 기억이 날 것 같았다.
이전 뉴스에서 한국 출신 비트박서가 파이널쇼에 출연하여 큰 화제를 모은 적이 있으니까.
이외에도 해외 진출로 크게 두각을 드러내는 아이돌들이 파이널쇼에 출연하며 뉴스에 대서특필 된 적도 있었다.
‘제안은 좋지만…’
미국 진출의 등용문.
단어만 들으면 무척 메리트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개화>의 발표는 물론, 오케스트라를 올리는 무대를 찾는 나에게 토크쇼가 크게 달콤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또한 일반적인 방송국 세트로는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제대로 펼칠 수 없을 테니까.
몇차례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출연 제의를 고민하고 있는 거라 생각한 것인지 제임스가 다급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특히 이번 에피소드가 저희 파이널쇼에는 무척 중요합니다. 그런 중요한 자리를 이안씨와 함께하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제임스는 무척 정중한 태도로 설명을 이어갔다.
“이번에 저희 파이널쇼에서 500화 특집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수년간 파이의 진행 아래에 진행된 쇼가 어느덧 500회를 앞두고 있다고.
기념비적인 순간을 특별한 손님으로 채우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특집인 만큼 내게 많은 것을 할애할 수 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무대가 필요하다면 무대를, 앨범 홍보가 필요하다면 홍보까지, 내가 요청하는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다며.
땀까지 흘리며 열성적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에 절실함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면 나름 좋은 제안인데?’
무대를 마련해준다고 한다면 처음 내가 생각했던 무대의 부재는 충분히 해결될 것이다.
파이널쇼의 인기는 뉴욕은 물론, 국내에도 몇몇 알려지는 데다 미국에서는 모닝쇼에 이어 일종의 등용문으로 통했으니까.
게다가 공중파라는 점을 생각하면 일전에 촬영했던 OTT 다큐, 더마스터와는 새로운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파이널쇼는 다양한 연령층에게 사랑받는 토크쇼이자, TV에서 방영되는 것을 생각하면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가도 파이널쇼를 볼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생각을 하느라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제임스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더했다.
“제가 원래 먼저 러브콜을 보낸 적이 없었는데, 이안씨가 처음으로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
“초대해줘서 고맙다. 그래머.”
이안에게 명함을 건네주고 난 뒤.
제임스는 그래머에게 감사 표시를 했다.
모닝쇼를 볼 수 있도록 초대한 것은 물론, 만찬회에 들어올 수 있게 해준 것이 모두 그래머 덕이었으니까.
오늘 일이 아니었다면 이안의 진가를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목 뒤가 서늘했다.
제대로 이안의 곡을 직면하고, 그 속의 깊이를 알게 된 제임스는 어느덧 이안의 팬이 되어 있었다.
제임스의 반응에 그래머도 사뭇 놀란 기색을 보였다.
‘항상 콧대 높던 양반이 웬일로…’
대학 시절 만났을 때부터 제임스를 뜻을 굽히거나 먼저 고마움을 표시를 한 경우가 없었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대회의 상과 PD상을 휩쓰는가 하면, 지금은 명실상부 최고의 토크쇼 PD 자리에 있지 않은가.
자존심이 무척 강하기로 유명한 제임스가 후배인 자신에게 감사 인사를 한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머의 생각을 제임스도 모르지 않았다.
‘그럴 가치가 있는 인물이니까.’
이안을 지켜보던 제임스는 연신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제임스도 놀라게 만들 정도로 만찬회 손님들은 어마어마했다.
그동안 모닝쇼를 거쳐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셀 수 없는 데다 신인이었던 사람들도 지금은 굵직한 행보를 이어가며 거물로 성장하지 않았던가.
특히, 클래식, 가요, 힙합, 등 장르를 구분하지 않은 덕에 모닝쇼를 방문한 손님들도 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했다.
싱어송라이터, 피아니스트, 문학 거장, 등 미국에서 이름만 말해도 알아봄 직한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런 인물들과 대화를 하는데도 주눅 들지 않고 의견을 펼치는 이안의 모습은 나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제임스도 이안과 짧게 대화를 하는데 알 수 없는 중압감을 느낄 정도였다.
‘이안씨에게 명함을 주었으니 됐어.’
처음 목표로 한 목적은 달성한 셈이니까.
파이널쇼 500회 특집 게스트로 모시고 싶다는 의사도 전했고.
무척 원한다는 말까지 했으니, 이제는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과한 권유는 되레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부담스럽지 않게끔 제안을 하고 자리를 뜬 것이다.
이제 나가려던 찰나.
그런 제임스의 발목을 단숨에 사로잡은 사람이 있었다.
‘저 사람은…’
눈길이 뺏긴 것은 제임스뿐만이 아니었다.
그래머를 비롯한 방송사 관계자는 물론, 만찬회에 참석한 음악가까지, 그녀의 발걸음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몇몇은 그녀에게 말문이라도 붙여보려고 다가갔지만, 그녀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제 갈 길을 갔다.
‘뮤지컬의 전설이 왜 여길 왔지?’
방송계는 물론, 음악계에서도 알아주는 사람.
뮤지컬계에서는 전설로 통하는 사람.
그녀가 이안에게 다가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