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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62화 (162/250)

162화

Welcome Back!

체임버 홀에 들어가자마자 여기저기서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마치 거사를 치르고 온 사람을 환영해주듯, 아람이 커다란 꽃다발 하나를 내밀었다.

“저희 다 모여서 단장님 방송 봤어요.”

시차 때문에 한국은 새벽 12시가 넘었을 시간이었을 텐데.

그럼에도 단원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모여 모닝쇼 무대를 봤다고 전했다.

재익과의 콜라보 무대부터, MC의 요청으로 독주를 펼친 것까지.

몇몇은 내 독주가 얼마나 멋졌는지 모른다며 칭찬을 더했다.

“단장님의 독주는 무척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요한나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하기사.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 앞에서 독주를 보여줬던 것이 영국 여왕의 헌정곡을 만들 때였는데.

그로부터 벌써 4개월이 지난 시점이었으니까.

나 또한 수많은 사람 앞에서 독주를 펼친 것은 무척 오랜만의 일이었다.

오케스트라를 창설한 이후에는 연주보다 지휘에 조금 더 치중했었으니까.

“기사도 빗발치는데 안 보셨죠? 단장님은 음악밖에 모르시니까!”

아람이 능청스럽게 말하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재익. ‘이안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 진출 성공에 대한 공을 이안에게 돌려.]

[모닝쇼, 재익&이안 편 시청률 16% 달성, 전무후무한 기록 달성.]

[빈 필하모닉 마에스트로, ‘이안 다시 피아노를 잡은 것이 무척 반가워, 다시 무대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밝혀 화제.]

.

.

아람이 말했듯, 방영 이후 계속해서 기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재익의 미국 진출은 물론, 모닝쇼 공연에서 독주를 펼쳤던 것에 큰 관심이 주목되었다.

단장이자,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지만, 결코 피아노 실력은 어디 가지 않았음을 손수 증명했다고.

문득 기사를 함께 보던 서령이 에비게일에게 물었다.

“에비게일씨, 미국에서 시청률 16%가 그렇게 대단한 거예요?”

“그럼요. 한국처럼 미국도 방송사가 많은데다, 경쟁 프로도 엄청 많아서 5%만 넘어도 성공했다고 하거든요.”

서령의 질문에 에비게일이 물론이라며 설명을 덧붙였다.

아마 방송사에서도 목표 시청률보다 몇 배나 더 나와서 축제 분위기일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한동안 단원들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짧게 박수를 치며 사람들을 집중시켰다.

내가 일찍 돌아온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까.

“자. 제가 없는 동안 <개화>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보죠.”

연습을 한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하던 단원들은 곧바로 자리로 돌아가 날카로운 기색을 담은 채 나를 응시했다.

악기를 고쳐잡고, 지시가 떨어지면 곧바로 연주를 할 기세로.

나는 그들을 한 번 쳐다본 채 피아노로 향했다.

나와 눈빛을 교환한 요한나가 자연스레 건반에 손을 올렸다.

나 또한 왼손을 건반에 올렸다.

오른손은 단원들이 볼 수 있도록 높게 올린 채.

Dolce.

박자를 알림과 동시에 왼손이 빠르게 건반을 훑었다.

***

늦은 저녁.

샴페인 잔 네 개가 서로 부딪치며 은은한 소리를 냈다.

현철을 비롯하여, 그동안 서로 바쁜 탓에 얼굴 보기 힘들었던 이안의 가족.

이안의 미국 진출을 기념하여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전채 요리와 스테이크가 일품인 라운지 레스토랑.

높은 곳에서 야경을 감상하며 먹는 샴페인과 카나페는 레스토랑의 자랑이자 묘미였다.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신 현철은 문득 이안에게 물었다.

“재즈 피아노는 언제 마스터한 거냐?”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질문.

은희와 수철도 그 부분은 무척 궁금했는지 이안에게 눈길을 돌렸다.

음악을 정통한 사람들답게, 클래식과 재즈 피아노의 차이는 기본 소양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아시아의 바흐라고 불린 수철은 클래식에 적응한 사람이 재즈 피아노에 적응하기 얼마나 힘든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무척 진지한 가족들과 달리, 이안은 무척 짧고 건조하게 답했다.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연주해봤어요. 가요의 펑크락을 나타내려면 재즈의 스윙이 무척 효율적일 것 같았거든요.”

사실 꺾임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간단하다.

손가락의 움직임과 특유의 리듬감에 몸을 실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결코 그게 이안이 말한 것처럼 따라가는 것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 무척 잘 알고 있던 현철이기에, 놀라운 감정을 눌렀다.

‘단지 피아노에 재능이 있는 게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예전이었으면 현철은 이안과 재익이 콜라보 무대를 한사코 반대 했을 것이다.

클래식은 어디까지나 클래식의 영역이 있고, 대중음악은 대중음악의 영역이 있으니까.

콜라보라는 것은 말이 좋아서 화합이지, 애매한 조합은 그저 괴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안이 펼친 무대는 특정 장르를 구분할 필요 없이 그저 ‘최고’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재즈와 클래식을 넘나들며 곡에 더욱 효율적인 방향을 찾아가는 재능.

매니저로서 같이 있으며 몇 번이고 봐온 것이지만, 이안은 때때로 적응 안 될 정도로 엄청난 능력을 보여주곤 했다.

식사가 무르익어갈 즘, 이안은 은희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머니 사업은 잘되어 가요?”

“그럼, 덕분에 잘되어 가고 있지.”

이안의 투자를 받아 성장한 은희의 회사는 더욱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초기에 은희가 OST로 방향을 잡고 시작한 것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한국 드라마 시장에 OST 외주 업체로 시작한 은희는 밴드 배틀 프로그램에서 우승한 ‘허니레인’을 영입하며 빠르게 인재를 확보했다.

은희 또한 청음력이 대단했기에.

깐깐한 은희의 손을 거친 음악들은 국내 OST 시장을 빠르게 점령해갔다.

“게다가 이번에 네가 연결해준 왓슨 스튜디오와도 무척 원활하게 진행 중이야.”

이번 뉴욕행에서 이안은 프랭크와 OST 협업에 대해서도 얼핏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하지만, VR 전시회에 이어 <개화>의 준비에 힘쓰고 있었기에.

이안은 OST 제작에 대해서는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대신, 이안은 OST 사업으로 빠르게 성장 중인 은희를 떠올렸다.

“혹시 제가 추천하는 곳에서 음악을 받아보시는 건 어떤가요?”

이안이 마련한 기회.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입지를 다지는 왓슨 스튜디오의 작품에 OST를 만드는 것이었다.

국내 드라마계에서 블루칩으로 떠오르는 은희의 회사였지만, 국제적인 기업의 제안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

하지만, 아들이 준 기회라는 생각과 함께, 은희는 굳은 다짐을 보였다.

‘꼭 이뤄내겠어.’

회사 사람은 물론, 허니레인과 밤을 새우다시피 준비했다.

특히 신비로운 분위기를 원하는 왓슨사의 주문에 은희는 오랫동안 놓았던 플루트까지 들었다.

오묘하면서도 아름다운 플루트의 선율과 세션의 소리가 섞인 덕에 왓슨 사에서도 무척 긍정적인 반응을 보냈다.

“첫 곡이 무척 좋았으니, 다른 곡도 부탁한다더라.”

은희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감과 동시에 예전이 떠올랐다.

연주에 더 이상 집중하지 못했을 무렵.

이안을 통해 하르모니아 음반사에서 음반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은 물론, 이안과 연이 있는 허니레인과 계약을 맺어 새출발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았던가.

은희는 지금이 자신의 제2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이 바로 아들, 이안이라는 생각에 은희의 가슴 한편이 뜨거워졌다.

“그럼 이안이 너는 이제 뭘 헐 거니?”

“신곡 공개를 앞두고 있어요.”

신곡 공개라는 말에 수철이 숨 차는 소리를 냈다.

남들은 수개월, 수년에 걸려서 만드는 교향곡을 단 며칠 만에 만들어내고, 그 수준 또한 무시할 수준이 아니니.

벌써 12번째, 이번 곡까지 하면 13번째라 익숙해질 법도 한데,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또 그 곡을 어디서 공개할지 궁금증이 일렁일 지경이었다.

그동안 아들이 해낸 일들이 얼마인가.

올림픽 개막식에서 지휘봉을 휘두르는가 하면, 영국 왕세자의 초청을 받아 여왕 즉위 기념식을 장식하고, 뉴욕 한가운데에서 무대를 펼치지 않았던가.

게다가 아들이 이끄는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로얄 오케스트라 경연에 출사표를 던져 화려한 데뷔전까지 치렀으니.

다시금 리히트의 진면목을 어디서 보여줄지 이젠 감도 오지 않았다.

***

오전부터 파이널쇼 회의실에는 냉기가 흘렀다.

작가들이 제임스 PD를 향해 날카로운 눈길을 보냈다.

“PD님. 이제는 결정하셔야 합니다.”

“맞아요. PD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작가들이 눈치를 보면서 목소리를 내었다.

이안의 입지를 알고 있는 이상, 이안 대신 다른 사람을 넣자고 차마 할 순 없었던 것.

하지만, 몇몇 작가들은 고통을 호소할 정도였다.

“젤리나씨는 하루에도 수십 통씩 전화가 와요. 오늘은 방송국에 찾아온다길래 겨우 뜯어말렸다구요.”

“저두요. 감독님들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세요. 이러다 500화 못 찍는 거 아니냐구요.”

무려 파이널쇼의 500화 특집이다.

이미 헐리우드 배우는 물론,

급기야 차후 501화부터 내정된 스타들도 500화 특집에 참여할 수 없겠냐고 넌지시 물어볼 정도이니.

빨리 섭외가 확정되지 않으면 500화 제작에 큰 지장이 생길 기세였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되레 제임스의 눈길은 작가들이 아닌 휴대폰에 고정되어 있었다.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이안이 한국으로 떠난 지 벌써 일주일가량이 흘렀다.

분명 500화 특집으로 이안을 초청하고 싶다는 이야기와 파이널쇼가 얼마나 대단한지 옆에 있던 재익이 설명해주지 않았던가.

되레 재익이 출연하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할 정도였는데.

아직까지도 이안이 연락이 오지 않는 것에 점점 초조해질 지경이었다.

‘더 이상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어.’

결국 제임스는 마지막 보루를 사용했다.

똑똑.

“들어와.”

제임스가 노크까지 해가며 들어간 집무실.

통유리로 되어 있는 창문에는 뉴욕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 놓인 마호가니 책상, 회색 머리칼이 돋보이는 남성이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NBJ 방송국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사람.

국장, 크리스 버크였다.

“아직도 파이널쇼 500회 게스트를 확정하지 못했다고?”

크리스도 파이널쇼 소식은 익히 전해 들었다.

당장 촬영을 들어가도 모자랄 판에 게스트 선정조차 하지 못했다고.

심지어 들어오는 제안에도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는 소식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지만, 제임스의 머릿속에 있는 게스트는 오직 한 명이었다.

“박이안씨를 500회 특집 방송에 모시고 싶습니다.”

무려 박이안.

제아무리 좋은 무대, 좋은 조건이어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젊은 거장.

이미 NBJ에서도 수차례 인터뷰와 프로그램 출연 제안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지 않았던가.

그러한 사항을 잘 알고 있기에 크리스도 사뭇 진지한 기색으로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모닝쇼에 나왔던 사람을 그대로 초빙하는 게 무슨 메리트가 있지?”

“새로움을 보여주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분명 모닝쇼와는 또 다른 무대를 보여줄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나? 500화 날아가면 답도 없을 텐데.”

파이널쇼에 이안을 출연시키는 것은 큰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여태껏 팝가수나 헐리우드 배우 같은 대중 친화적인 사람들을 게스트로 세웠던 자리였으니까.

이안이 무척 유명한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실이었지만, 국장의 입장에서 모험을 걸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제임스는 확신 어린 태도로 입을 열었다.

”에반스, 조니, 발렌타인. 모두 제가 발굴한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아이돌이라고 불리는 에반스, 기타와 목소리만으로 세계를 제패한 조니, 스탠드업 코미디의 새로운 발판을 만들고 있는 발렌타인까지.

모두 제임스가 찾아 파이널쇼에 세운 인물들이었다.

신인에 불과했던 이들의 가능성을 내다본 제임스의 안목 덕에 파이널쇼에 등장한 세 사람은 지금 미국을 넘어 다른 세계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 제임스였기에, 이번에도 확신이 섰다.

“그들보다 박이안 피아니스트가 몇 배나 더 큰 파급력을 자랑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아무리 콧대높은 헐리우드 배우라도 사정할 정도로 높은 파이널쇼의 위상.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 상황이었음에도 이안을 섭외할 수 있다면 자존심도 집어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기세가 들어간 탓일까.

제임스의 눈길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매서웠다.

되레 그 눈길에, 크리스는 무척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치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크리스의 입이 열렸다.

“모닝쇼에서도 했던 것을 우리가 못해서야 쓰겠나?”

무겁게 떨어진 크리스의 말.

제임스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미국 방송은 모닝쇼로 시작해서 파이널쇼로 끝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

특히 오랜 경쟁사인 NBJ와 CBC의 관계를 생각하면 단순히 시간대에 맞춰 방송을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 CBC의 대표 프로그램인 모닝쇼에 이안이 출연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단숨에 모닝쇼로 쏠린 상태.

국장인 크리스가 이를 부드럽게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섭외만 해오게. 뒷감당은 내가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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