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내 손짓에 따라 선율이 변칙적으로 바뀌어 나간다.
부드럽게 나아가다가도, 그것을 질투라도 하듯 세차고 박력 있는 선율이 더해진다.
지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매섭게 꽂히면서도 손과 입은 악기를 향해 있다.
페르마타로 길게 늘인 음 사이로 바이올린이 치고 올라오고, 금세 곡은 활기참을 넘어 아름다운 장면을 형상화한다.
머릿속에서는 빠르게 악보가 맺혀나간다.
그 사이, 나는 악보를 보는 것만으론 확인할 수 있는 부분들을 챙긴다.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선율일지라도, 자그마한 디테일에 따라 선율이 제각각 바뀌니까.
“바이올린, 페르마타에서 조금 더 선율을 끈다는 느낌으로 유지해주세요. 가야금 소리가 나면서 멈춰도 상관없습니다. 되레 그 선율이 섞이면서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낼 테니까요.”
0.5초 사이의 간격을 더 연주하는가, 아닌가의 차이.
그러나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의 변화에 따라 곡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단칼에 끊었던 선율은 조금 더 은은함을 더하고, 그 은은함에 이어 자연스러운 연결을 선보인다.
‘신입 단원들 흡수력도 무척 빨라.’
리히트에서는 2달 차 신입 단원이지만, 세상에서 베테랑, 또는 그 이상의 이름으로 불렸던 이들이다.
수천만에 이들의 귀를 홀린 에비게일은 물론, 온 세상 어린아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했던 조지, 등.
그 밖에도 다양한 단원들이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 이상으로 생각한 티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단순히 악보를 펼치고, 음표의 연속을 악기로 재현하는 것을 넘어.
곡 자체에 담긴 이야기를 이해하고 그림을 그리듯 자세하게 연출한다.
이미 연주를 들으면서 머릿속에 선율이 악보로 생겨 나오고, 악보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림을 그려낸다.
‘이제 세상에 선보여도 되겠어.’
마치 오랜 정성으로 빚고, 구워낸 도자기를 내놓듯.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개화>는 내가 생각한 수준의 ‘완성형’에 도달해 있었다.
‘사조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연주.’
처음 오케스트라를 만들었을 때 떠올렸던 생각.
내가 만들어낸 음악적 유산을 사조로써 단원들에게 전달하고, 단원들은 사조에 녹아들어 일체화된 연주를 선보인다.
새로운 단원이 들어와도, 이미 사조에 동화된 단원을 통해 내부적으로 순환하도록.
내가 일일이 가르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선율을 이해하고, 사조를 익혀간다.
더 나아가 완전히 정립된 사조를 단원들이 표현하고, 이를 더 많은 청중들에게 들려준다.
처음 리히트 오케스트라를 만들었을 때 사십 남짓 되는 소규모 인원으로 오케스트라를 만든 이유.
사실 단숨에 화제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100명이 넘는 필하모닉급 오케스트라를 결성하거나, 곧바로 세계 순방 공연을 해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하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사조를 더욱 깊게 녹여내기 위함이었다.
그 덕에 처음 들어왔던 40여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이 완전히 내가 만든 사조를 이해하고, 이를 신입 단원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경지에 오르지 않았던가.
‘심지어 곡도 스스로 만들어보고 말이야.’
<항해>를 만들었을 때처럼, 단원들은 <개화>에 들어갈 만한 저마다의 곡을 만들어냈다.
별다른 지시사항이 없었음에도 단원들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각자 악기에 맞는, 부분에 맞는 선율을 만들어왔다.
게다가 그 수준도 예상 이상이었다.
각자가 만들되, 각자의 사조가 들어가선 안 되고.
악기의 특징은 살리되, 튀면 안 된다.
마치 ‘화려하면서도 수수하게’라는 말처럼 난해한 상태.
통일된 오케스트라 선율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 어려운 작업을 단원들이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머릿속에서 떠오른 악보에서부터 생동감이 넘치지 않았던가.
이전에 <항해>를 만들었을 때보다 더욱 단단하고, 유려하게.
또 그것을 이미지가 떠오를 정도로 세세하게 펼쳤다.
‘이제 무대만 찾으면 되겠어.’
리히트의 진가를 보여줄 수 있는 이 시점.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라 그 면모를 세상에 알려야겠지.
게다가 많은 사람들의 시선도 현재 리히트에 몰려 있었다.
오케스트라 첫 결성 때는 창단 과정을 다큐로 찍은 것과 동시에, 로열 오케스트라 경연에 참여하여 오케스트라를 공개하지 않았던가.
그 여파가 여태 남은 것인지 리히트의 첫 무대가 언제, 어디서 공개될지 궁금하다는 반응이 수없이 많았다.
신입 단원들이 들어온 이후에 치러지는 첫 데뷔전.
그 무대를 만들어줄 사람이 지금 좌석 한편에 앉아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덕분에 좋은 연주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좌석에 앉아있던 사내가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미국 저녁 시간대를 책임지는 파이널쇼의 PD, 제임스였다.
***
제임스는 칼을 갈다시피 마음을 다잡고 한국행을 선택했다.
오로지 이안을 섭외하겠다는 마음으로 홀로 처음 한국에 방문한 것은 물론, 14시간의 비행을 하고는 곧장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홈그라운드로 찾아갔다.
지도에서 본 건물이 가까워질수록 제임스의 가슴 한편이 박동을 더해갔다.
대로에 맞닿아 있는 리드미컬 체임버홀.
회색 벽에 새겨진 동양적인 무늬에 제임스는 감탄을 자아냈다.
화려한 듯하면서도 정적인 공간.
외관만 보아도 기품이 느껴졌다.
하지만, 제임스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연주였다.
‘대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 거지?’
연습 중간에 체임버홀에 들어온 제임스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안의 연주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이안이 수십 명이 연주하는 듯, 그동안 들었던 오케스트라 선율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미 충분히 최고의 연주라고 생각했거늘.
무엇이 부족한지 이안은 단원들에게 ‘다시’라는 말을 반복했다.
이미 이안은 물론, 단원들의 이마에도 땀이 송골하고, 몇몇은 머리카락이 젖을 정도인데.
그 누구도 불평 하나 없이 연주에 임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끝난 후.
제임스는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칠 뻔했다.
연습하는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기에, 가까스로 그는 손을 내려놓았다.
‘몰입력이 장난 아니야.’
섭외를 위해 왔던 자신이 어느덧 곡을 감상하는 청중이 되었지 않았던가.
이안의 지휘는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했고, 유려하면서도 정확했다.
마치 붓을 쥔 채로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음악은 물론, 이안의 손끝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묘한 환상에 빠져드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간이 몇 시간씩 지나있었다.
그 모습에 제임스는 자신의 선택을 다시금 확신했다.
‘반드시. 반드시 섭외한다!’
제임스는 주먹을 꽉 쥔 채 다시금 다짐했다.
이미 유명 TV쇼, 파이널쇼의 PD라는 위치는 머릿속에서 잊은 지 오래였다.
주변에서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이안의 위상에 비하면 견줄 수 없을 테니까.
콧대 높기로 유명한 크리스 방송국장마저 뒷감당은 자신이 할 테니 뭐든 제시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뭘 더 제안해야 이안씨가 받아들일까.’
이미 제임스의 머릿속에는 이안에게 해줄 수 있는 갖가지 것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케스트라 운영을 위해 출연료가 필요하다면 부르는 대로 지급할 생각이었고,
미국 내 클래식 인사들을 초청하여 함께 디너쇼를 여는 것도 생각해보았다.
그 밖에도 콜라보를 통한 앨범 제작, NBJ에서 지원할 수 있는 모든 프로그램 출연권, 등 이안을 섭외하려면 파이널쇼 출연자들에게 주어지는 혜택 그 이상을 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최근에 바빠서 미처 연락을 못 드렸네요. 파이널쇼 출연하겠습니다.”
이렇게 쉽게?
이안의 출연 수락에 제임스는 어리둥절했다.
머릿속에 이안에게 필요할 만한 보상을 수십 개씩 떠올렸거늘.
그것 하나 듣지 않고 곧바로 프로그램에 출연하겠다는 말에 기뻐해야 할지, 허탈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제임스가 그런 생각을 할 시간은 없었다.
이어지는 이안의 제안은 충격 그 자체였으니까.
“저희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원 모두와 출연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예?!”
제임스는 놀라움에 눈만 끔뻑였다.
이안을 섭외하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생각하고 온 상태였다.
모닝쇼 촬영 때도 단원들의 연습을 이유로 이안 혼자 출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았던가.
그때문에 리히트 오케스트라 전신이 아니어도 이안의 단독 출연이라도 따놓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오케스트라 단원 모두를 출연시키고 싶다니.
제임스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졌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야 감사하죠!”
평소답지 않게 격앙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PD는 면밀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항상 이성적으로 상황을 관찰해야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무려 리히트 오케스트라 아닌가.
최근 오디션으로 신입 단원을 받고 여태 한 번도 세상에 선보이지 않은 리히트 오케스트라.
미국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유튜버인 에비게일이 단원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은 제임스는 물론,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그런 리히트의 무대를 올릴 수 있다는 사실.
거기다 이안은 한술 더 떴다.
“파이널쇼에서 저희 오케스트라의 신곡, <개화>를 처음으로 공개하고 싶습니다.”
“첫 공개…!”
담담하게 말하는 이안과 달리, 제임스는 놀라움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이번에 모닝 쇼에서 이안이 피아니스트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대서특필 되지 않았던가.
이안과 친분이 있기로 유명한 빈 필하모닉의 마에스트로는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며 인터뷰를 하기까지 했으니.
그런데 일전에 해왔던 것도 아니고,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곡이란다.
게다가 이안의 눈빛을 본 제임스는 파이널쇼가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오직 무대만 생각하는 눈빛이야.’
지금의 제임스에게 파이널쇼가 가진 명성은 필요 없었다.
이안의 눈을 본 제임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안은 좋은 무대를 찾는 사람이 아닌, 좋은 무대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무대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이안의 말 한마디에 제임스의 신경이 곤두섰다.
이미 이안 혼자가 아닌, 오케스트라 전체가, 그것도 오케스트라의 신곡을 발표하는 무대를 파이널쇼 500회 특집으로 낼 수 있게 됐다.
모닝쇼에서 보여줬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무대를 만들 수 있을 테니,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이대로 진행할 수 있다면 조건이 뭐라 한들 하겠다고.
이안의 조건을 들은 제임스는 놀라움에 입을 떡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