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64화 (164/250)

164화

처음 파이널쇼 출연 소식 밝혔을 때.

단원들은 놀라움과 기대가 반반 섞인 반응을 보였다.

뉴욕에서 공연을 진행할 예정이라는 말과 함께, 파이널쇼에서 메인으로 공개할 것이라는 선언.

특히 외국인 단원들은 파이널쇼의 저력을 더욱 잘 아는지, 놀라다 못해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3대 TV 프로그램 중 하나라며.

미국에서 가장 파급력이 높은 미디어를 꼽으라면 단박에 파이널쇼를 들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신입 단원은 물론, 기존 단원들도 뉴욕행에 저마다 반응을 보였다.

처음 곡을 펼치는 곳이 다름 아닌 뉴욕이라는 것에 긴장 어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미 올림픽 무대에도 섰는데, 어딜 못 가겠냐며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다시금 새로 만들어진 리히트를 처음 공개하는 자리.

데뷔전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사뭇 달라졌다.

“그런 자리이니 더욱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죠.”

내 말에 단원들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연습 일정이 무척 빡빡할 것이라는 선전포고였음에도 누구 하나 싫은 표정을 하는 단원은 없었다.

단원들은 스스로 한 번 더 다짐하는 듯 비장한 눈빛을 보냈다.

“그럼 연습을 시작해보죠.”

한 달 남짓 남은 시간 동안 보다 완벽한 <개화>를 연습하기 연속.

하루 8시간에 이르는 연습 강행군에도 단원들은 악기를 놓지 않았다.

얼굴이 땀범벅이 될 정도로 격한 연습에 연속이었음에도 단원들의 눈빛은 들뜨거나 흥분된 것 없이 되레 차분해졌다.

연습 때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마음 그대로.

연습에 집중한 사이 시간은 속절없이 지나갔다.

어느덧 나를 비롯한 단원들은 NBJ 측에서 제공한 항공편으로 뉴욕으로 향하고 있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제임스 PD가 리히트 오케스트라를 반겼다.

단원들이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호텔 리무진 버스까지 대절한 상태.

호화로운 대우에 나는 제임스에게 감사표를 전했다.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뉴욕행을 택해주시고, 오케스트라 단원 참여까지 먼저 말씀해주셨으니 당연한 거죠.”

그는 내가 해준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도 부족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벌써부터 출연 소식에 사람들의 반응이 뜨겁다고.

미국 대중들의 관심이 벌써부터 파이널쇼로 향하는 것은 물론, 여러 업체에서도 프로그램 전후로 자사의 광고를 넣어달라는 요청이 쇄도한다고 덧붙였다.

오죽하면 광고 비용이 부르는 게 값이 될 정도라고.

“그러니 부담 없이 서비스를 즐기십쇼. 필요한 것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구요.”

뉴욕행 비행기에서 모든 단원들이 비즈니스 석에 앉은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미국에서 이름난 초호화 호텔에 방을 마련해주는 것은 기본.

오케스트라 연습을 할 수 있도록 호텔의 라운지를 통째로 빌렸다고 덧붙였다.

비즈니스석이 한자리에 2백인 것에, 호텔 하루 숙박료만 수백이다.

NBJ의 재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숙소에서 짐을 푼 나는 사전 미팅을 위해 방송사로 향했다.

뉴욕의 중심부에 있는 NBJ 사옥은 여타 뉴욕 건물이 그렇듯, 초고층 빌딩의 위용을 그대로 드러냈다.

올려다봐도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높게 뻗은 창문들, 그 위에 올라가 있는 높은 첨탑까지.

입구에는 방송사의 트레이드마크인 공작새가 장식되어 있었다.

NBJ 방송국.

미국 내 NBJ의 인기를 말하려면 입이 아플 지경이라고.

1930년대에 라디오 방송사를 시작으로, 현재에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방송사로 유명한 곳.

뉴스는 기본, NBJ표 수사 드라마는 바다 건너 한국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게다가 여타 스포츠 독점 중계권을 가지고 있어 미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게 당연할 정도였다.

“국장님께서도 이안씨께 무척 관심을 보이고 계세요.”

내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지 들어주라고 했다던 당사자.

제임스는 방송국 국장이 내게 관심을 가진 덕에 지금까지 모든 지원이 가능했다며 넌지시 국장의 대담함을 어필했다.

나 또한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니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일 터.

그것이 가장 먼저 NBJ 사옥을 찾은 이유였다.

똑똑

“국장님, 제임스입니다.”

제임스가 노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먼저 문을 연 국장이 무척 밝은 표정을 한 채 나를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이안씨. 뉴욕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회색 머리가 성성한 사내.

사내는 호탕한 말투와 함께 안수를 건넸다.

국장의 살가운 반응에 제임스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라고 생각하는 듯 사뭇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그 표정을 가렸다.

“제 소개가 늦었네요. 크리스 버크라고 합니다.”

“박이안입니다. 크리스씨 덕분에 편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제임스가 그랬듯, 크리스도 당치도 않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더 필요한 것이 있었다면 언제든지 지원할 자신이 있다며.

혹 호텔에서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마음껏 룸서비스를 이용하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집무실 중간의 소파로 안내한 크리스는 연이어 기대된다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제임스가 얘기했듯, 광고를 비롯하여 수없이 많은 언론사에서도 NBJ에 문의 전화를 보낸다고.

심지어 여타 방송국에서는 개인적인 연락을 보내 이안과 창구를 마련해줄 수 없겠냐는 제안까지 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우선 이안씨와 오케스트라의 컨디션이 최우선이지 않겠습니까. 필요하시다면 리스트를 드릴 테니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이야기를 하던 크리스는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책상에서 무언가를 가져왔다.

내게도 익숙한 한 권의 책.

베토벤 재단에서 만들었던 내 자작곡 교재였다.

“제 딸아이가 이안씨의 팬입니다. 이안씨가 온다는 소식에 자신도 오겠다며 얼마나 극성을 부렸는지…”

딸이 내 연주를 보고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선언했다고.

평소에는 워낙 변덕이 심하던 딸이 이렇게 하나에 집중해서 무언가를 한 적은 처음이었다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악보에 사인을 해주면 딸에게 무척 큰 선물이 될 것 같다는 말에 나는 곧바로 속지에 사인을 했다.

“고맙습니다. 딸아이가 아주 기뻐할 겁니다.”

교재를 다시금 내려놓은 크리스는 이내 본격적으로 방송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방금까지만 해도 딸 이야기를 하며 살가운 모습을 보였던 크리스였건만.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가 시작되자 눈빛이 살벌하게 변했다.

“이안씨께서 먼저 라이브 요청을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리히트 오케스트라와 함께 간다는 것에 대한 내가 내건 조건.

500화 특집 방송을 라이브로 진행하자는 제안이었다.

평소에 녹화 방송으로 이뤄졌던 ‘파이널쇼’인데다, 이전 특집 방송에서도 한 번도 라이브 방송으로 한 적이 없었기에 그런 것이겠지.

진지하게 묻는 크리스의 뒤에서 사자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거대 방송국인 NBJ를 이끌어가는 크리스의 카리스마.

중압감마저 느껴지는 위용에 제임스도 옅게 몸을 떨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담담하게 내가 할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음악의 진가는 녹음이나 녹화가 아닌, 실제 연주를 마주했을 때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녹화로 진행한다면 실수가 있을 경우 재녹화가 가능하니까 연주에 대한 부담이 줄일 수 있겠지.

하지만, 편집이나 조정이 들어간 음악으로는 오롯이 음악가의 면모를 보여줄 수 없다.

특히 이번 무대는 신입 단원들의 데뷔 무대이기도 했으니까.

그들의 연주를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선 라이브 송출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크리스도 내 말에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에겐 이번 특집이 큰 도전이 될겁니다. 여태껏 오케스트라가 저희 방송에 출연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전례 없는 라이브 송출에, 80여 명이 진행하는 연주.

방송국 입장에서는 상당한 도전이 될 것이 뻔했다.

그럼에도 하는 이유는 그 수장이 나라서, 박이안 단장이라서 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게다가 크리스는 한 마디를 더 거들었다.

“대관도 문제없이 마무리됐습니다. 이안씨의 이름을 듣더니 곧바로 수락하지 뭡니까?”

***

파이널쇼의 리허설를 앞둔 시점.

에비게일은 입을 떡 벌린 채 거대한 오케스트라 홀을 바라봤다.

‘여기서 공연을 하게 될 줄이야.’

‘홀 자체가 악기다.’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카네기홀.

적갈색 사암과 테라코타로 장식된 내부는 르네상스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공간이었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오디토리엄.

명망 높은 음악가들조차 공연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음악가의 꿈, 그 자체인 곳이었다.

게다가 에비게일에게 이번 파이널쇼는 특히 감회가 새로웠다.

“잘 지내셨어요? PD님? 근… 1년 만이죠?”

“그러게요. 에비게일씨를 이렇게 다시 만나네요.”

그녀가 약 3백만 명의 유튜브 구독자를 거느리고 있었을 때.

에비게일은 유튜브를 강타한 독특한 바이올리니스트로 파이널쇼에 출연한 경험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파이널쇼의 저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방송 출연만으로 하루에 수만 명에 이르는 구독자가 생겼고, 지금의 천만 구독자를 달성했다고 과언이 아니니까.

“500화 특집 출연이라니… 현실인데도 믿기지가 않네요.”

에비게일의 입에서 그동안 특집에 나왔던 인물이 고스란히 나왔다.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가수, 만화 원작을 스크린으로 담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헐리우드 영화배우, 등.

영화에 이어 파이널쇼에서 대중 친화적인 면모를 보여 일약 스타덤에 올라간 사람들이었다.

에비게일은 그런 자리에 다시 한번 오를 수 있게 되어 무척 기대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처음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에비게일씨가 오케스트라에 들어간다니.”

이미 엄청난 수의 구독자를 거느리고,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명성도 엄청났지만, 그동안 이뤘던 자신의 음악 대신 이안의 음악을 따른 것이 사뭇 놀랐다고 답했다.

하지만, 에비게일의 입장은 무척 분명했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이 더욱 제대로 된 음악을 하는 기분이에요.”

분명 본래 자신이 하던 것처럼 화려한 안무를 선보이는 것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편곡하는 것도, 주인공이 되는 무대도 아닌데.

이안이 만들어낸 선율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다시 음악을 배우는 기분이 들었다.

불과 몇 달 만에 바이올린의 선율이 자신도 느낄 정도로 명료해지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렇게 선택한 덕에 파이널 쇼에 두 번 출연 하는 사람이 되었네요. 그런 경우는 손에 꼽지 않나요?”

에비게일의 능청스런 물음에 제임스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대 파이널쇼에서 중복 출연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

이전에 출연했던 사람이 다시 출연하는 경우는 무명에서 헐리우드급 성장을 보인 사람 이외에는 없었다.

그것을 이뤘다는 생각에, 에비게일은 무척 자신 있는 미소를 머금었다.

에비게일이 막 단원들이 있는 대기실로 향하려던 찰나.

무대 구성을 보던 에비게일이 제임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PD님! 피아노를 지휘석 쪽으로 조금 더 당겨주시겠어요?”

에비게일의 요청에 제임스는 의문을 표했다.

일반적인 오케스트라 배치를 생각하고 피아노의 위치를 둔 상태.

게다가 지금보다 지휘석으로 당겨지면 이안이 불편할 것이 뻔했다.

“이안씨가 불편하시지 않을까요?”

걱정스레 바라보는 제임스를 향해.

에비게일은 무언가 아는 듯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오히려 단장님이 원하시는 거일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