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65화 (165/250)

165화

6년간 ‘파이널쇼’를 이끌어온 파이 드제너러스.

미국의 저녁을 책임지는 파이널쇼의 쇼호스트이자, 미국에서는 국민 MC로 통하는 사람이었다.

숱한 연극과 시트콤, 등에 출연하며 필모그래피를 쌓고, 지금 파이널쇼라는 개인 토크쇼를 열기까지.

유수의 팬들과 마주한 적도 있고, 연예계에서 상당한 노하우를 쌓았다고 생각했건만.

이번 파이널쇼는 결이 달랐다.

‘이게 대체 몇 명이야?’

총 2,000여명.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방청객 수였다.

평소 방청객에 무려 10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그마저도 방청권 응모에 수십만 명이 몰린 것은 물론, 한순간에 접속자가 폭주하는 바람에 서버가 5번이나 마비되었다.

지금껏 파이널쇼 방청권 응모에 수천 명이 몰린 적은 있었지만, 서버가 마비된 적은 없었기에.

파이는 다시금 이안의 위용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음악가의 꿈인 카네기홀에, 수천에 달하는 관객.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있었다.

‘떨리지도 않는 모양이네.’

파이도 수년간 방송일을 했지만,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익숙해지는 것이지, 아무렇지 않아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더군다나 2천이라는 어마어마한 관중들이 보고 있다면 긴장될 만도 하건만.

단원들의 얼굴에서는 긴장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되레 고고하게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는 듯 펴진 등과 어깨가 그들의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출정할 준비가 된 군인들처럼, 그들의 얼굴에는 비장함까지 묻어난다.

무대 한편에서 스태프가 사인을 보내자 파이는 긴장감을 내려놓고 활짝 웃으며 진행했다.

“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파이널쇼, 500회 특집! 늦은 시간임에도 이곳, 카네기홀에는 직접 함께하기 위해 오신 방청객분들이 계신데요!”

파이의 멘트에 따라 카메라가 방청객들을 비췄다.

빽빽하게 놓인 좌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

각자가 작게 박수를 치는 것만으로도 소리가 모여 거대한 울림이 될 정도였다.

점차 고조되는 분위기에 파이는 곧바로 진행을 이어갔다.

“그럼,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단장, 이번 특집의 주인공이신 박이안씨를 무대 위로 모시겠습니다!”

파이의 말과 함께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스포트라이트가 무대 한편에 비추며 이안에게 길을 만들어주었다.

조명이 만들어준 길을 따라 걸어 나온 이안은 긴말 대신 정중한 인사로 소개를 대신했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오늘 이곳, 파이널쇼에서 최초로 공개하는 신곡, <개화>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최초 공개.

청중들이 한차례 크게 술렁였다.

한창 리히트가 2번째 오디션을 마치고 어디서, 어떤 곡을 연주하느냐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으니까.

파이널쇼에서 신입 단원들을 공개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곡을 공개한다는 말에 카네기홀을 찾은 클래식 팬들이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런 팬들을 향해.

이안은 길게 설명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었다.

Dolce.

연한 피아노 선율에 힘입어 바이올린을 비롯한 현악 선율이 천천히 뒤를 따른다.

마치 봄에 소담하게 틔운 새싹을 보듯.

작은 소리들이 한데 모여 아기자기한 선율을 만들어내자 사람들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담긴다.

기본적이고 간결한 화음을 시작으로 여러 악기가 더해지자 선율은 점차 단단해지고, 풍성해진다.

익히 듣던 대로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선율은 최고였다.

이안과 리히트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지 증명하는 듯.

선율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력이 느껴졌다.

그중 파이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따로 있었다.

‘대체 저걸 어떻게 하는 거지?’

파이의 눈은 이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오케스트라 무대에서 지휘자는 오로지 지휘에만 집중한다.

겉보기엔 단순히 팔을 휘적거리는 것에 그치지 않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작업이 들어가 있다.

악기 소리를 모두 면밀히 관찰해야 하는 것은 기본.

어디에서, 어떤 악기가 강세를 할 것인지, 전체적인 박자를 지시하는 등, 한 번의 손짓에도 많은 의미를 담는 것이 바로 지휘였다.

그런 지휘를.

이안은 한쪽 손을 피아노에 올려둔 채 하고 있었다.

만약 리허설로 리히트의 무대를 확인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곧바로 경악성을 터뜨렸으리라.

“연주를 하면서 지휘를 한다고?!”

파이는 자신도 모르게 리허설을 보면서 육성을 내질렀다.

피아노 앞에 앉은 이안.

이안의 왼손은 요한나와 함께 피아노 선율을 만들어 갔고, 오른손은 단원들에게 지휘를 하고 있었다.

‘저건 천재의 범주를 넘어선 것 아닌가?’

당장 왼손으로는 동그라미를, 오른손으로는 세모를 그리라고 하면 어색한 것이 인간이었다.

그러나 이안은 그러한 상식을 깨부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안의 왼손은 여러 개의 건반을 동시에 누르기도, 이어지는 건반 사이를 현란하게 이동하며 연주를 펼친다.

겉보기에도 다음 선율이 무엇인지 떠올리고 재현하기에 바쁠 텐데.

그 와중에 오른손은 여유롭게 움직이며 단원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파하고 있었다.

높게 뻗은 오른손이 움직일 때마다 단원들이 펼치는 선율이 달라지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소리를 맞춰간다.

게다가 때때로 이안은 지휘를 하던 오른손을 가져와 더욱 화려한 연주를 펼쳤다.

사실상 지휘가 없는 상황일 텐데.

리히트의 단원들은 아무 문제 없다는 듯 평온하게 연주를 이어갔다.

‘저런데도 단원들의 연주가 흔들리지 않다니.’

지휘는 단순히 박자를 알려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마치 거대한 배를 이끄는 선장처럼, 지휘는 모든 악기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중요한 것이었다.

가장 선두에 선 지휘자가 단원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듣고, 문제가 되는 부분을 곧바로 바로 잡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한 곡에 30분이나 되는 교향곡에서 일일이 악보를 볼 수 없으니, 연주가는 지휘를 보고 시작 타이밍을 보거나, 강세의 차이를 더한다.

하지만,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단원은 이안의 손짓이 없어도 흔들림 하나 없었다.

마치 이안의 연주 그 자체, 더 나아가 피아노에 앉아 연주하는 제스처를 지휘 삼아 나아가듯.

리히트의 <개화>는 그렇게 점차 청중들에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왜 제목이 <개화>인지 알 것 같다.’

단순히 화려한 꽃을 형상화하려고 했다면 더욱 강렬한 선율에 ‘만개’라는 제목이 더욱 어울렸을 것이다.

하지만, 리히트의 연주는 아름답게 핀 꽃을 비추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씨앗에서부터 줄기가 나고, 꽃을 펼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 보여주듯.

선율을 더하고 빼가며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괜스레 옛날 생각나네.’

사람들이 <개화>에 서서히 젖어드는 것처럼, 파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연주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했던 파이도 어느덧 묘한 기색에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만든 ‘파이널쇼’.

매주 2회씩, 무려 6년을 한 프로그램에서 몸담았다.

1화를 진행할 때는 방청석도 군데군데 비어서 스태프의 친구나 가족까지 동원하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달려온 6년이란 세월.

이안이 펼친 <개화>는 마치 그 세월을 다시금 보여주는 것 같으면서도 500화 특집을 축하하는 듯 느껴졌다.

마치 씨앗에 불과했던 자신이 지금은 국민 MC라는 이름으로 필 때까지의 과정을 고스란히 돌이켜보는 것처럼.

파이는 가슴 한편에 엉켜있던 실타래가 풀리듯, 연주가 끝났을 때 편안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이안이 만들어낸 선율이고, 리히트의 진가라고.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감상에 빠진 탓에 파이는 하마터면 진행 타이밍을 놓칠 뻔했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무대였던 것 같습니다. 고생하신 박이안 단장님과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위해 박수 부탁드립니다!”

사람들의 환호성에 이어, 파이는 잇따라 인터뷰 질문들을 더했다.

<개화>를 만들게 된 계기나, 생각, 등.

이안의 음악적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이어져 나왔다.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가 음악을 이해하고, 즐길 수 있길 바란다는 말에 파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했다.

“그 철학이 있기에, 지금의 리히트가 있는 모양입니다. 여기 방문해주신 방청객들도 그 증거겠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음악.

그것을 만드는 데 충분히 성공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파이는 칭찬에 이어 프로그램의 진행을 이어갔다.

“그렇게 이안씨를 통해 음악을 더욱 좋아하게 된 분이 있다고합니다. 이안씨를 위해 몰래 온 손님이 계신데요, 사실 저도 누군지 몰라요. 제작진이 한사코 가르쳐주지 않더라고요.”

출연진에게 알리지 않은 채 지인을 초청하여 진행하는 코너, ‘몰래 온 손님’.

평소 같으면 진행을 위해 파이도 누가 출연하는지 알고 있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누가 연락을 보내왔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제임스 PD가 하는 말은 단 하나였다.

“누굴 예상하든, 그 이상일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반쯤 음흉한 미소를 보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제임스가 자신만만한 만큼, 파이도 놀라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었다.

그동안 만난 월드스타가 몇인데.

남들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입을 벌리고 놀란다고 하지만, 파이는 아니었다.

“그럼 몰래온 손님을 한 번 모셔 볼까요?”

파이는 짧게 진행하고는 몸을 뒤쪽으로 돌렸다.

무대의 뒤쪽 벽에 설치된 화면에 불이 켜지고, 이내 사람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한 여인.

여인의 등장에 홀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파이널쇼의 시청자분들, 반갑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드리네요.-

손끝에 주름이 자글하고 백발이 성성한 여인.

파이는 물론,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것이 어려운 사람.

영국 여왕, 빅토리아 2세가 영상 편지로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리히트의 연주를 들으러 어디든 가겠다고 했는데, 건강이 나빠져서 부득이하게 이렇게 연락을 합니다.-

“Impossible.”

“말도 안 돼!”

저마다 술렁이는 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은 물론, 몇몇은 말도 안 된다며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려 영국 여왕이 리히트 오케스트라 출연을 축하하기 영상 편지를 보낸 것이다.

놀라운 것은 여왕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여왕에… 교황?!’

빅토리아 여왕을 시작으로, 교황, 그 이외에 음악적으로 굵직한 행보를 이어갔던 유명인사들이 연이어 스크린에 떠올랐다.

다른 사람으로 화면이 넘어갈 때마다 방청석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누가 나오든 놀라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파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동안 파이널쇼를 진행하면서 숱한 월드스타들을 만나온 파이도 내뱉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뿐이었다.

특히, 마지막에 나온 남성의 모습에.

파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Oh, My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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