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상황실에 있던 제임스는 여러 개의 화면을 보면서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파이,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원, 방청객들까지.
하나같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표정들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기고 있었다.
‘나도 처음엔 깜짝 놀랐지…’
제임스는 아직도 전율이 가시지 않았다.
여왕과 교황을 비롯한 수많은 유명인사들의 영상 편지.
심지어 제임스 PD가 별도로 요청한 것은 한 건도 없었다.
모두 이안이 파이널쇼에 출연한다는 말에 스스로 보내온 영상 편지들.
제임스도 처음 라인업을 보았을 때, 방청객들처럼 연이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중에서 단연 대박인 건…’
제임스는 흘러나오는 영상 편지를 바라봤다.
포마드 스타일의 갈색 머리가 인상적인 남자.
세기의 영화감독, 에드워드 크리스토퍼였다.
에드워드 크리스토퍼.
영화감독이자, 자신의 작품의 각본마저 자신이 쓰는 각본가였다.
특히, 영화에 특수효과를 사용하지 않고 여러 촬영 기법을 사용하기로 유명한 감독이었다.
이미 숱한 영화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기본.
최근 촬영한 두 개의 영화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꿈의 세계에 들어가는 SF 첩보물과, 새로운 지구를 발견하기 위해 블랙홀에 뛰어든다는 내용의 영화는 상업 영화이면서도 적절하게 예술감을 섞었다는 호평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임스를 놀라게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게 아마 에드워드 감독의 첫 방송 출연 아닌가?’
제임스가 몸담고 있는 NBJ를 비롯.
온갖 방송사에서 에드워드에게 인터뷰 요청을 보냈지만, 에드워드는 모든 인터뷰를 반려했다.
흔히 영화감독들이 영화 홍보를 위해 TV 출연을 하는 것과 달리.
에드워드의 철학은 오직 하나였다.
‘영화감독은 영화로 이야기한다.’
영화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담았다고.
그러니, 자신의 설명은 그저 교과서적인 문답밖에 되지 않는다며 거절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철학을 가지고 있기에.
동료 영화감독은 물론, 배우들에게도 인정받는 감독이었다.
더군다나 고집이 무척 세기로 소문이 자자해 촬영장에서도 매섭기로 유명한 감독.
오죽하면 파이널쇼에 출연했던 헐리우드 배우가 ‘에드워드 감독님과의 촬영은 전쟁이나 다름없다.’라고 표현했겠는가.
‘냉혈한’이라는 별명까지 붙은 감독인데…
-이렇게 인사를 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안씨의 지대한 팬이라 이렇게 영상 편지를 찍게 되었습니다.-
영상 속 에드워드는 사뭇 들뜬 듯 옅은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다.
세상 다정하게 영상 속에서 이안과 리히트의 음악을 잘 듣고 있다고 말하는 모습에.
제임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소문을 의심할 정도였다.
***
파이널쇼 500회 특집이 라이브 송출로 끝난 다음 날.
결과 보드를 보는 제임스는 입이 귀에 걸려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국장인 크리스가 제임스가 입사한 이래 웃는 걸 처음 보는 것 같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연이어 고공행진을 보이는 시청률을 보면 절로 표정이 풀릴 수밖에 없었다.
보통 TV프로그램은 재방송을 하면 시청률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개화> 방영분은 되레 시청률이 날이 갈수록 올라갔다.
심지어 <개화> 연주 부분만 편집하여 유튜브 공식 채널에 업로드하자 순식간에 천만 조회수를 넘어섰다.
언론사와 SNS 상에서도 이안의 파이널쇼 무대가 회자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리히트 오케스트라, 파이널쇼 500회 특집에서 신곡, <개화>를 공개!]
[NBJ 크리스 국장, ‘이안의 무대를 담을 수 있어 무척 영광이라고 생각…]
[미국 비평가, ‘이안이 오케스트라를 이끌 수 있었던 이유를 파이널쇼에서 보여줘.’]
하루에도 수십 개에 달하는 기사가 쏟아지는 것은 물론, 이안의 연주에 대해 비평가들의 평도 이었다.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오케스트라를 완전히 통솔하는 것은 이안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끝없는 인기에 힘입어 자연스레 파이널쇼를 담당한 제임스 PD에게도 여러 시선이 몰렸다.
“진짜 선배의 집요한 구석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아무튼 축하해요.”
이안과 다리를 이어준 모닝쇼의 PD, 그래머에 이어 유수의 PD들이 제임스에게 연락을 보내왔다.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이안을 어떻게 섭외했는지, 혹시 만날 수 있진 않는지.
심지어 막대한 보상을 줄 테니 이안과 단원들이 묵고 있는 호텔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러한 제안들을 한사코 거절했다.
어디까지나 무대를 펼치는 것은 이안이고, 그 선택은 이안에게 있어야 하니까.
이미 <개화>의 공개와 개인 무대로 휴식이 없었을 이안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이젠 현실로 돌아와야지.’
이안과의 파이널쇼는 끝났지만, 앞으로 파이널쇼는 나아가야 하니까.
이안이 특별 무대로 바이올린까지 연주해주지 않았던가.
앞으로 더욱 세차게 나아가라는 이안의 뜻을 모르지 않았기에.
제임스가 할 일은 다음에도 이안이 나왔을 때, 이안에게 부끄럽지 않은 위치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다음을 기약하고 이안을 잠깐 내려놓으려던 찰나.
새로운 소식들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PD님!!”
작가 한 명이 다급한 기세로 제임스를 찾아왔다.
“저희 파이널쇼 무대로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그래미어워즈 후보에 올랐대요!”
제임스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미어워즈.
음악가들에게 주어지는 상들 중에서도 무척이나 위상이 높은 상이었다.
가요 뿐만 아니라 클래식과 힙합까지 넓은 장르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래미 어워즈가 무척 보수적이라는 점이었다.
‘동양인 최초 후보일 텐데.’
특히 유럽의 전유물이라고 알려진 클래식이다.
그동안 일본과 중국에서도 뛰어난 음악계 천재들이 나왔지만, 그래미의 문턱을 밟아본 적은 없었다.
있다한들, 서양 오케스트라에 소속된 사람들 동양인이 있는 정도.
이제 생긴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리히트 오케스트라다.
그런 리히트가 그래미어워즈 후보에 올랐다는 것은 이안이 클래식의 관념을 타파함과 동시에 리히트가 그만큼 빼어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런 소식을 놓칠 수 없지.
“그래미 쪽 집중해. 또 다른 소식 나오면 알려주고.”
***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주어진 휴가.
단원들은 저마다 미국에서 어떤 것을 할지 계획을 세웠다.
몇몇은 타임스퀘어를 비롯한 관광지를 돌겠다는 사람도 있고, 일부는 이 기회로 본국에 다녀오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 에비게일을 선두로 한 무리가 내게 다가왔다.
“단장님, 오늘 저희 집에 가서 파티를 하려는데 함께하실래요?”
참, 에비게일은 미국 태생이었지.
그녀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신의 집이 있다고.
단원들과 홈파티를 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에비게일 옆에 있는 서령과 아람, 요한나, 루이사까지 내심 기대하는 눈치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단원들과 이런 자리를 가져본 적도 없네.’
매번 연습과 피드백이 있을 뿐, 회식이나 개인적인 사담을 나눌 기회가 없지 않았던가.
<개화>의 무대도 완벽에 가깝게 마무리했고, VR 전시회와 같은 굵직한 일정도 모두 끝마쳤으니.
“그러죠. 가도록 할까요?”
에비게일의 집은 허드슨강을 낀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미국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저택 스타일의 집.
에비게일은 그동안 거주용이자, 작업실로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이를 증명하듯, 2층 방 전체를 녹음실과 연습실로 꾸며놓은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해봐야겠네요.”
에비게일은 팔까지 걷어붙이고 요리를 선보였다.
다진 고기에 양파를 비롯한 야채와 빵가루를 넣어 오븐에 구운 미트로프.
미국인들의 대표적인 가정식이었다.
“고기엔 와인이 빠질 수 없죠.”
에비게일은 어디선가 레드 와인 한 병을 가져와서 뚜껑을 열었다.
몇 차례 식사와 와인 한 모금이 이어지는 동안.
어느덧 나를 비롯한 단원들은 취기에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연스레, 마치 일상처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견해를 나누는 모습.
함께 동행한 큰아버지는 물론, 단원들도 거리낌 없이 음악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했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즘, 꽤 얼굴이 상기된 서령이 털어놓듯 이야기했다.
“이게 다 단장님 덕이죠. 저는 제대로 음악을 배워볼 기회가 없었거든요.”
서령은 담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픈 눈을 한 채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불우한 형편 때문에 제대로 음악을 배울 수 없었던 시기.
첼로조차 자신의 것을 가질 수 없어서 허름한 첼로를 놓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 차근히 꺼냈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오디션장에 낡은 첼로를 들고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저는 단장님이 무척 감사해요. 제가 음악을 계속할 수 있게 만들어주신 분이니까요.”
서령의 말에 다른 단원들도 차례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나 또한 빈 필하모닉에서 나와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루이사는 테레민으로 오케스트라에 들어올 수 있을 줄은 몰랐다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말에 나는 문득 바이올린을 놓았던 때를 떠올렸다.
“저는 음악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어 피아노를 잡았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피아노가 되었다면 다행이네요.”
나도 그랬듯, 누구나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마주치기 마련이니까.
그것을 이겨내는 방식이 조금 다를 뿐.
내가 전생의 기억을 깨우쳐 삶아 바뀌었듯, 이들에겐 내가 그런 존재가 된 모양이다.
“건배나 할까요?”
에비게일이 평소와는 다른 진중한 기색으로 건배를 제안했다.
와인 잔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연한 선율처럼 들려왔다.
연이어 와인 잔을 기울여서 그럴까, 단원들이 한두 명씩 취한 듯 흐느적거리다 방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에비게일까지 방으로 들어갔을 때.
부엌에 남은 건 나와 큰아버지뿐이었다.
“힘들진 않으세요?”
문득 내가 물어봤다.
단원들이 저마다 사연을 털어놓는 동안 큰아버지는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으니까.
외부의 제안을 일일이 검수하는 것은 물론, 마에스트로의 경험을 되살려 단원들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는 매니저.
스스로 매니저를 자처했던 큰아버지는 매니저 이상의 활동을 보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큰아버지는 답변은 간결했다.
“그닥.”
큰아버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하고는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이번 파이널쇼 출연 이후 미국에서의 활동 제안이 많이 들어왔다고.
나와의 콜라보를 원하는 세계적인 팝스타는 물론, 미다스의 손이라고 불리는 프로듀서까지.
심지어 꿈의 무대라고 일컬어지는 카네기홀에서는 나의 방문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다음에도 기꺼이 오디토리엄을 대관해주겠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어느덧 자리는 앞으로의 향방을 나누는 자리로 변모했다.
앞으로의 연주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찰나.
큰아버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한국 전화인데?”
한국에서 국제 전화로 올 일이 뭐가 있을까.
잠깐 생각을 하던 큰아버지는 전화를 받아들었다.
짧게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큰아버지의 표정이 점차 진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