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첫 정기 연주회인 만큼, 레파토리를 짜는 것도 나의 일이었다.
<항해>와 <조선>, <역사>와 <개화>까지.
이미 리히트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곡이 있었지만, 이번 정기 연주회에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매번 보여주던 것만 보여줄 수는 없으니까.’
정기 연주회의 포문을 여는 자리이다.
그러니 이미 오케스트라로서 면모를 보였던 곡들로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없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한 것.
독주로 펼쳤던 피아노 자작곡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처음 만든 <환생>에 이어, 교황의 행진곡으로 만들었던 <동행>까지.
이미 오케스트라 곡을 만든 경험이 있는 나였건만.
이번 편곡 과정에서 미묘한 감각이 떠올랐다.
‘단순히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를 담아내는 것이 아니도록.’
그동안 나는 오케스트라 곡을 만들 때, 오로지 소리에 집중했다.
악기마다 고유의 소리가 다르고, 그 소리를 펼치는 것이 나의 일이었으니까.
피아노의 안정적인 화음과, 바이올린 특유의 다양한 소리, 등.
다만, 오로지 소리에 치중한 선율이기에.
실제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 조금은 다른 부분이 있었다.
청음과 창작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1년간 단원들의 연주를 일일이 관찰하고, 다시금 소리로 들었으니까.
악기에 대한 공부를 더 하고, 실질적으로 악기가 어떻게 소리를 내는지 확인하자 새로운 시야가 생겼다.
‘악기를 도구처럼 활용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연필, 크레파스, 물감,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듯.
내게는 악기들이 그러한 것이었다.
맑고 청아한 소리를 위해 플루트를, 묵직하고 화려한 선율을 표현하기 위해 피아노를, 급박하고 날카로운 선율을 표현하기 위해 바이올린을 사용한다.
거기에 이번에 새로이 깨달은 생각이 추가된다.
‘그 도구를 어떻게 활용하냐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지지.’
같은 도구를 사용하더라도, 방식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니까.
같은 물감이어도 물감 자체를 바르면 진하고 입체적인 느낌을 줄 수 있고, 물을 섞어 수채화로 그리면 은은한 색감을 더할 수 있듯이.
이제는 어떤 선율을 더하면, 악기의 특이점을 잘 살릴 수 있는지 더욱 확연하게 보인다.
가령 테레민의 반복적인 음은 사뭇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있지만, 더블베이스의 웅장한 선율을 더하면 마치 칼날이 스치는 오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플루트와 오보에의 안정적인 선율에 타악기인 팀파니가 빠르고 느린 울림을 더하면 관악기의 선율은 변하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곡의 뉘앙스를 바꿀 수 있다.
각 악기가 가진 특색을 조합하고, 내 의지대로 의미를 더하는 것.
마치 의미를 잃었던 바이올린 연주에도 의미를 불어넣는 것과 같았다.
악기들에서 묻어나오는 선율을 더욱 이해하고 나아갔기에.
가상의 악보에는 차근차근 각 악기의 특징이 더해진 선율이 맺혔다.
마치 모든 악기를 일일이 연주해보고 악보에 담아둔 것처럼.
어느덧 9개의 곡이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재탄생했다.
“이것이 이번 정기 연주회에 연주할 곡들입니다.”
기존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곡, 4곡과 자작곡에서 협주곡으로 바꾼 곡 4곡.
도합 8개의 곡이 단원들의 손에서 다시금 꽃 핀다.
나의 첫 자작곡, <환생>은 수많은 악기가 한데 모여 나와 전생의 기억이 느꼈던 혼란을 표현했다.
큰아버지의 인생을 담았던 <염라>는 음악이 덧대어져 고독함과 오케스트라를 맡은 책임감이 더욱 부각되고.
베토벤이 죽음을 맞닥뜨리는 <조우>는 여운이 남는 가야금의 음색에 더욱 서글퍼진다.
교황의 행진곡으로 사용된 <동행> 또한, 이제는 피아노가 아닌 여러 악기들이 동시에, 교황을 따라 함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형상화한다.
피아노로 쳤던 자작곡들이 이제는 리히트라는 거대한 악기에 의해 재탄생되는 순간이었다.
***
14시간에 걸친 한국행.
리드미컬 체임버홀에 들어온 배런은 연이어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제대로 된 평론을 위해 보다 면밀하게 리히트의 연주를 분석하려고 왔는데.
자꾸만 분석이 아닌, 감상에 젖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대체 이 카리스마는…’
지휘를 이어가는 이안의 모습은 ‘젊은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감상하는 자신마저 압도하는 묘한 기운.
거기에 온전히 선율을 펼치는 단원들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아까는 분명 흔한 청년이었는데.’
처음 이안을 만나기 전, 배런은 그가 무척 권위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동안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펼친 연주는 완벽 그 자체였으니까.
데뷔로 나선 로얄 오케스트라 경연에서 1위를 거머쥐는 것은 물론, 올림픽 무대에도 오를 정도의 실력.
그 실력을 만들기 위해 단원들의 재능을 쥐어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의심을 하기엔 단원들 사이 분위기는 무척 화기애애했다.
단장인 이안에게 편하게 질문을 하는가 하면, 이안도 차근히 듣고는 조언이 필요할 때는 간결한 조언을 더했다.
허물없이 지내는 이안의 모습은 단장이 아닌, 단원이라고 해도 자연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연습을 시작하겠다는 말과 함께 모두 돌변해서 엄청난 연주를 보이고 있으니.
협주를 지켜보는 배런의 손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게다가 이걸 모두 혼자 작업했다고?’
배런의 손에는 이안이 건넨 자작곡 악보가 들려있었다.
독주곡으로 펼쳤던 것을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으로 바꾼 악보들.
음악에 조예가 깊은 배런이 보기에도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독특한 악기 구성으로도 유명하지 않은가.
그 탓에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악보는 다른 오케스트라와 달리 악기를 나타낸 오선지가 많았다.
바이올린, 플루트, 등 많아봤자 5개인데,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악보는 각 악기를 표현한 오선지만 10줄이 넘었다.
‘저 나이에 저런 내공이 나올 수 있나?’
일찍이 이안이 천재적인 음악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22살의 나이에 무려 10가지가 넘는 악기의 악보를 쓸 수 있다니.
게다가 편곡과 작곡은 악기의 특이점을 모두 깨닫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걸 만드는 이안씨도 이안씨지만… 단원들도…’
분명 연습을 들어갈 때 첫 연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몇 번 연주를 거듭하던 단원들의 연주는 이미 완성형에 가까워져 있었다.
이대로 녹음해서 그라모폰 어워드에 제출하면 단번에 올해의 레코드에 오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생길 정도였다.
이윽고 연습이 끝나고.
이안이 배런에게 다가왔다.
배런은 곧바로 다시금 허리 숙여 취재 허락에 대해 감사표를 전했다.
“방문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습에 방해가 된 것은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그저 평소대로 연습했으니 걱정 마세요.”
평소대로?
그 짧은 마디에 배런은 뒷목이 서늘해졌다.
평소에도 이런 강렬한 선율을 연주한단 말인가.
4시간에 걸친 연주는 당장 연주회를 개최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배런은 기자로서 심장이 자꾸만 쿵쾅댔지만, 자신은 평론가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는 말도 보통 생각으로 나올 수 없단 말이지.’
인터뷰를 하는 내내 배런은 자신보다 나이 많은 거장과 대화하는 것 같았다.
특히 이안의 깊은 견해를 묻고 싶어 다소 어려운 질문도 많이 했는데.
이안은 배런의 말을 곧장 알아듣고 그 이상의 철학을 내려놓았다.
어느덧, 평론을 쓰기 위해 왔던 배런은 이안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평론에 활용할 만한 충분한 대화를 나눴다고 판단한 배런은 마무리를 준비했다.
“혹시 더 말씀하고 싶은 것 있습니까?”
취재를 하면 일상적으로, 편안하게 던지는 말이었다.
대부분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넘어가는 대목인데.
이안은 배런의 물음을 예측이라도 한 듯,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이제 곧 리히트 오케스트라 1주년 기념입니다.”
단순히 1주년 기념이라고만 한 것뿐인데.
배런의 몸이 절로 멈췄다.
과거부터 몸에 박힌 기자로서 본능이 무언가 큰 것이 올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한국의 새로운 오케스트라 홀에서 첫 정기 연주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이안의 말에 배런은 경악성을 터뜨릴 뻔했다.
첫 정기 연주회라니.
지금껏 정기 연주회를 진행하지 않은 리히트가 처음으로 정기 연주회를 한다는 소식이었다.
이미 언론계에서도 리히트가 언제 정기 연주회를 할지 가늠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그 소식을 가장 먼저 접했다는 것에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설마 이것 때문에 허락을?’
평론 하나에 베스트 셀러를 만들 수 있는 위용을 가진 배런이건만.
이미 클래식계 정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안에게 자신이 필요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평론에 대한 취재를 허락한 이유.
뉴욕 타임스의 파급력을 활용하려는 이안의 면모에 배런은 다시금 경외감 어린 시선으로 이안을 쳐다봤다.
***
‘단장님 잠은 주무시고 작업하시는 거겠지?
오죽하면 단원들 사이에서 이안이 뱀파이어라 잠을 자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이니.
게다가 이안이 만든 곡은 연주가조차 홀릴 정도로 무척 매혹적이었다.
이번 <개화>의 선율도 놀라웠는데.
그동안 독주로 펼쳤던 곡을 새로이 편곡한 협주곡은 그저 놀랍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환생>과 <염라>, <조우>, <동행>까지.
이안이 펼쳤던 곡을 고스란히 첼로로 연출할 수 있다는 것에 서령은 절로 벅차오름을 느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령을 묘하게 아쉽게 하는 곡이 하나 있었다.
<조우>
베토벤의 미완성곡을 완성시킨 것으로 세상에 알려진 곡이었다.
완전히 정형화된 고전 음악의 체계가 정립된 선율.
하지만, 형식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안의 능력은 이미 고전을 현대 형식으로 그대로 재현하는데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미세한 소리의 차이가 발목을 잡았다.
‘조금만 더 확연한 애잔함이 들어가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이미 완성된 <조우>도 충분히 좋았다.
하지만, 서령의 귓가에서는 아주 조금, 티끌만 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마치 귀가 먼 베토벤이 음악을 만들면서 환희를 느끼면서도, 그가 인간이었다면 아쉬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테니까.
인간의 복합적인 감정을 완벽하게 재현하려면 무언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안은 그것을 고스란히 펼치기 위해 가야금을 사용했다.
미련이 남은 듯 은은하게 펼치는 가야금 특유의 소리.
거기에 25개의 현으로 다양하게 낼 수 있는 음색이 <조우>에 접목되자 베토벤의 서글픔을 나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씩 비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가야금의 화려한 독주가 이어지는 부분.
선화의 연주는 <조우>에 담긴 베토벤의 감정을 가야금을 표현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독주만으로는 죽음에 맞닥뜨린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가야금을 연주할 수 있는 단원이 한 명만 더 있었으면…’
하지만, 리히트에서 가야금을 원활하게 켤 수 있는 사람은 선화가 유일했다.
그렇다고 지금 새 단원을 영입하는 것도 어불성설.
리히트 오케스트라에 들어오고 싶은 사람은 줄을 이을 정도로 많지만, 들어온다 한들 리히트의 사조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까.
현실적인 무리인 부분은 피할 수 없었다.
서령은 <조우>의 연습이 끝나고 악보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안의 모습을 발견했다.
‘단장님도 이미 눈치채고 계셨구나.’
이안이라면 단원인 자신이 느끼기 이전부터 알고 있었으리라.
그걸 방증하듯, 이안은 선화와 꽤 오랫동안 대화를 하고 있었다.
무언가 부탁하는 듯 이야기를 이어가는 두 사람.
거리가 멀어 어떤 얘기를 하는지 들을 순 없었지만, 이안의 말에 선화가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계신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