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첫 정기 연주회.
일전에 여러 무대에서 활약상을 펼쳤던 리히트였건만.
정기 연주회에서 선보이는 곡은 또 다른 매력을 자랑했다.
특히, 이안의 지대한 팬이자, 이제는 그를 따라가려고 행동하는 거장이 보는 이안의 무대는 남달랐다.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장, 레오 앤더슨.
그가 오랜만에 이안을 보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자신의 곡을 저렇게 재창조시킬 줄이야.’
이미 레오에게 이안의 곡들은 하나의 교과서나 마찬가지였다.
골백번은 더 들어 연주해보라고 하면 연주할 수 있고, 종이와 펜만 쥐여준다면 전체 악보를 써 내려갈 수 있을 정도다.
일전에 이안의 계보를 이어가려고 했던 것인데.
이안을 따라잡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고개를 들어보면, 이안은 저 멀리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자신이 이안의 나이 때는 지휘를 공부하기 바빴는데.
지휘를 넘어 음악 자체를 건드는 이안의 행보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심지어 악기가 저렇게 다양하다니.’
본래 오케스트라에는 악기 제한이 없지만, 오랫동안 전통처럼 유지되는 악기의 구성이 있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포함한 바이올린부, 플루트를 비롯한 금관악기, 그밖에 목관악기와 타악기까지.
하지만,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그러한 관습을 완전히 깨버린 악기들의 배치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소리는 전혀 걸리적거림이 없다.
특히 레오의 눈을 사로잡은 악기는 바로 가야금이었다.
무려 25개에 이르는 현을 가진 가야금.
심혈을 기울여 가야금을 연주하는 선화의 모습에 레오는 혀를 찰 지경이었다.
‘참으로 독특한 선율이로다.’
서양 현악기는 대부분 활을 밀거나 하여 부드럽게 소리를 내는 것이 특징이다.
튕기는 현악기인 하프도 페달을 활용하여 거친 소리보다는 은은한 소리를 내는 데 쓰였으니까.
하지만, 가야금을 비롯한 거문고는 같은 현악기임에도 독특한 음색을 자랑했다.
마치 굳은 의지를 담은 것 같으면서도, 현을 누르며 은은한 끌림을 자랑하는 선율.
인간의 심리를 가득 담은 <조우>를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가야금의 진가는 다른 곳에서 드러났다.
<조우>를 시작하기 직전.
중간 즈음에 앉아있던 선화가 가야금을 이끌고 무대의 앞으로 다가왔다.
스태프가 가져온 것은 보랏빛 천으로 꽁꽁 감싸진 무언가였다.
선화가 부드러운 손길로 천을 풀어내자 그 속에는 또 다른 가야금이 모습을 드러냈다.
‘굉장히 낡아 보이는데.’
먼 곳에서 보는데도 선화가 사용하던 것과 빛깔 차이가 많이 났다.
어둡게 변색된 나무와 칠이 희미해진 장식들.
하지만, 선화가 꺼내든 가야금은 오래되었다기보다는 고풍스러운 멋을 자랑했다.
그리고 두 가야금을 ㄱ자로 두는 모습에서 레오가 두 눈을 의심했다.
‘저 두 개를 설마?’
레오가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선화의 두 손이 각 가야금 현을 뜯었다.
많게는 6개에 이르는 현을 뜯자, 그에 상응하는 음들이 오묘한 화음을 만들며 선율의 포문을 열었다.
경악스런 광경에 레오는 물론, 다른 외국인 관객들도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프도 저 정도는 아니거늘!’
서양 악기 중 가장 현이 많은 악기, 하프.
총 47개의 현은 물론, 조금만 현을 잘못 뜯거나 페달을 밟지 못하면 우아한 선율이 망가져서 다루기 무척 힘든 악기였다.
하지만, 선화가 펼치는 연주는 무려 50개의 현으로 펼치는 연주.
그것도 두 개의 악기를 동시에 사용하는지라 오로지 손의 감각에 의존하여 현을 뜯어야 했다.
동시에 현을 뜯어 다채로운 화음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가끔은 손을 옮겨와 진한 끌림음을 만들어낸다.
한복 특유의 긴 소매가 흔들리는 것과 두 개의 가야금에서 묘령의 선율을 펼치자 <조우>의 분위기가 무척 우아해졌다.
‘이것들을 대체 어떻게 조합할 생각을 한 거지?’
레오는 연주회 내내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분명 서양 악기와 한국 악기는 다른 점이 수도 없이 많을 텐데.
당장 들려오는 소리만 해도 어떻게 섞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은 그 의문에 답을 제시하듯, 오케스트라를 배치하여 유려한 선율을 펼쳐냈다.
때론 서로 소리를 합쳐서, 때론 경쟁하듯 소리를 맞붙여서.
‘내게 저 악기들이 주어졌다면 나도 저리할 수 있었을까.’
아마 시도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겠지.
빈 필하모닉은 전통적인 선율을 재현해내는데 바빴으니까.
하지만, 이안의 연주, 리히트의 선율을 바라보니 그동안 했던 것이 큰 과오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존의 것을 답습하기보다는, 자신만의 것을 만들어가는 과정.
그것이 두 개의 가야금을 켜는 사람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객관적으로 음악을 분석하기 바빴던 레오였건만.
오늘 하루만큼, 레오는 온전히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 눈을 감고 빙긋 웃었다.
그저 연주에 흐름에 몸을 맡기고 감상하기 반복할 뿐.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었다.
리히트가 선보인 음악이 아직도 레오의 머릿속에 감돈다는 것.
마치 과거의 사진을 꺼내보듯, 떠올리면 자연스레 귓가에 리히트가 만들어내는 선율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이윽고 이안이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있다는 멘트를 던졌다.
“이제 저희 정기 연주회에 마지막 무대를 남겨놓고 있습니다.”
이안의 말에 사람들이 아쉬움 어린 탄식을 보냈다.
레오 또한 옅은 탄식을 내뱉었다.
본래 클래식 무대 에티켓에서는 관객이 소리를 내는 것은 무척 무례한 행동이거늘.
그럼에도 남녀노소, 한국인과 외국인을 넘어 모든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아쉬운 목소리를 내었다.
“첫 정기 연주회에 와주신 여러분을 위해 제가 약소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선물?’
이안의 말에 레오의 눈이 커졌다.
이미 선물에 가까운 선율을 보여주었던 이안 아닌가.
그럼에도 선물이 남았다는 말에 관심이 집중됐다.
“마지막 무대로 제 독주를 보여드리고 막을 내리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박수를 먼저 보내왔다.
아직 어떤 곡을, 어떤 무대를 보여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무엇이든 좋다는 의사를 표명하듯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그럼, 소리에 집중해주시기 바랍니다.”
알 수 없는 의미를 한 말을 하곤 이안이 무대 한편에 놓인 피아노로 향했다.
잠깐 손을 풀고 연주를 이어가기 직전.
시작하려는 듯 이안이 손을 튕겼다.
그 순간.
“뭐야?”
레오는 자신도 모르게 육성을 터뜨렸다.
이안의 손이 튕겨짐과 동시에 오케스트라 홀 전체의 조명이 꺼진 것이다.
완전히 암흑으로 물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
사람들이 혼란에 술렁이던 사이, 그 사이를 비집고 피아노 선율이 들려왔다.
마치 피리부는 사나이가 피리를 불듯.
객석의 술렁임이 순식간에 멎었다.
‘이 상황에서 연주를 한단 말인가?’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뒤통수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암흑이었다.
악보는커녕, 피아노 건반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인데.
이안의 연주는 거침이 없었다.
모두가 만들었던 오케스트라 곡, <개화>가 이안의 독주로 재탄생하고 있었다.
이어지는 선율에 레오는 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마치 VR을 봤을 때 같군.’
정기 연주회 전날, 레오는 서울 DDP에서 진행하는 이안의 VR 전시관을 다녀왔었다.
기기를 썼을 때 귓가에 울리는 선율과 눈앞에 보이는 환상과 같은 움직임.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한 기기가 없음에도 묘한 그림이 펼쳐지는 착각이 일렁였다.
‘하나의 꽃이 자라는 과정을 그린 것 같다.’
첫 시작은 간결하고 얕은 화음이었다.
땅에서 움트는 생명력을 보여주듯, 튀어나오는 불협화음이 오묘하게 심장을 공명시켰다.
새싹에 불과했던 식물이 줄기를 뻗어 이파리를 펼치듯 선율이 더해지자 묘한 간질거림이 레오의 감정을 자극했다.
어둠에 잠긴 무대에 스포트라이트가 내려오고, 그 작은 공간에서 새싹이 튀어나오는 착각.
어느덧 선율이 더해지며 꽃망울이 떠오르자 레오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강렬한 화음의 연속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꽃이 활짝 피는 상상이 레오의 뇌리를 스쳤다.
그제야 레오는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마치 꿈을 꾸듯 벌어진 일에 연주가 끝난 후에도 레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가능한 일이야?’
이윽고 불이 켜졌을 때. 레오는 가장 먼저 주변을 살폈다.
자신의 옆 사람도, 뒷사람도.
모두 똑같은 환상을 본 듯, 똑같은 눈빛으로 놀라워하고 있었다.
레오 또한 그들과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본인만 몰랐다.
모두 경악스러워 움직이지도 못하는 때.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건네자 겨우 사람들이 기립 박수를 보냈다.
***
어느덧 연주회가 끝날 무렵.
꽤 시간이 지나 오케스트라 홀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빠져나간 후였다.
하지만, 한 여인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아직도 여인은 무대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뛰어난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선율은 물론, 마지막 이안이 보여줬던 신묘한 연주까지.
뮤지컬 감독으로 어연 20년에 있던 그녀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니콜라의 이름을 걸고, 그를 섭외해보겠어.’
니콜라 잰슨.
그녀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전설로 불리는 뮤지컬 감독이었다.
수십 마리 버려진 강아지들의 서글픈 인생을 담은 뮤지컬과, 파리의 꼽추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이 모두 그녀의 작품이었다.
숱한 상을 거머쥐는 것은 물론, 뮤지컬이 전 세계로 수출되기까지.
그런 거장이 이안을 찾아온 것이다.
‘그때 눈도장을 찍어놓기 잘했지.’
사실 그녀가 이안을 본 것은 오래전부터였다.
마법처럼 곡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 피아노로 온갖 선율을 창조해나간다는 평을 받는 인물.
그런 인물을 록펠러 센터 광장에서 보게 될 줄은 무척 뜻밖이었다.
하지만, 그 동시에 이안의 천재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무대였다.
웃음으로 가득했던 <서울 패션>을 고스란히 재현하면서도 그만의 기품을 느낄 수 있었던 연주.
괜히 모닝쇼의 그래퍼 PD에게 개인적인 연락을 보내 만찬회에 참석한 것이 아니었다.
슬슬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백스테이지로 향하면 이안을 만날 수 있을 거란 확신에.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니콜라 이외에도 이안을 찾아온 손님이 하나 더 있었다.
‘저 녀석도 왔어?’
먼 이국 땅에 왔지만, 사촌의 얼굴을 모를 리 없었다.
홀랜트 페리.
‘뮤지컬 세계에는 니콜라가 있다면, 오페라 세계에서는 홀랜트가 있다’는 말의 주인공이었다.
같은 명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물론, 학교도 거의 같은 루트로 나아갔다.
다르다면, 니콜라가 뮤지컬을 전공하는 동안, 홀랜트는 오페라를 전공했다는 점.
전혀 다른 장르임에도, 비슷하다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 두 사람은 항상 비교되기 마련이었다.
홀랜트는 벌써부터 이안의 앞에서 연주가 압도적이었다느니,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며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그 사이에 니콜라가 끼어들었다.
“이안씨, 만찬회 때 뵙고 다시 뵙네요.”
니콜라의 등장에 이안은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홀랜트는 니콜라를 보자마자 짜증스런 눈빛을 보냈다.
항상 라이벌로 비교되던 인물을 마주했으니 당연할 수밖에.
“니콜라, 너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지난번에 연주회가 있으면 가겠다고 했거든. 안 그렇습니까 단장님?”
니콜라가 능청스레 만찬회 때 친분을 은근슬쩍 들이밀었다.
이를 들은 홀랜트는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다시금 표정을 풀고 여유롭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랬구나. 나는 이안씨와 내 다음 작품 이야기를 좀 했어. 주인공이 피아니스트라 조언이 필요했거든.”
니콜라도 홀랜트가 이번에 새로운 오페라를 쓰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벌써부터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홀랜트가 5년이나 갈고 닦은 희곡이라며, 제대로 된 음악을 만들려는 시도가 보인다고 기대평을 늘어놓고 있던 타이밍.
그러나 신작을 준비 중인 건 홀랜트뿐이 아니었다.
“어머 그렇구나. 나도 이번 뮤지컬에 피아노가 중점적으로 사용될 거라. 이안씨와 많은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지. 지금이라도 가능할까요, 단장님?”
두 사람이 일제히 이안을 쳐다봤다.
뮤지컬 거장과 오페라 거장.
일반인이라면 어느 쪽에 손을 내밀지 고민해야 할 거물들이었건만.
이안은 두 사람을 한참 바라보기만 했다.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은 혈전이 이어지던 찰나.
이안이 끝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