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정기 연주회를 끝내고 한 달가량이 지났다.
뉴욕 타임스를 시작으로 번져 나간 정기 연주회 소식은 클래식계를 강타했다며 여러 기사들이 쏟아져나왔다.
[리히트, 박이안의 독주곡을 협주곡으로 재탄생 시킨 무대를 선보여…]
[티켓 오픈 58초 만에 매진, 박이안의 가능성은 어디까지인가!]
[뉴욕 타임스, ‘이안의 음악은 마르지 않는 우물과 같다’라고 표현해…]
문예부 장관, 홍식도 내게 다시금 연락을 건네 너스레를 떨었다.
벌써부터 유수의 오케스트라나 공연 업계에서 연락이 들어오고 있다고.
새로운 오케스트라 홀의 위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물론, 그 우수한 설계를 고스란히 보여준 무대라고 덧붙였다.
또한, 꼭 내 무대를 감상하겠다던 사람도 내게 연락을 보내왔다.
-이번에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네요. 미안합니다 이안씨.-
영국의 빅토리아 2세 여왕.
파이널쇼를 비롯해 이번 정기 연주회까지.
새로운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무대를 꼭 보러 가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괜찮습니다. 이번에 영국 왕립음악대학 관련으로도 많이 바쁘시지 않습니까.”
Royal College of Music.
영국 왕세자, 에드워드 7세가 건립한 왕립음악대학.
1882년에 건립되어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었다.
최근 140주년을 맞아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문득, 소식을 묻는 내 말에 여왕이 얕은 숨을 삼키는 것이 들려왔다.
무언가 망설이는 듯한 소리에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여왕님께서 괜찮으시다면 그 무대에서 연주를 해도 되겠습니까?”
내 말에 여왕의 걱정 어린 숨결이 한층 가벼워졌다.
무척 편안해진 듯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사실 무척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리히트가 와준다면 모든 학생에게 귀감이 될 테니까요.-
먼저 제안을 해줘서 고맙다며.
이미 굵직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리히트의 발목을 붙잡는 것 아닌가 걱정했다고 덧붙였다.
여왕인 자신이 누군가를 얽매고 싶지 않다는 겸손까지.
부드러워진 목소리에서 강직한 여왕의 신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내게도 좋은 무대이니까.’
명실상부 영국 음악 교육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왕립대학이다.
유수의 인재들에게 리히트가 가진 사조를 직접 전파할 수 있는 무대.
학생들에게 앞으로 내가, 리히트가 추구하는 사조에 눈뜨게 만들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게다가 이미 영국 일정도 잡혀있었으니까.’
달력을 보니 140주년 기념행사와 이미 정해진 영국 일정과 겹쳐있었다.
영국에서 날아온 또 다른 연락.
그것은 바로 초청장이었다.
[Invitation for Ian Park.]
[귀하를 제59회 그라모폰 어워드에 초대합니다.]
[부디 자리에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923년 창간된 영국 월간지, ‘그라모폰’.
매년 9월 진행하는 ‘그라모폰 어워드’는 그래미 어워드와 국제 클래식 음악상과 더불어 가장 위상이 높은 클래식 어워드였다.
이번에 ‘올해의 오케스트라상’ 후보군에 올랐다는 말에 온 초청장.
상을 수상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유수의 오케스트라 단장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은 무척 좋은 기회였다.
‘구두로 사조를 펼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겠지.’
큰아버지에게 온 제안 중에서는 여러 오케스트라가 심층적인 대화를 하고 싶다는 것도 있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에서 나오는 아우라를 배우고 싶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케스트라에 가르침을 달라는 곳도 있기도 했다.
신생 오케스트라뿐만 아니라, 수년간의 명망을 자랑하는 거대 오케스트라도 있었기에.
마에스트로들이 모이는 그라모폰 어워드면 그러한 제안들을 단번에 해소할 수 있으리라.
‘그럼 나도 준비를 해야겠지.’
이미 마에스트로들에게 어떤 말을 할지는 머릿속에 정리된 지 오래.
이제 왕립음악대학에서의 무대를 어떤 곡으로 채울지 고민해야 할 차례다.
***
이안의 손에서 재탄생된 협주곡 버전의 <영감>이 영국 왕립음대의 강당을 가득 메운다.
서양 악기와 한국 악기의 조화.
사람들의 심상을 표현했던 선율이 보다 다양한 악기들로 표현되어 뻗어나간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화음들이 모여 또 다른 선율을 만들어내고, 분위기를 비트는 불협화음마저 의도적으로 활용한 것이 여지없이 느껴진다.
자리에 참석한 학생들이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려다가 숨을 참았다.
이윽고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끝나자, 이안이 마이크를 잡았다.
“오랜 역사 동안 음악을 수학하고 계신 학생분들. 기존의 것을 답습함과 동시에 자신의 음악을 하시길 바랍니다.”
이어진 시간은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하는 교습 시간이었다.
기념 연주회에 이어 작은 이벤트로 준비한 강의.
이안이 피아노를 맡는 동안, 다른 단원들은 제각기 전공 악기를 다루는 학생들을 마주했다.
그중 서령이 맡은 것은 첼로.
그녀는 첼로를 수학하고 있는 학생들의 연주를 차근히 듣고 이에 한 마디씩을 건넸다.
“가장 기본 적인 소리는 자세에서 나옵니다. 특히 현의 방향에 따라서 소리의 차이가 크게 나죠. 어깨에 힘을 풀고 하단에서 상단으로 현을 그어보세요.”
교과서적으로 나오는 문답뿐만 아니라, 서령이 스스로 체득한 것까지 고스란히 나온다.
서령의 코멘트가 더해지자 학생들이 내는 소리가 시시각각 변화했다.
몇몇은 사소하게, 몇몇은 눈에 띄게 소리가 변화하자 학생들의 눈이 커지다 못해 입까지 떡 벌어졌다.
“혹시 연습을 얼마나 하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기본 적으로 단체 연습을 8시간가량 합니다. 그리고 개인 연습실에 저마다 연습을 하는데, 저는 5시간가량 하는 것 같네요.”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경지인가.
아무리 앉아서 연주를 하는 것이라지만, 연주도 꽤나 큰 체력이 소모된다.
특히 첼로는 7kg에 달하는 무게를 버티면서 팔과 손의 세심한 감각으로 소리를 표현해야 하기에.
첼로 연주가는 다른 악기 연주가들에 비해 더 큰 체력을 요구했다.
그런 첼로 연주를 13시간가량 한다니.
하지만, 동시에 학생들은 그 정도 연습을 해야 리히트에서 버틸 수 있음을 직감했다.
“그렇게 하면 정확하게 소리를 짚을 수 있습니까?”
이미 자세는 물론, 아주 사소한 선율의 차이도 눈치챈 서령 아닌가.
아무리 시범 삼아 짧게 연주한 것이라도.
그 속에 담긴 선율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물론, 학생 개인의 특이점과 문제점을 모두 짚는 솜씨는 가히 오래된 숙련자를 보는 것 같았다.
무척 엄숙하고 기대 어린 시선에.
서령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짧게 대답했다.
“단장님과 리히트에서 끊임없이 음악을 탐구하면 가능합니다.”
***
영국 위그모어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리 잡은 소극장은 고고한 자태를 머금고 있었다.
하얀 대리석 벽면과 그 위에 얹은 황금 촛대가 그 분위기를 더욱 가중시킨다.
“리히트 오케스트라. 그대들의 곡에 무척 관심이 갑니다.”
“<개화>의 선율은 대단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단장인 이안씨가 오케스트라와 완전히 하나가 된 것 같습니다.”
“리히트의 특색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무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입구에 들어서서부터 숱한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를 비롯해 명망 높은 음악가들이 다가와 한마디씩 말을 붙였다.
개중에는 내게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요청한 사람도 있었다.
대거 그라모폰 어워드에 초청된 사람들.
후보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클래식의 한 줄기를 장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었다.
굵직한 오케스트라 수장들과 이름난 연주가.
그럼에도 그들은 내게 의견을 묻고 싶다고 찾아온 것이다.
-곧 시상식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내빈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연이어 문답을 나누던 사이, 어느덧 시상식 시작을 앞두고 있었다.
역사만 100년이 넘는 음악 잡지사.
매년 열리는 어워드는 59년째 건재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상을 받는 기준도 무척 엄격한 것으로 유명한 그라모폰 어워드.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단원들은 처음 후보에 올랐다는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건 처음이네요. 제가 빈 필에 있을 때도 한 번 받아봤는데 말이죠.”
시상식장에 동행한 요한나가 대단하다며 얕은 탄성을 내뱉었다.
수년간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닉에 몸담았던 요한나건만.
그녀도 빈 필에 있는 동안 그라모폰 어워드를 받은 적은 단 한 번이었다고 덧붙였다.
빈 필을 비롯하여 네덜란드 콘체르테, 런던 필 등 유수의 오케스트라가 경쟁자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거물들의 대전에 이제 1년 차가 된 리히트가 들어온 것은 숱한 오케스트라가 걸어온 세월을 일찍이 뛰어넘은 덕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후보들도 무척 굵직한 오케스트라였지.’
올해를 가장 빛낸 오케스트라에게 주는 ‘올해의 오케스트라상’.
그 후보도 무척 쟁쟁한 사람들의 연속이었다.
뉴욕 오페라 무대를 주름잡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대중 오케스트라에 힘썼다는 뮌헨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독일의 명망 높은 오케스트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도 후보에 올랐다.
후보군을 들은 요한나도 혀를 찰 지경이었다.
“정말 누가 받아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들이네요.”
나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에 대해선 전문가인 요한나가 하는 평가다.
올해 오케스트라를 빛낸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교향악단.
나 또한 그들의 업적을 잘 알고 있었다.
유수의 앨범을 낸 것은 물론, 후보에 오른 세 관현악단은 국내에서도 회자될 정도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오케스트라였으니까.
“지금부터 제59회 그라모폰 어워드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엄숙한 선언에 이어 수차례 수상자들이 이름을 올렸다.
올해의 앨범상에 오른 현악 4중주 팀부터, 피아노와 가곡, 합창과 기악 등 여러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이 나와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올해를 빛낸 ‘올해의 오케스트라상’ 수상만이 남겨두고 있었다.
사회자가 시상자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조심스레 뜯었다.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홀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사람들의 긴장된 숨소리가 크게 부각될 정도로 조용해진 분위기에.
사회자는 조심스레 카드를 꺼내들며 소리쳤다.
“리히트 오케스트라! 축하드립니다!”
대미를 장식하는 수상답게 팡파르와 작은 폭죽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기립 박수를 보내며 나를 쳐다봤다.
함께 시상식에 참석한 요한나를 비롯해 몇몇 단원들 또한 축하의 의미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내가 스테이지로 올라가는 사이,
그런데 문득, 나는 이상한 것 하나를 느꼈다.
‘작년 수상자가 못 왔나?’
그라모폰 어워드에는 전통이 있었다.
작년에 오케스트라상을 수상한 사람이 등장하여, 올해 수상자에게 트로피를 건네주는 방식.
오케스트라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길 바라는 일종의 풍습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작년 수상자는 새로운 변화에 적응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였을 텐데.
이윽고 사회자의 말이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본래 시상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레오 앤더슨 단장님이 불의의 사고로 참석하지 못하셨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