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장, 레오 앤더슨이 차차 눈을 떴다.
회백색 천장과 진하게 풍기는 소독약 냄새.
레오는 깨어나자마자 자신이 병원에 있음을 직감했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레오를 발견한 단원 하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가왔다.
“단장님! 정신이 좀 드세요?”
무려 5시간이나 의식이 없어서 노심초사했다고.
단원은 본래 참석하기로 했던 그라모폰 어워드에도 연락을 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이안씨가 섭섭해했겠어.”
걱정스레 바라보는 단원을 향해 레오는 애써 농담을 던졌다.
작년도 ‘올해의 오케스트라상’을 수상한 레오였기에.
그는 후보군에 올랐던 이안이 상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훌륭한 음악들을 대거 만들어낸 것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클래식 교향악단의 새 지평을 연 오케스트라 아닌가.
명망 높은 교향악단이 함께 후보에 올랐지만, 레오는 그중 이안이 가장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단원들은?”
“지금 치료를 받고 병상에 누워있습니다.”
단원이 몸을 비키자, 단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벼운 부상을 입은 단원을 비롯해 꽤 심각하게 다친 것인지 다리와 팔에 붕대를 감은 단원들도 있었다.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
그것도 차량이 전도되는 대형 사고였다.
‘아주 끔찍했지.’
기억하고 싶지 않았건만, 강렬한 사고의 기억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한창 해외 순방 공연을 하며 영국에서의 마지막 밤.
단원들과 함께 호텔에 갔다가, 레오 혼자 그라모폰 어워드를 다녀오면 모든 일정이 끝나는 상황이었다.
영국에서의 마무리를 기념하는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강한 충격음과 함께 몸이 크게 튕겨졌다.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몸이 잠깐 붕 떠오른 것 같더니, 어느덧 자신이 벽에 매달리듯 있었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리무진 버스 전체가 전도된 사건.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으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으리라.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데.
레오는 자꾸만 팔에 눈길이 갔다.
‘하필이면…’
어깨를 시작으로 팔까지, 붕대와 석고대가 붙어있었다.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아주 약간 움직여도 고통이 엄습할 정도.
의식을 찾았다는 말에 달려온 의사가 레오에게 설명을 이었다.
“빗장뼈가 부러졌습니다. 아마 회복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차량이 전도되면서 버스 벽면에 어깨를 세게 부딪친 것이 화근이었다.
부러진 부위가 넓고, 레오의 나이를 고려하면 회복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회복을 마쳐도 일상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도 이어졌다.
“그래도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단장님.”
단원이 애써 위로의 말을 전했지만, 레오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 떠오르는 아쉬움과 내일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으니까.
멍하게 있던 레오의 눈앞에.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마에스트로!”
우아한 무게감이 느껴지면서도 걱정이 단번에 느껴지는 목소리.
한 때 빈 필의 수석 피아니스트였던 요한나였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 오지 않았다.
“제가 폐를 끼쳐서 바쁜 사람을 오가게 만들었군요.”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단장, 박이안.
오늘 그라모폰 어워드에서 트로피를 넘겨줘야 했던 그 인물이었다.
영국으로 오는 것은 물론, 왕립음악대학 연주회, 그라모폰 어워드 참석까지 엄청난 스케줄을 소화했을 이안일 텐데.
레오는 자신 때문에 병원까지 당도한 이안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에 어쩔 줄 몰랐다.
“의사는 뭐래요?”
“뼈가 부러져서 오랫동안 회복기를 가져야 할 것 같다더군.”
레오의 대답에 요한나가 한숨을 쉬었다.
단순한 부상도 아닌, 골절상.
음악가에게는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회복되는 동안 연습을 할 수 없을 뿐더러, 회복 기간 동안 줄어든 근육을 재활하려면 또 시간이 걸릴 테니까.
이미 레오도 자신이 회복하기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란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레오는 심히 고민하던 한마디를 내뱉었다.
“박이안 단장님.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단장’이라는 칭호까지 사용한 말.
레오의 목소리에서 사뭇 진지함을 넘어 깊은 고뇌가 묻어나왔다.
그 의중을 눈치챈 것인지, 이안의 눈빛도 레오만큼이나 강렬해졌다.
“본래 저희는 내일 프랑스 샹젤리제 극장에서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었습니다.”
프랑스 파리.
문화의 거리, 몽테뉴 거리에 위치한 샹젤리제 극장.
1913년부터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명문 극장이자, 현대 건축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음악적, 건축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이번 해외 순방 공연을 하며 프랑스 공연장으로 선택한 곳.
빈 필의 명성과 문화재급 극장이 더해져 단 며칠 만에 모든 티켓이 매진될 정도였다.
“보시다시피 저와 단원들은 당장 공연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오케스트라의 심장인 단장, 레오부터 당장 지휘를 할 수 없는 상태.
뿐만 아니라 스물이 넘는 단원들이 크고 작은 부상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
단장의 부재는 물론, 단원 하나가 거대한 악기의 부품이나 다름없는 오케스트라로서는 이 상태로 무대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얄팍한 자존심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관객과의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습니다.”
레오가 신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샹젤리제 극장을 찾는 사람들은 오랜 시간을 기다려 빈 필을 만나려고 기다리는 사람일 것이다.
빈 필의 지대한 팬들은 벌써부터 프랑스에 와서 무대를 기대하고 있으리라.
아무리 티켓값을 환불해준다고 해도, 그들의 노고와 비용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것은 공연을 보러 와준 관객들에 대한 예의이자, 단장으로서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니까.
“부디, 프랑스 공연을 리히트 오케스트라에게 대신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레오의 절실함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말이었다.
본래 자신의 무대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것부터가 어불성설.
특히 오케스트라의 무대는 단장인 레오 혼자가 아닌, 모두가 만들어가는 무대이니까.
이렇게 당장 타인에게 무대를 부탁하는 것도 단원들의 반발을 일으킬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대상이 이안이라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레오를 통해 이안의 음악을 탐독하고, 누구보다 이안이 뛰어난 사람임을 알고 있는 단원들이니까.
이미 같은 병실에 있던 단원들도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관객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다는 신념이 가득한 눈빛.
요한나마저도 이안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긴장되는 순간, 이안이 입을 열었다.
***
나도 프랑스 샹젤리제 극장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건물은 음악뿐만 아니라, 건축계에서도 클래식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평가받곤 했다.
정통 클래식을 계승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극장 중 하나였다.
우아한 고전 시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무대이기에, 클래식 팬들은 물론 명망 높은 관현악단들도 원하는 자리였다.
이미 대관 일정이 촘촘하게 짜여있어 지금 대관 신청을 해도 6개월은 지나야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
‘프랑스에 데뷔하기엔 좋은 자리이지.’
이미 관객들은 준비되지 않았던가.
특히, 빈 필의 명성을 미리 알고 티켓 매진까지 된 상태.
레오의 말대로 해외에서 찾아온 관객도 있겠지만, 홈그라운드인 프랑스 관객들이 가장 많이 모일 터.
독일, 오스트리아, 일본, 영국, 뉴욕까지.
여태껏 프랑스에서는 한 번도 내 진가를 직접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까.
이번 기회는 단순히 빈 필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미 나는 생각을 마친 상태.
다소 늦은 시간임에도 나는 단원들을 한 곳으로 불러들였다.
호텔에서 제공한 연회장.
80여 명에 달하는 단원들이 모두 자리를 메웠다.
늦은 시간에, 그것도 갑작스레 불러서 당황스럽기도 하건만.
단원들은 피곤함이나 당황함보다는 집중력이 가득한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이 시간에 불렀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 보였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게 부탁을 하나 받았습니다.”
나는 단원들에게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빈 필이 겪은 사고와, 현재 레오와 단원들의 상태, 더 나아가 내일 당장 있을 프랑스 공연까지.
상황을 차근히 듣던 단원들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금세 묻어났다.
특히 요한나는 빈 필에 담았던 사람이기에, 다시 병원에서의 레오를 떠올리는 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빈 필하모닉의 자리를 대신해, 파리 샹젤리제 극장을 채우는 일.
홀에 사뭇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때 가장 먼저 손을 든 사람은 에비게일이었다.
“공연은 언제인가요?”
“내일 오전 11시입니다.”
지금 시간이 밤 10시.
앞으로 공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13시간 남짓이었다.
게다가 컨디션 조절을 위한 취침, 호텔을 나와 프랑스로 이동하는 시간까지 모두 고려하면 무대를 준비할 시간은 사실상 단 몇 시간밖에 되지 않으리라.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
여태껏 공연을 준비하면서 짧게는 몇 주씩, 길게는 수개월씩 준비하지 않았던가.
시간을 들인 만큼 곡의 완성도는 높아지기 마련.
더욱 확연한 이미지를 담은 선율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소비된다.
특히 빈 필 오케스트라가 배당받은 시간은 100분.
곡 한 두 개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시간이었다.
최소 4~5개에 달하는 곡을 펼쳐야 채울 수 있는 시간.
그 레파토리를 정하는 것도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이 인원이 모두 이동하려면…’
무려 80명이다.
비행기를 통째로 빌리지 않는 한, 모든 인원이 단번에 프랑스로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시간인지라, 이미 항공편은 대부분 예약되어 있을 터.
이를 고려하면 고려한다면, 2~3번에 걸친 항공으로 이동해야 할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연습 시간은 또 줄어들 수밖에.
음악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은 상황.
하지만, 단원들의 표정은 걱정보다는 다른 기운이 스며들어 있었다.
마치 확신에 찬 듯한 눈빛.
걱정보다 당장의 활로를 찾으려는 눈빛은 지금의 나와 닮아 있었다.
“영국 항공사에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전용기까지는 몰라도, 인원을 이동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알려줄 겁니다.”
“프랑스 내 이동은 저한테 맡겨주세요. 아는 업체가 있거든요.”
“단장님, 호텔은 여기가 어떠신가요?”
세계 각국에서 온 단원들이 아니었던가.
리히트 오케스트라에는 영국인은 물론, 프랑스인들까지 있었다.
게다가 오랜 음악 생활로 꽤나 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단원도 더러 있었다.
단원들이 하나둘씩 의견을 내자 빠르게 계획이 수립되기 시작했다.
팀을 나눠서 프랑스 숙소로 가는가 하면, 악기들을 옮기는 계획부터, 연습 공간을 마련할 수 있는지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단원들 덕에 연회장은 어느덧 열의가 가득해졌다.
“저만 기대되나요?”
에비게일은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듯, 다소 흥분된 억양으로 말했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아니’라고 확답할 수 있었다.
준비에 힘쓰는 리히트 단원들은 에비게일과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