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샹젤리제 극장은 내일 무대를 준비하게 바쁘게 움직였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오케스트라의 해외 순방 공연.
파리를 비롯하여 내로라는 극장들이 빈 필을 수용하기 위해 빼어난 조건을 내걸었지 않은가.
빈 필이 프랑스를 방문한다는 말에 티켓 오픈 일주일 만에 매진이 되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비엔나 필하모닉, 영국에서 차량 전도 사고로 단장을 비롯해 단원 20여 명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비엔나 필하모닉보다 언론사가 더욱 빨리 소식을 전했다.
빈 필하모닉 단원이 탄 버스가 전도되는 사고로 부상을 입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
현장 사진에는 당시의 처참함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빈 필에서 연락 온 건 없어?”
“지금 단장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이번 무대의 총괄 책임을 맡은 담당자, 쥴리앙 팀장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들어갔다.
신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뉴 오케스트라’를 선언한 지 어언 1년.
그 탓에 이번 빈 필의 프랑스 방문에 프랑스 팬들은 물론, 이웃 국가 팬들도 프랑스로 넘어오고 있을 것이 뻔했다.
오죽하면 프랑스 언론에서는 최근 샹젤리제 극장에서 펼친 공연 중 가장 큰 기대를 몰고 있는 무대라고 평가하고 있을 정도니까.
파리 시장도 빈 필을 보고 싶다고 전할 정도로 이번 무대에 대한 공연에는 엄청난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그 무대가 한순간에 날아갈 상황이니.
공연 당일, 밤 12시로 넘어가는 순간에도 쥴리앙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그때, 새벽에 쥴리앙의 휴대폰이 울렸다.
-팀장님! 빈 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보나마나 공연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는 연락이겠지.
쥴리앙은 한숨을 쉬며 관객들에게 예매 취소 문자를 보내라는 지시를 내리려고 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격앙된 목소리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빈 필 대신 리히트가 온답니다!-
“뭐?! 리히트?!”
-빈 필 측에서 자신들이 못 가고 리히트가 가는 것에 굉장한 유감을…-
유감은 무슨, 영광이라고 말해도 부족하리라.
샹젤리제 극장뿐만 아니라, 리히트 오케스트라를 품고 싶은 극장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미 리히트의 명성은 설명하자면 입이 아플 지경이니까.
창단과 동시에 로얄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우승을 하는가 하면, 이번 정기 연주회도 1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에 티켓이 매진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리히트 정도라면 관객 불만도 거의 없을 테지.’
관객 입장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악단이 아닌, 다른 악단이 오는 것이니까.
빈 필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어쭙잖은 오케스트라로는 컴플레인이 들어오리라.
하지만, 리히트라면 불만 대신 감사표가 날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이미 잠은 달아난 지 오래.
쥴리앙은 나갈 채비를 하며 수화기를 향해 소리쳤다.
“당장 보도 자료 다시 뿌려!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프랑스 파리에 온다고!”
***
Allegro.
내 손짓에 단원들의 손이 바삐 움직인다.
시작부터 빠른 선율로 시작하는 <추격>의 도입부.
쟁쟁한 바이올린의 선율을 시작으로, 팀파니가 가세하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형상화한 소리가 나아간다.
거기에 사람들의 함성을 닮은 관악기 소리가 더해진다.
마지막 선율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빠르게 머릿속에 떠오른 가상의 악보를 살피며 복기했다.
‘이 정도면 충분해.’
피아노 조율은 비행기 탑승 직전에 맡겼고, 몇 차례 연습을 통해 자리 구성도 끝마친 상태다.
무대를 위한 준비는 모두 끝.
곧 관객들이 들어올 시간이라 더 이상 연습을 할 시간은 없었다.
이젠 오직 개인 정비만 할 수 있는 시점이었다.
마무리 정리를 하는 내 모습에 이번 무대의 담당자, 쥴리앙이 다가왔다.
잠을 지새운 듯, 쥴리앙의 얼굴에는 다크서클이 가득했다.
그는 조심스레 내게 말을 걸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쥴리앙은 옅게 손을 떨며 물었다.
의심이 아닌, 우려가 가득한 목소리.
하루아침에 공연자가 바뀐 것은 물론, 시간이 부족했으니 당연하리라.
‘불안할 만하지.’
현지 사정을 잘 아는 단원들이 재빠르게 움직인 덕에 모든 단원들이 프랑스에 오는 것은 무리가 없었다.
다만, 3번의 항공편으로 나눠 도착하느라 완전체로 연습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모든 단원들이 샹젤리제 극장에 도착해서 합을 맞출 수 있었던 시간은 단 60분.
본래 무대가 100분인 것을 고려하면 곡 하나의 연습을 하지 못하고 올라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극장을 맡은 담당자라면 그 부분을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대답하기 전에 단원들을 바라보았다.
관객이 들어온 이후라 직접 연주를 할 수 없는 상황.
마지막 선율을 점검하는 단원이 있는가 하면, 머릿속으로 곡을 되새기는 듯 눈을 감은 단원도 있었다.
본 무대를 10분가량 남기고 있는 상태.
그럼에도 단원들은 무대에 대한 걱정보다는 자신이 펼칠 연주에 집중하고 있었다.
“예. 충분합니다.”
담담하게 내려놓는 말에 쥴리앙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단장님. 리히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쥴리앙은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몸을 떨었다.
그는 연신 허리 숙여 내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빈 필의 빈자리를 대신 채워주는 것은 물론, 내가 온다는 말에 되레 관객들이 기대 어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보통 이런 경우에는 예매를 취소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도 아무도 취소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경건하게 인사를 끝낸 쥴리앙은 발걸음을 바깥쪽으로 돌렸다.
이제 관객들을 맞이해야 할 테니까.
밖으로 걸어 나가는 쥴리앙의 발걸음에는 사뭇 자신감이 어려있었다.
막 스테이지를 내려가려던 쥴리앙이 다시 한번 무대를 둘러보았다.
“근데 진짜 필요 없으시겠어요?”
쥴리앙은 한 번 더 거듭 내게 물었다.
보통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사용되는 물건이 무대에서 빠져있었으니까.
지휘자와 연주자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필요한 것.
하지만, 연습해본 결과, 우리에겐 필요 없다는 판단이 섰다.
***
영국에 위치한 대학 병원.
8인 병실이 사람들로 붐볐다.
환자복에 여기저기 깁스를 한 사람들이 일제히 TV화면으로 고개를 고정시키고 있었다.
빈 필 오케스트라 단원들.
그들은 화면에서 보이는 리히트의 무대에 입만 끔뻑이고 있었다.
-실시간 중계를 할 테니 혹 문제가 있다 생각하시면 곧바로 연락해주세요.-
어디까지나 빈 필의 무대라고.
무대를 채우는 것은 리히트지만, 본래 무대의 주인공인 빈 필이 무대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원래는 이안이 레오에게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건만.
레오는 이번 기회가 단원들에게 ‘뉴 오케스트라’의 정점, 리히트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에 병실 TV에 휴대폰을 연결하여 모두에게 공유한 것이었다.
‘그런데 저건 대체…’
실시간 송출 영상을 보는 레오는 터져 나오는 감탄사를 막지 못했다.
분명 전날 연주회를 맡기지 않았던가.
하지만,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펼치는 연주는 수년간 곡을 수학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깊은 풍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완성이라는 표현을 뛰어넘은 그 이상의 선율.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유려한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자작곡 연주가 이어지고.
드디어 대망의 마지막 곡을 앞두고 있었다.
무대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연주에서 샹젤리제 무대는 물론, 병실에 있던 사람들의 탄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Symphony no.5 in c minor, op.67
일명, <운명>.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이자, 수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오케스트라 명곡.
화려하게 펼쳐지는 선율과 차근히 나아가는 현악의 대비가 일품인 곡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악보가 없어?’
첫 시작을 끊은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추격>을 시작으로, 마지막 곡인 베토벤의 <운명>까지.
오케스트라는 물론, 음악 무대에서 당연히 필요한 악보대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오로지 무대에는 단원들과 악기, 이들이 앉은 의자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모든 곡을 암보해서 연주했단 말인가?’
복잡한 상황에서도 레오의 머리가 매섭게 회전했다.
그래, 그동안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보여준 이안의 자작곡들이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매번 리히트가 만들어내는 선율은 엄청난 연습의 결과물이었고,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쓴 티가 났으니까.
게다가 이미 연주회에서 공식적으로 연주한 곡도 있었으니.
암보를 했다면 오랜 연습으로 터득된 자연스러운 것일 테지.
‘하지만, <운명>은 아닐 텐데?’
다른 오케스트라와 달리, 리히트는 오직 이안의 손에서 탄생한 교향곡만 연주하기로 유명했다.
되레 그것을 장점으로 삼아 지금껏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지 않았던가.
우수한 연주실력과 표현력.
이미 베토벤의 미완성곡을 완성한 경력이 있는 이안이 단장으로 있지 않은가.
일각에서는 리히트가 고전 교향곡을 연주하면 어떻게 될까를 궁금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암보로 이 정도 수준을 끌어올리려면…’
인간은 로봇이 아니니까.
연주회를 하면 기본 4~5곡은 기본, 그 곡들이 적게는 10분, 길게는 30분이 넘는 곡도 허다하다.
그 곡들을 모두 완벽하게 저장할 수 없기에.
연주가들은 지휘자의 요청에 따라 특이점을 메모하고, 지휘자들도 악보에 표시하여 지휘에 빠뜨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더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 특이점들과 이안의 지시를 모두 머릿속에 담고 있다는 뜻이니까.
‘게다가 단순히 연주하는 것도 아니거늘!’
혹,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오케스트라에 몸담은 지 꽤 오래된 사람이니 곡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세상 사람들은 <운명>을 ‘전 세계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교향곡’이라고 불렀으니까.
하지만, 가야금을 비롯한 한국 악기들은 그 결이 달랐다.
만약 곡을 알고 있어도, 음 체계가 다르기에 곧바로 연주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오는 결론은 하나였다.
‘편곡과 숙지를 단장은 물론, 모든 단원들이 그 시간에 다 했다는 것인가?’
1악장부터 4악장까지 무려 30분 동안 펼쳐지는 교향곡이다.
그것을 편곡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걸 단원들이 모두 습득하여 수준 높은 연주로 펼칠 수 있다니.
예상을 훌쩍 뛰어넘고, 예상한 것도 불가능한 것일 텐데.
그 불가능한 일을 이안은, 리히트는 하고 있었다.
연주회가 흐르는 100분.
레오를 포함한 빈 필 단원들은 망부석이 되어 있었다.
“저게 가능한 일이랍니까?”
한 단원의 의문에 다른 단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레오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빈 필은 오케스트라계의 정점이라고 불리고, 단원들의 실력 또한 세계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안과 리히트가 보여준 것은 클래식의 정점을 넘어 마법 같은 환상을 보여주지 않은가.
“단장님, 전화 왔습니다.”
단원이 알려준 덕에 레오는 환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기 무섭게 이안이 전화가 온 것이다.
차분하게, 공연을 잘 보았다고 담백한 감상을 하려고 했는데.
-무대는 괜찮았습니까?-
“괜찮기만 할까요! 지금껏 내가 본 무대 중에 최고였습니다! 게다가 그 짧은 시간에 대체 어떻게 그런 연주를… 쿨럭!!”
분명 담담하게 감상을 말하려고 했는데.
이안의 목소리를 듣자 레오는 자신도 모르게 좋다는 평을 우후죽순 늘어놓다 결국 사레가 걸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