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74화 (174/250)

174화

무대를 끝내고 내려온 단원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무려 100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무대.

샹젤리제 극장 측에서 사회자를 대동하여 토크쇼 수순으로 바꾸자는 제안도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연주를 들으러 오신 관객일 텐데 그럴 순 없죠.”

애초에 빈 필의 연주들을 들으러 온 사람일 테니까.

나 또한 음악가는 음악으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연습 시간이 부족했음에도 연주회를 진행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레파토리였다.

단순히 내가 만든 곡을 넣으면 레파토리를 만들 수 있겠지.

하지만, 이번 무대는 어디까지나 본래 빈 필이 맡은 무대였지 않은가.

대부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보고 싶어서 오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클래식을 보러 오는 관객 중에는 다른 음악에서는 다른 부류의 관객층이 있었다.

‘곡을 듣기 위해 극장을 찾는 사람들.’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작품 자체를 보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출연하는 배우의 팬이라 보는 사람이 있듯.

클래식 연주회도 비슷했다.

어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지보다 어떤 곡이 연주되는가에 따라 연주회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았다.

베토벤의 <운명>이나 슈베르트의 <마왕>처럼 고전부터 이어져 온 명곡들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

그런 곡을 들으러 왔는데, 전혀 들어있지 않다면?

분명 원하는 곡을 듣지 못해 아쉬워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급하게 자리를 채우는 것이지만, 기본적인 관객들의 욕구는 충족시키는 것이 음악가로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사람들이 좋아할 곡.’

이미 정해진 레파토리를 고스란히 따를 순 없다.

한정된 시간으로 제대로 된 연습을 하기엔 하나라도 족했다.

게다가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여타 오케스트라가 사용하지 않는 악기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선택한 곡이 베토벤의 <운명>이었다.

전생의 기억으로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곡이자, 명실상부 세계인이 사랑하는 교향곡.

또한 단원들의 머릿속에 기본적으로 탑재된 곡이기도 했다.

‘다다다단’이라는 도입부를 들으면 곧바로 어떤 곡인지 알아차릴 정도이니까.

‘편곡은 최소한으로 한다.’

과한 편곡을 하면 단원들이 습득하기에 어려울 테니까.

최대한 기존의 선율을 유지하되, 본래 들어가지 않는 악기들이 들어갈 공간을 마련한다.

여운 대신 매몰차고 강렬한 현악 선율에는 바이올린을 앞세우고, 이어지는 선율에는 가야금과 거문고와 같은 소리를 배치한다.

합을 맞추되, 서로의 타이밍을 계속해서 봐야 하는 번거로운 부분도 최대한 줄인다.

가장 첫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에 도착한 나는 기내에서 완성한 악보를 단원들에게 보여주었다.

이어지는 연습의 연속. 하지만, 시간은 무척 촉박했다.

당장 단원들에게 곡을 체득시키고, 사소하게 튀어나오는 선율을 수정해야 했으니까.

이미 머릿속에서 완벽한 악보의 형태가 그려졌지만, 그것을 현실로 가져오는 것은 단원들의 몫이었다.

그 이미지를 더욱 잘 그릴 수 있도록.

나는 한마디 조언을 더했다.

“단조라고 해서 무조건 슬픈 단조로 나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베토벤에게 운명은 귀가 먼 것조차 음악에 집중하라는 신의 계시라고 믿었으니까요.”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 청력을 잃는 것은 청천벽력 같은 것일 텐데.

전생의 기억 속 베토벤은 그럼에도 음악을 놓지 않았다.

되레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에는 힘을 더하고, 자신이 할 수 없는 부분에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마치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없는 것 대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듯.

베토벤의 생각도 그러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 생각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

나는 한 가지 방법을 더 사용했다.

“악보 없이 무대에 오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자신이 틀렸는지 맞는지 확인할 때가 아니니까.

보다 더욱 확연한 선율을 위해서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소리를 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샹젤리제 극장 담당자, 쥴리앙이 이 부분에 대해 무척 걱정했건만.

되레 단원들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자작곡에 대한 악보는 암보를 마친 단원들이니까.

베토벤의 <운명>까지 완벽하게 암보하여 연주에 임했다.

그 결과.

마지막 연주를 끝으로 아쉬움과 환호가 가득 담긴 박수가 무대를 내려온 지금도 샹젤리제 극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

진료실의 분위기가 사뭇 무거웠다.

엑스레이와 MRI 촬영 사진을 보던 의사가 연이어 어려운 의료 용어를 늘어놓았다.

Acromion, cartilage, rupture 등.

결론적으로 마지막 말을 알려주는 의사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더 이상 우측 어깨를 원활하게 사용하기 힘들 겁니다.”

팔을 어깨 위로 올리지 못할 것이라는 말.

일상생활 정도는 가능하지만, 큰 동작은 불가능하다는 의사 소견이었다.

그럼에도 레오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지휘에도 무리가 가겠습니까?”

“아무래도 어렵죠. 듣기로는 어깨 움직임에 제약이 생겨서 효과적인 지휘를 할 수 없다더군요.”

어깨와 관련된 관절 질환은 지휘자들에게는 당연한 수순 같은 것이었다.

매시간을 팔을 움직이는 것은 물론, 강세를 표현하기 위해 팔이 떨어져 나갈 듯 움직이지 않던가.

레오도 통증과 말로에 대해 모른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예상은 했지만…”

레오가 허탈한 기색이 역력한 채 말끝을 흐렸다.

사실 그도 어느 정도 예상하곤 있었다.

일주일가량이 흐르면서 점차 통증은 줄어들었지만, 다친 오른쪽 팔이 어깨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 이상을 넘보면 당장이라도 어깨가 빠질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수술을 통해 고통을 줄여드릴 순 있습니다. 하지만, 그 효과가 오래가진 않을 겁니다. 결국 1~2년 뒤에 어깨는 더욱 나빠질 것이고, 그러면 그땐 일상생활조차 힘드실 겁니다.”

의사의 말은 레오에게 사망선고나 다름없었다.

결국 지휘자로서 무대에 오를 수 없다는 말.

은퇴에 대한 생각을 언젠가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내가 빈 필을 나가면…’

벌써부터 레오의 눈앞에 단원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뉴 오케스트라’라는 변화를 예고했음에도 빈 필을 떠나지 않고 남았던 단원들.

갑자기 연주 스타일이 바뀌었을 텐데도, 레오를 믿은 단원들은 끝까지 함께 나아가는 것을 택했다.

그런 단원들이 있기에, 레오는 자꾸만 그들이 눈에 밟혔다.

‘만약 이안이 빈 필을 맡아준다면 좋겠지만…’

한때 생각하지 않았던가.

이안이 비엔나 필하모닉이 운영하는 아카데미에 지휘를 배웠으면 하는 바람.

이안이라면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빈 필하모닉을 이어 운영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게다가 지금의 이안이라면 빈 필하모닉 단원들의 실력을 몇 배나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이미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선보인 연주도 말로 설명할 수준을 까마득하게 넘기지 않았던가.

‘하지만 마무리는 내가 해야지.’

아직 레오의 신분은 빈 필하모닉의 마에스트로니까.

레오는 비록 박수를 받으며 마무리 지을 순 없겠지만, 그동안 자신을 믿어준 단원들의 앞길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지휘자를 어떻게 뽑아야 할꼬…’

단순히 지휘를 잘하는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었다.

백 명이 넘는 단원을 휘어잡는 카리스마와 정확성, 사람을 다루는 것까지.

지휘는 물론, 앞으로 자신을 이어 빈 필하모닉의 유지를 이을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당장 그의 머릿속에는 그 모든 것을 갖춘 인재는 없었다.

한참 고민에 빠져있던 찰나.

그의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천천히 휴대폰을 꺼내든 레오는 떠오른 이름에 미간을 찌푸렸다.

‘토비아스 이 사람이 벌써…’

여느 오케스트라가 그렇듯, 빈 필하모닉도 여러 후원사를 통해 후원을 받고 있었다.

그 중, 오스트리아 재벌 그룹인 도콴 그룹은 빈 필의 최고 후원사이자 투자사였다.

이번 해외 순방 공연에도 막대한 투자를 진행한 곳.

그리고, 그 투자사의 최고 이사가 바로 ‘토비아스 슐츠’였다.

‘분명 야욕을 드러내기 위해 전화했겠지.’

토비아스 슐츠.

토비아스는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전형적인 재벌이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도 예술적인 감각보다는, 그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이득을 볼 것인지 생각하는 남자였다.

몇 번이고 후원을 빌미로 오케스트라를 움직이려고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이번에도 분명 빈 필의 안위보다는 이번 기회로 빈 필을 어떻게 삼킬지 고민할 것이라 생각했다.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샹젤리제 무대와 같은 곳은 구하기 쉽지 않은데 말이죠.-

아니나 다를까.

토비아스는 레오가 다친 정도를 묻는 것도 없이 곧바로 무대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아쉬워하는 이유도 빈 필의 진가를 보여주지 못했다가 아닌, 어렵게 마련한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것에 가까웠다.

“그래도 리히트가 도와주어서 큰 문제는 없다고 들었습니다.”

-빈 필이 못 나간 것이 문제이지 않습니까?-

세간의 관심이 빈 필 대신 리히트로 간 것 아니냐며.

토비아스는 이번 무대를 빈 필이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냈다.

-나머지 순방 공연 일정은 모두 정리했으니 걱정 마시고 쉬시죠.-

마치 자신이 원래 할 일이 아닌데 했다는 듯 거만하게.

이어서 토비아스는 레오의 예상대로 곧바로 야욕을 드러냈다.

-부상의 정도가 심해서 지휘를 못 한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의 빈 필을 위해서라도 빨리 지휘자를 뽑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그동안 레오의 노고를 치하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는 말이었다.

이미 레오에겐 음악가로서, 지휘자로서 살아갈 수 없다는 사망선고를 받은 상태인데.

제 손으로 그 사망선고에 확인했다는 도장을 찍으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거기에 토비아스는 멈추지 않았다.

-저는 벤야민이 가장 적합하다고 보는데, 어떠십니까?-

제안하듯 묻는 것 같지만, 결국 자신이 가장 원하는 사람이 벤야민이라는 것을 밝히는 꼴이었다.

벤야민 베르솔트.

현재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아카데미에서 지휘를 배우고 있는 사람이었다.

꽤 연차가 지나 지휘 솜씨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빈 필을 맡기엔 아직 부족하지.’

미래에 더욱 성장하면 모를까, 지금 당장은 빈 필을 이끌어가기엔 부족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시험 삼아 무대에 올랐을 때도 어찌나 새가슴인지, 지휘봉이 수차례 떨리는 것은 기본.

허둥지둥대다가 자신의 부분을 깜박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휘 센스는 높게 평가할 만하지만, 지금 빈 필에게 필요한 인재는 아니었다.

‘자신이 후원하는 사람이 지휘를 맡으면 다루기 쉽다고 생각하겠지.’

토비아스가 있는 도콴 그룹의 정식 후원을 받고 있는 벤야민이기에.

그가 지휘를 넘어 빈 필의 수장을 맡으면 앞으로 빈 필하모닉이 어떻게 될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고민해보고 정식으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뭐, 그러세요. 그 결정이 최대한 빨랐으면 좋겠네요.-

전화를 끊으며 상황은 일단락되었지만, 레오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숙련되지 않은 벤야민을 곧바로 지휘자로 올리기엔 무리였지만, 토비아스의 말대로 빈 필을 빨리 수습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사고가 있었음에도 빈 필하모닉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그래야 앞으로 레오가 없어도 빈 필하모닉은 전통을 계승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상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벤야민을 앞세우기엔 너무 이르고, 만약 하지 않는다면 토비아스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창 고민에 고민을 더하고 있던 찰나.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갖가지 과일이 섞인 바구니를 들고 들어온 건실한 청년.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수장, 박이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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