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내 방문에 레오는 연신 고맙다며 머리를 숙였다.
아픈 몸 움직이지 말라고 얘기했음에도 그는 이렇게라도 감사 표현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단원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이루 표현할 수 없으니까요.”
한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마에스트로로서 책임감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연주가들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지휘자인 레오는 잘 알테니까.
나 또한 그 마음을 모르지 않기에, 다음에 꼭 자리를 마련하겠노라 답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허허, 예상한 것보다 문제가 많은가 봅니다.”
더 이상 지휘봉을 들 수 없을 것 같다고.
어깨가 완전히 망가져 버린 바람에 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애써 너털웃음을 지으며 담담하게 말하는 레오였지만, 그 속에서는 공허한 감정이 묻어났다.
상황을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이면서도 아쉬움은 가득한.
하지만, 왜일까.
지휘자로서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넘어, 다른 무언가가 레오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은 자신의 미래보다 더욱 큰 무언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듯 보였다.
“표정이 어두우십니다. 다른 문제가 또 있으십니까?”
내 질문에 레오가 움찔거리더니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그게 보였습니까?”
레오는 민망하다며 차근히 웃어 보였다.
하지만, 이내 눈에는 아까 보았던 깊은 걱정이 맺혔다.
잠깐 멈칫하던 레오는 나를 한참 바라보다 말문을 열었다.
“빈 필로 야욕을 채우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레오의 입에서 차례대로 일련의 과정이 흘러나왔다.
더 이상 지휘를 지속할 수 없는 레오의 상황을 확인한 최고 투자사가 연락을 했다고.
프랑스 공연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평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은 물론, 레오의 후임을 어서 정하라고 닦달하기까지.
하지만, 투자사에서 제시한 인물은 당장 빈 필을 이끌어가기엔 부족하다고 이야기했다.
‘레오가 부족하다고 판단했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피아노 연주를 했을 때부터 박자나 곡 전체를 이끌어가려는 나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레오니까.
음악에 대한 그의 안목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정확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미 아카데미에 들어갔다는 것으로 충분한 재능은 있는 것이지만, 아직 빈 필을 이끌 정도는 안 된다는 뜻이겠지.
“도콴 그룹은 빈 필의 후원사 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곳입니다. 그러다보니 덜컥 거절할 수도 없지요.”
아무리 이름난 오케스트라라도, 티켓 값만으로 유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단원들 급여에, 악기 유지 관리비, 홈그라운드 관리비용까지.
그러한 것을 충당하는 것이 대부분 후원사였다.
그러니 레오 입장에서도 그러한 후원사의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던 것이겠지.
어디까지나 기업의 후원은 일정 이익을 원하고 하는 것일 테니까.
“이안씨가 맡아주면 소원이 없겠는데, 그 또한 어불성설 아니겠습니까.”
애써 분위기를 돌리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레오의 말투에서는 사뭇 진지한 기색이 나왔다.
차라리 내가 빈 필을 이끌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
하지만, 레오는 이내 내가 리히트를 이끌고 있으니 힘들다는 것을 잘 안다고 답했다.
“사실 제가 나가는 것은 걱정이 없습니다. 이렇게 다치지 않아도 언젠가 지휘봉을 내려놔야 했을 테니까요.”
엄숙하게 자신의 뜻을 밝히는 레오의 말에 진심이 우러나왔다.
지금 돌연 은퇴를 하면 무대에 서지도,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고 내려오지도 못할 텐데.
그동안의 마에스트로 인생을 보상받거나 인정받기보다 앞으로의 빈 필이 그저 잘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가득했다.
나 또한 빈 필이 지금처럼 잘 나아갔으면 했다.
‘오스트리아 클래식의 정수가 담긴 곳이니까.’
빈 무지크페라인을 비롯하여, 빈 필하모닉은 서양 음악사에 길이 남는 공간이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전 클래식을 유지해온 곳.
그런 곳이 클래식의 정수를 남기는 것이 아닌, 그것으로 장사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넘어가선 안 될 테니까.
아마 그리된다면 레오는 편안하게 은퇴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물론, 레오에 대한 개인적인 보답도 있었다.
이번 샹젤리제 극장 공연 양도는 물론, 내가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시기에도 세계의 이목을 이끌어준 주축이 바로 레오였으니까.
빈 필의 마에스트로가 한국을 찾는다고 해외 클래식 언론도 내게 더욱 빨리 눈길을 돌리지 않았던가.
그 모든 것을 생각한다면, 그를 도와줄 이유는 충분했다.
상황을 들은 내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도콴 그룹을 비롯한 후원사를 납득시킬 수 있음과 동시에, 앞으로의 빈 필이 지금처럼 유지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방법.
문득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공개 오디션을 진행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실력을 평가하기엔 공개 오디션만 한 것이 없으니까.
그리하면 아카데미에 다니는 사람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인재를 불러 모을 수 있을 것이다.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태어난 오스트리아이지 않은가.
굵직한 작곡가들의 혼이 담긴 비엔나의 오케스트라라면 전 세계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눈길을 돌릴 것이다.
레오도 공개 오디션에 대한 반응은 좋았다.
그렇게 한다면 투자사의 눈길을 돌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휘만큼 추상적인 것이 없는데 받아들일까요?”
레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악기는 연주하는 실력이 좋다고 할 수 있지만, 지휘는 그 실력을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 또한 방법이 있었다.
나는 내가 말하는 방안을 상세히 설명했다.
이야기를 이어가면 갈수록, 레오의 눈이 더욱 동그랗게 커졌다.
***
[리히트 오케스트라, 프랑스 샹젤리제 무대에서 화려한 연주를 선보여 화제.]
[100분을 암보 상태로 이어간 리히트. 그들의 잠재력은 어디까지인가.]
파리에서 시작된 이안의 소식은 삽시간에 번져 나갔다.
갑작스레 공연을 맡게 되었음에도 엄청난 연주 퀄리티를 자랑하는 것은 물론, 100분이라는 긴 시간을 악보 없이 진행했다는 것이 큰 화제를 몰았다.
게다가 보통 클래식 연주가들은 자존심으로 누군가의 대신 무대에 오른 법이 없는데.
빈 필과의 인연에 곧바로 파리행을 택한 이안을 보고 너른 마음을 가졌다며 찬사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이윽고 이안의 활약은 곧바로 빈 필이 무대를 하지 못한 이유로 넘어갔다.
[빈 필 오케스트라, 이동 중 교통사고로 단원 상당수가 큰 부상을 입어…]
[빈 필의 수장, 레오 앤더슨, 사고 충격으로 어깨 부상. 더 이상 지휘자로 살 수 없다고 밝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게 닥친 안타까운 사고.
최근 유튜브 활동 및 대중 친화적인 행보를 이어갔던 탓에 레오의 사연에 안타까워하는 클래식 팬들이 많았다.
그와 동시에 100년 넘는 전통의 빈 필을 앞으로 누가 이끌게 될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곧바로 결과가 나오지 않자.
빈 필을 후원하던 다른 투자사들이 일제히 도콴 그룹을 찾았다.
“토비아스,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곧바로 벤야민을 채용할 거라면서요.”
이미 토비아스는 투자사들에게 벤야민이 될 것이라고 확정적으로 이야기한 후였다.
레오의 부재로 사실상 힘을 잃은 빈 필이니까.
여기에 도콴 그룹의 계열사 자제인 벤야민이 단장에 오른다면 빈 필을 휘두를 자신이 있었다.
그러면 광고나 여타 필요한 곳에 빈 필을 활용하여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투자사 사람들이 찾아왔음에도, 토비아스는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빈 필은 우리에게 넘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직 레오가 젊으니 후계자를 양성했을 리가 없다.
이전에 이안을 후계자로 만들려고 했으나, 이안 본인이 거절하지 않았던가.
한편으로는 그렇게 이안이 빈 필에서 성장했으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건만.
토비아스는 이미 떠나간 기회에 미련을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가장 움직이기 쉬운 말을 수장에 올리는 것이 앞으로 편할 터.
이미 레오에게 언질도 해뒀으니 조금 더 기다리면 끝나리라 생각했다.
마침, 레오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것 보십시오. 넘어온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토비아스는 여타 투자사에게 너스레를 떨며 전화를 받았다.
곧바로 벤야민을 지휘자로 뽑겠다고, 보다 빨리 빈 필을 정리하겠다는 레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레오는 토비아스가 원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더 좋은 계획이 생각나서 연락드렸습니다.-
토비아스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뜻대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레 새로운 제안을 건네는 레오가 못마땅한 것.
하지만, 좋은 제안이라면 받아들일 의향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토비아스는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여유롭게 전화를 스피커폰 모드로 전환했다.
만약 여기서 자신을 포함한 투자사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애초에 필요 없는 것일 테니까.
“말씀해보시죠. 무엇입니까?”
-공개 오디션을 진행할까 합니다.-
공개 오디션.
내용은 무척 간단했다.
빈 필하모닉에서 공부하는 아카데미 학생뿐만 아니라, 더 많은 이들에게 기회를 주자고.
이미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있는 사람들도 뛰어나지만, 그보다 더한 인재를 발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어쩌면 더욱 출중한 사람이 빈 필의 문을 두드릴지도 모릅니다. 또 벤야민이 이번 공개 오디션에서 뽑힌다면 모두의 인정을 받는 단장이 되지 않겠습니까?-
레오의 말에 투자 담당자들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토비아스의 의견대로 벤야민을 수장으로 앉히면 당장 다루긴 쉬울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젊은 단장이 들어온다면 잡음 또한 생기기 마련.
당장 빈 필을 써먹을 것도 아니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만약 벤야민이 당당하게 오디션에서 1등을 한다면, 그 어떠한 잡음도 없을 테니까.
토비아스 또한 레오의 의견에 어느 정도 수긍했다.
레오의 말은 벤야민을 다른 카드로 쓸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니까.
레오의 가르침을 받고 더욱 성장하여 다른 오케스트라의 수장으로 활약한다면 그 또한 토비아스에겐 이익이었다.
“공개 오디션에 대한 방안은 있습니까?”
-예, 개인의 지휘 실력은 물론, 앞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나갈 때 필요한 덕목들을 모두 확인할 수 있는 방향으로 준비하려고 합니다.-
지휘를 비롯한 통솔력, 음악을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는 안목, 이를 들을 수 있는 청음력까지.
빈 필이 더욱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덕목들이었다.
하지만, 토비아스는 당장 확신이 들지 않았다.
“뜻은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지휘라는 것은 악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토비아스의 말에 투자 담당자들이 수긍했다.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연주가의 기량은 물론, 지휘자의 통솔력까지 보지만, 일반 대중은 아니지 않은가.
뚜렷한 차이점이 있지 않는 이상, 큰 파급력이 없다는 것이 토비아스의 뜻이었다.
레오도 그 뜻에 크게 동의했다.
음악가로서 생각도 중요하지만, 이를 들을 청중의 관점으로도 봐야 했으니까.
하지만, 레오에게는 음악가와 청중, 그 두 부류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아군이 존재했다.
-리히트의 수장, 박이안씨가 도와주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