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76화 (176/250)

176화

빈 무지크페라인.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홈그라운드이자, 빈 필의 차기 지휘자를 뽑는 오디션 무대였다.

객석에는 관중 대신, 참가자가 자리를 메웠다.

100여 명에 이르는 참가자들.

모두 차기 빈 필하모닉을 이끌고자 온 사람들이었다.

‘이안씨 덕에 더한 사람들도 꽤 보이는구만.’

레오는 이미 참가자들의 대부분이 자신과 빈 필의 명성보다 이안을 보고 온 것이라 확신했다.

젊은 지휘자들도 있었지만, 자신과 연배가 비슷한 지휘자들도 있었으니까.

레오 스스로도 만약 이안의 평가를 받을 일이 있다면 기꺼이 나설 의향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미 정점에 올랐다고 말하지만, 레오 또한 다른 음악가들처럼 자신의 음악을 더욱 발전시키고 싶은 사람이었으니까.

한편으로는 빈 필을 찾아온 참가자들이 어떤 실력을 선보일지 기대가 일렁였다.

“그럼 지금부터 공개 오디션을 시작하겠습니다.”

레오의 선언과 함께 참가자들이 차례대로 단상에 올라왔다.

오디션은 간단했다.

참가자는 단상에 올라와 단원들에게 지휘를 펼치면 된다.

오디션곡은 베토벤의 명곡 중 하나인 <영웅>.

그중 변화무쌍한 박자가 일품인 제3악장, 스케르초를 펼쳐야 한다.

다만, 일반적인 오케스트라 무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휘석에 검은 베일이 드리워져 있다는 점이었다.

공정성을 위해 참가자의 정보를 일절 보지 않고 오디션을 보겠다는 이안의 의지가 담긴 선택이었다.

‘지휘자의 순발력도 같이 확인할 수 있겠지.’

지휘자에게는 청음과 카리스마는 물론, 순발력도 크게 필요했다.

연주 무대에 가서 재빨리 소리를 잡아내는 것은 물론, 소리의 차이에 따라 자리를 옮기거나 구성을 바꾸는 등, 환경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행동해야 한다.

낯선 곳에서 자신의 기량을 선보일 수 있는 담력과 순발력이 없다면 무대에 오를 수 없다.

레오의 예상에 걸맞게, 참가자들은 베일을 발견하고는 당황한 기색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참가자들에게는 베일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았으니까.

참가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베일 너머에서 지휘를 하고, 자세한 지시를 육성으로 내는 것뿐이었다.

이어지는 이안의 심사는 무척이나 냉혹하고 날카로웠다.

“불합격입니다. 다음.”

이안의 심사는 단 3~4분 만에 끝나버렸다.

<영웅>의 3악장을 반절도 보여주지 못하는 시간.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아쉬운 기색을 고스란히 담은 채 무대에서 내려갔다.

급기야, 계속된 불합격에 한 참가자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적어도 한 악장을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수십 분에 달하는 교향곡으로 평가하는데, 조금 더 길게 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지휘봉으로 지휘를 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팔의 움직임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는 주장을 이어갔다.

몇몇 참가자도 그 부분이 다소 걸렸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저런 바보 같은…’

레오는 참가자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물론, 레오도 처음에 팔만 내밀게 하는 것에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지휘라는 것은 손짓뿐만 아니라, 어깨와 표정 등으로 만들어가는 것이기에.

완전한 지휘를 보기 위해선 베일조차 없어야 하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려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대신, 지휘자로서 면모를 제시하기 위해 이번 테스트에서 무언가를 숨겨두었다.

이 또한 이안의 생각이었다.

“참가번호 11번이시죠?”

순간, 11번 참가자는 물론, 레오도 사뭇 놀란 기색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오디션은 참가번호 10번대를 넘어 40번대를 향해 가고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베일을 드리워서 얼굴조차 확인한 적이 없는 사람 아닌가.

레오도 몇 번째 참가자인지 한참 고민하고 있었는데, 단번에 참가번호를 묻는 이안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럼 목소리만으로…?’

곡을 지시할 때 잠깐 나온 목소리.

그것 이외에는 사람을 특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30여 명이 지나갔는데, 어찌 그 소리를 다 기억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안은 그런 것은 개의치 않다는 듯 곧바로 11번에게 반문했다.

“지휘를 하시면서 소리의 문제점을 느끼지 못했습니까?”

이안의 질문에 11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11번에게.

이안은 그가 떨어진 이유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지휘하신 3악장의 열세 번째 마디, 스물두 번째 마디 바이올린 소리가 악보와 틀린 것을 알아채지 못하셨더군요.”

공정성에 이어 지휘자로서 청음력을 보기 위해.

이안은 단원들에게 의도된 실수를 지시했다.

오디션을 진행하는 중간에 이안이 직접 지시했기에, 참가자는 매번 다른 위치에서 의도된 실수를 바로 잡아야 했다.

그러나 11번 참가자를 비롯해 대부분은 그 지점을 하나도 찾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파다했다.

놀라운 것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2분 30초쯤에 본인 재량으로 음을 늘어뜨리셨죠? 긴장감을 주려는 의도였던 것 같지만, 인상적이지 않았습니다. 되레 곡의 지루함이 늘어났죠. 게다가 결정적인 것은 바이올린 독주와 피아노의 시작에서 박자를 놓치셔서 멈칫하시더군요.”

지휘자가 흔들리면 곡 전체가 무너진다.

아주 찰나의 순간에도 지휘자가 방향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단원들은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

이안의 의견을 들은 11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걸 다 기억한다고?’

레오는 멍하니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미 목소리만으로 참가자를 알아보는 것부터 놀라웠는데.

이번에는 수십 명의 차례가 지나갔음에도 소리의 특이점을 정확히 짚어내는 기억력.

대체 얼마나 많은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레오는 감히, 차마 예상할 수 없었다.

***

‘생각보다 굵직한 실력자가 없네.’

18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아닌가.

그런 오케스트라에 지원하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청음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도된 실수를 넣어 지휘자들의 실력을 본 것은 그 때문.

수십 개에 이르는 마디에서 단 하나의 음표만 틀려도 지휘자는 그것을 잡아내야 한다.

음표의 틀어짐은 곧 곡의 틀어짐으로 나아가버리니까.

그 부분을 잡아내지 못한다면 빈 필은커녕 어느 오케스트라도 맡을 자격이 없었다.

“다음 참가자 들어오세요.”

씩씩한 걸음으로 단상에 올라 베일 속으로 들어가는 남자.

베일으로 삐져나오는 팔을 보자 레오가 내게 귓속말을 건넸다.

“저 친구가 벤야민입니다.”

오랫동안 본 탓에 팔과 연주 전 자세를 취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고.

분명 벤야민이 맞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레오의 말에 나는 베일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빈 필의 투자사가 밀고 있다는 차기 지휘자, 벤야민 베르솔트.

거침없이 베일로 팔을 집어넣는 모습은 그의 자신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감이 항상 지휘 실력과 비례되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이전 참가자들을 봤던 것과 똑같이 그의 지휘를 지켜봤다.

빠르고 느린 선율이 반복되는 3악장의 스케르초.

중점이 되는 호른의 소리를 컨트롤하고, 바이올린의 틈을 정확히 짚어줘야 한다.

반전되는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그 연결점을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하는 작업.

그 부분도 벤야민은 꽤 잘 마무리했다.

‘실력이 나쁘지 않네.’

잘 이어가는 선율에, 나는 첼로 연주가에게 손짓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첼로 연주가가 곧바로 보잉을 연하게 진행하기 시작한다.

연하게 보잉을 시작한 지 채 3초가 지나지 않아 베일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첼로! 소리가 작아집니다.”

벤야민의 외침에 첼로가 곧바로 줄였던 힘을 다시금 낸다.

현의 마찰에 소리가 커지자 밀렸던 첼로의 중심음이 다시금 3악장을 굳건하게 만든다.

이후에 두 차례가량 실수를 집어넣었는데도 벤야민은 곧바로 특이점을 찾아냈다.

‘청음도 괜찮고.’

나는 베일에서 삐져나온 팔을 유심히 관찰했다.

지휘를 이어가는 손짓도 꽤 유려한 편이었다.

손목의 스냅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모습은 마치 바이올린의 보잉을 연상케 했고, 빨라지는 속도에는 쉴 새 없이 손목을 움직이며 박자를 맞춰갔다.

지금껏 본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낫다고 봐도 무방한 실력.

하지만, 그의 지휘에는 무언가 빠져있었다.

“그만.”

3악장의 절반 정도를 지나고 있는 시점이었다.

내 말에 단원들이 일제히 연주를 멈추고 악기를 내렸다.

벤야민은 갑작스런 상황에 어리둥절한 듯, 팔이 얕게 떨렸다.

“잠깐 휴식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에 레오도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며 휴식 시간임을 발표했다.

빈 필 단원들도 무려 2시간 동안이나 <영웅>을 연주했으니 지칠 만할 테니까.

그와 동시에 나는 단상을 내려가고 있는 벤야민에게 향했다.

“혹시 바이올린을 배운 적이 있습니까?”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손목의 스냅이 바이올린과 유사하더군요.”

벤야민이 선보였던 손목 스냅.

바이올린의 현을 문지르듯 움직이는 면모가 돋보였다.

그 장기를 살려 지휘를 한 덕에 지휘봉이 유려한 곡선을 그린 것일 테지.

“혹시 지휘보다는 바이올린을 하고 싶었던 것 아닙니까?”

내 물음에 벤야민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마치 담아두었던 깊은 고민을 다시 끌어올린 것처럼.

그의 얕은 한숨이 묵직하게 떨어졌다.

“예. 사실 저는 바이올린이 더 적성에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벤야민은 차례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처음 음악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잡았던 바이올린.

굵직한 재벌가 중 하나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많은 지원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점차 나이가 차고, 현실에 맞닥뜨릴수록 가족과 친지들이 연주보단 지휘로 가길 원했다고.

‘아마 음악을 인정하되, 보다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길 원한 거겠지.’

기업의 입장에서는 홀로 성과를 보이는 것보다 대규모 인원이 모인 오케스트라로 실적을 증명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테니까.

음악의 차이를 간과하고, 예술보다 효율을 중시했다면 가능할 법한 이야기였다.

아마 토비아스가 벤야민을 후원한 것도 그 때문일 테지.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과거 내가 의미 없는 바이올린을 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원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실력.

교과서적으로 나아가면 실력이 없진 않겠지만, 그 이상의 정점으로 도달할 순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벤야민이 지휘가 아닌, 다시 바이올린을 잡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지휘에 확신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바이올린을 잡아보세요.”

이미 청음력이 뛰어난 것을 증명했지 않은가.

호른과 바이올린, 피아노까지 모든 선율의 실수를 짚어낼 정도로 좋은 청음력.

게다가 지휘를 할 때 손짓을 보면 바이올린 속주도 무리 없이 해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 감사합니다.”

벤야민이 사뭇 뭉클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전과 다른 자신감이 몸에 감도는 것이 느껴질 정도.

내가 다가올 때까지만 해도 떨렸던 손이 이제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나는 벤야민의 어깨를 몇 번 토닥이곤 다시금 단상 위, 심사위원석으로 향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빈 필 단원들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다시 시작된 심사.

“다음 분 들어오세요.”

호령에 맞춰 새로운 인물이 지휘석에 섰다.

베일 사이로 주름기가 가득한 팔이 뻗어 나왔다.

늘상 그렇듯, 지휘를 시작하는데.

이전 참가자들이 보이지 않았던 묘한 움직임에 지휘봉이 사뭇 다른 기색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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