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지휘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청음력과 카리스마, 책임감, 리더쉽 등 수십, 수백 명의 단원을 이끌어야 하는 지휘자는 많은 기본 소양을 가져야 한다.
만약 그중 하나를 꼽는다면, 나는 단번에 ‘곡 분석력’을 들 것이다.
‘지휘자가 단원들의 방향성을 제시하니까.’
지휘자가 음악에 대해 철학을 가지고, 분석하고, 어떤 부분을 살릴 것인지 확실하게 정해야 한다.
특이점을 돋보이게 만들면서도, 이를 다른 단원도 납득하고 수용할 수 있게끔 설득하기까지.
완벽하게 분석한다면 다른 사람도 부정할 필요 없이 단번에 납득할 수 있겠지.
단원들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뒤이어 청중들이 납득할 만한 소리를 조율하는 것도 지휘자의 몫이었다.
베토벤의 대표곡 <영웅>.
그중 제3악장의 스케르초를 고른 것은 그 방향성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변화무쌍한 변주와 이를 따라가는 빠른 속도에 끌려다니지 않고, 그 모두를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는 사람.
그게 앞으로의 빈 필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 모습을 58번 참가자가 보여주고 있었다.
“제2 바이올린! 연하지 않게!”
베일에서 튀어나온 팔은 노령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목소리는 무지크페라인을 가득 메울 정도로 젊은 패기를 담고 있었다.
순간적인 압력에 되레 빈 필의 단원들이 움찔거릴 정도.
58번 참가자는 그 움찔거림까지 짚어가며 단원들을 휘어잡고 있었다.
“모두가 영웅이라는 생각으로! 절대 멈칫하지 마라!”
분명 오늘 처음 빈 필의 지휘를 맡는 것일 텐데.
58번 참가자는 마치 오랫동안 빈 필과 호흡을 맞춘 것처럼 거침없이 코멘트를 더했다.
처음 어리둥절하던 단원들도 이내 참가자의 페이스에 동화되어 더욱 압도적인 선율을 펼쳤다.
그 모습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본인만의 <영웅>을 가지고 있는 사람.’
시작부터 특정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 않은가.
<영웅>이 시작된 지 1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여타 참가자들이 지휘할 때 만들었던 선율과는 차원이 다른 선율이 무지크페라인을 적셨다.
58번 참가자의 모습은 날뛰는 소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투우사 같았다.
<영웅>의 기색을 더욱 크게 만들면서도, 그 기색을 완벽하게 잡아 절제하는 솜씨.
결코 단시간에 만들 수 없는 노련함이 고스란히 보였다.
게다가 베일 때문에 많은 한계가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표정과 눈빛으로 단원들에게 지시하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지휘자에게 베일은 그 소통 창구를 하나 막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58번 참가자는 그 한계를 목소리로 대신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코칭을 하고, 악기가 들어가기 전에 준비하라고 일갈하기까지.
이미 머릿속에 <영웅>의 3악장이 모두 들어가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3시간에 이은 오디션.
58번 참가자는 최초로 5분에 달하는 제3악장을 완주한 사람이 되었다.
이미 레오도 충분히 납득 가능한 듯 58번 참가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대단한 실력자네요.”
“당연하죠. 어떤 분이신데.”
내 대답에 레오가 사뭇 의아한 듯 나를 쳐다봤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위해 얼굴도 보지 않고, 서류에도 아무 내용이 기재되어있지 않은데.
누군지 아는 듯한 내 반응이 무척 궁금한 듯했다.
나는 말로 길게 설명하는 대신 심사위원석에서 일어나 단상으로 향했다.
베일 속의 인물.
주름이 자글자글할 정도의 나이에, 저 정도 열성적인 파워를 가진 사람은 내가 아는 한 한 명이었다.
“미국에서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마에스트로. 나오시지요.”
“이런, 들킨 모양이군요.”
너털웃음을 지으며 한 남성이 베일을 거두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객석에서 탄성이 나오는 것을 비롯해 레오도 놀란 마음에 벌떡 일어났다.
레오는 자신이 본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58번 참가자에게 다가왔다.
얼굴을 확인한 레오의 눈이 더욱 커졌다.
“미스터 올란?!”
올란 로저스.
그는 무려 25살의 나이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맡은 사람이었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단장을 맡으며 공격적인 연주투어를 다닌 덕에 LA필을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다.
지금 LA필이 가진 명성의 기틀을 만든 사람이 바로 올란이었다.
이후에도 이스라엘 필, 뉴욕 필의 음악감독과 상임 지휘자를 겸직하는 것은 물론, 뮌헨 바이에른 오페라 극장의 음악극장까지.
엄청나게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사람이었다.
41살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은퇴를 한 거장.
그가 빈 필의 지휘자가 되겠다고 문을 두드린 것이다.
“이안씨를 보고 다시금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뭡니까.”
은퇴를 한 지도 어언 3년째.
그 사이에 나의 행보는 물론, 리히트의 발전까지 모두 목도했다고.
내 모습을 보면서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고 표현했다.
열성을 모두 불태워 더 이상 새롭게 할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음악계를 떠났는데.
내가 만들어가는 길을 바라보니 그것은 그저 익숙해져서, 지루해졌을 뿐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이안씨를 직접 마주하고 싶은 생각이 컸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것을 한번 보여주고 싶었다고.
음악가는 음악으로 말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내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표현했다.
이미 충분히 보여줬다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빈 필이 괜찮다면 제가 생각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펼쳐보고 싶었습니다.”
나를 통해 레오가 ‘뉴 오케스트라’를 선언했듯.
올란 또한 ‘뉴 오케스트라’의 계보를 이음과 동시에 클래식의 정수라고 불리는 빈 필의 유지를 이어보고 싶다고.
고전과 현대의 조화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이 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물론, 저보다 더 뛰어난 친구가 있다면 자리를 양보해야겠지요.”
올란 뒤에 아직 수십에 달하는 참가자가 있었으니까.
그 또한 이를 인식한 듯한 말이었다.
하지만, 올란을 마지막으로 오디션은 진행되지 않았다.
올란의 압도적인 지휘와 무대 장악력을 본 사람이 모두 기권을 해버렸으니까.
***
[빈 필하모닉 지휘자 공개 오디션이 성공리에 막을 내려…]
[레오 앤더슨, ‘이안에게 차마 갚지 못할 정도의 큰 은혜를 입었다.’]
[‘공개 오디션 방식에 이안의 천재성이 묻어난다’ 도이치 그라모폰 찬사를 보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뽑는 오디션.
그 소식은 삽시간에 언론을 타고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오디션의 내용을 모두 이안이 감독해주었다는 레오의 말에 이안에게까지 스포트라이트가 펼쳐질 정도.
게다가 이번 오디션의 놀라운 점은 하나 더 있었다.
[차기 빈 필 마에스트로, 올란 로저스로 확정되어.]
[올란 로저스, 화려한 이력이 재조명. LA, 뉴욕, 이스라엘에 이어 빈 필도 움직이는가.]
레오의 뒤를 이을 사람이 올란이라는 말에 클래식계는 떠들썩해졌다.
올란은 지휘자 중 위대한 인물을 꼽으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젊은 나이에 천재성을 발휘한 것은 물론, 그가 손댄 오케스트라는 몇 단계 발전했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그를 추종하는 수많은 팬들이 은퇴 소식을 밝혔을 때 눈물을 흘렸다는 루머가 돌 정도.
그런 올란이 귀환한다는 소식에 벌써부터 클래식 팬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이러한 기사와 반응들을 보는 토비아스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벤야민을 지휘자 자리에 앉히려고 했던 토비아스도 올란의 합류에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처음엔 토비아스도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공개 오디션으로 벤야민보다 더한 사람이 나온다면 물론 좋기야 하겠지만, 기업에 이익이 올 정도로 굵직한 사람이 올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빈 필의 명성을 한 층 더 올릴 사람이 아니라면 그냥 벤야민이 맡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라 생각했다.
‘생각지도 못한 거물이 들어올 줄이야.’
토비아스도 올란의 명성은 잘 알고 있었다.
도콴 그룹은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사업을 펼치고 있는 곳이니까.
오케스트라를 손댈 때마다 엄청난 파급력을 몰고 오는 인물이 있다고 들은 바가 있었다.
토비아스는 올란이라면 빈 필의 명성을 한 층이 아닌, 수십 층을 올린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심지어 존재만으로 빈 필이 화두에 오를 정도.’
올란의 합류로 벌써부터 앞으로 빈 필이 어떤 선율을 보여줄지 기대된다는 반응이 속속 올라오고 있었다.
영국 그라모폰과 같은 권위 있는 음악잡지사의 평가는 기본.
벌써부터 무지크페라인 쪽으로 빈 필의 연주회가 언제 진행되냐는 문의전화가 쇄도했다.
이미 문의 수가 무지크페라인 무대 인원을 넘길 정도라고.
담당자는 다음 연주회가 진행되면 단번에 만석일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토비아스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물을 본 것은 사실상 처음이니까.
토비아스도 이번 사안에 대해 더욱 관심이 갔다.
그는 곧바로 레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우수한 분을 초빙하게 되어 다행이네요.”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한 것이 뭐 있겠습니까. 모두 이안씨가 한 것입니다.-
전화상에서 레오는 모든 공을 이안에게 돌렸다.
공개 오디션과 베일을 두르자는 아이디어까지, 대부분 이안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자신이 한 것은 단원들을 설득한 것에 불과하다고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토비아스도 이젠 흥미가 돌았다.
이미 음악적인 명성으로는 최고치를 달리고 있는 이안이.
두뇌적인 요소도 뛰어난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으니까.
“몸이 다 나으시면 함께 식사 자리라도 함께하지요.”
토비아스의 마지막 말에 레오는 사뭇 놀란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토비아스는 사업상 이유가 아니면 누군가 겸상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
“이번에 앙케이트 조사 끝났어?”
“아까 끝나서 지금 산출하고 있어.”
콘서트의 담당자를 맡은 수잔이 동료 직원인 마이크에게 물었다.
매해 콘서트를 앞두고 이들은 ‘올해 무대에 올랐으면 하는 아티스트’에 대한 앙케이트 조사를 하곤 했다.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사람,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을 피날레 무대로 올려 더욱 많은 사람들의 시청을 독려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이미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무대에 오른 지 오래였다.
미국에 트월킹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이 오르는가 하면, 소울랩의 창시자가 온 세계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 곡을 선보이는 무대.
작년에는 전 세계에 K-pop 열풍을 일으킨 남자 아이돌 그룹이 출연하여 수만 명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오죽하면 세계 모든 음악팬들이 이번 콘서트 피날레는 누가 장식할까에 대해 궁금해할 정도였다.
그 대상 선정에 시발점이 되는 앙케이트 조사가 오늘 막을 내렸다.
“산출 끝났다.”
결과를 정리한 도표가 마이크의 노트북에 떠올랐다.
과연 어떤 인물이 나올까에 대해 생각하던 찰나.
이전과 다른 결과가 눈앞에 펼쳐졌다.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1위야?”
수잔이 사뭇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동안 앙케이트 조사에서 1위는 각국의 빼어난 아이돌에게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대중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하는 것이니 당연한 것일 테지.
최근에 K-pop 열풍이 전 세계를 휩쓸며 타국에서도 한국 아이돌이 앙케이트 조사 1위에 들어오는 일이 심심치 않았다.
그런데 대중음악이 아닌 그룹이 1위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클래식 오케스트라가 올라온 건 처음이지 않나?”
수잔의 질문에 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전무후무한 결과.
하지만, 수잔의 머리 한편에는 기대감과 함께 가능성이 떠올랐다.
이미 수잔과 마이크는 물론, 전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단체가 아닌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굵직한 행보를 이어간 리히트.
섭외하는 데 성공한다면 지금껏 집중되었던 인기를 뛰어넘는 관심이 모일 것이란 확신이 떠올랐다.
“한번 연락드려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