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79화 (179/250)

179화

UN 글로벌 자선 콘서트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안의 참여는 물론 6대륙에서 참여하는 아티스트의 섭외도 완료된 상태.

오늘은 수잔과 마이크가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공연할 사람들과 회의를 진행하는 날이었다.

이윽고 약속된 시간이 되자 두 사람이 일제히 회의실로 들어왔다.

이번 UN 콘서트에서 합동 무대를 진행하기로 한 가수들이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곧바로 수잔은 기대평을 늘어놓았다.

“기사 보셨어요? 라인업 공개에 바로 사람들이 난리더라고요.”

UN 콘서트 출연자들이 완전히 확정된 시점.

벌써부터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출연자들의 조합에 감탄을 더하고 있었다.

특히 센트럴파크에서 공연하는 밀리와 칼리의 조합은 무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벌써부터 팬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밀리 오코넬과 칼리 포스.

밀리는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데뷔하면서도, 나이보다 훨씬 성숙한 곡을 뽐내며 일약 스타 덤에 오른 인물이었다.

시니컬하면서도 독보적인 그녀의 목소리에 미국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한국까지 큰 팬덤을 보유할 정도.

데뷔 2년 만에 그래미 어워드 4관왕을 달성한 천재 아티스트로 평가받고 있었다.

칼리 포스도 유명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창 마이너 그라운드에서 활동하다가 메이저로 데뷔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신인.

하지만, 그는 데뷔곡이자 대표곡 단 하나로 미국 대중음악 팬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감미로운 기타 선율에 영화배우의 죽음을 추모하는 곡 하나로 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그 때문에 벌써부터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시니컬한 밀리와 감성적인 칼리가 어떤 곡을 만들어갈지에 대해 기대감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다른 곳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피날레를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진행한다고요?”

밀리와 칼리가 한마음, 한뜻으로 물었다.

첫 모임이라 곧바로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건만.

두 사람 모두 이안의 콘서트 참여 소식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네. 놀랍게도 앙케이트 조사에서 1위를 달성했답니다.”

지금껏 이런 경우는 없지 않았던가.

그동안 UN 콘서트는 대개 팝과 힙합 같은 대중음악이 주를 이뤘다.

간혹 레게나 인디와 같은 마이너 장르가 올라오곤 했지만, 그것도 극소수.

하지만, 클래식이 지금껏 앙케이트는커녕 후보군을 들어온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데.

되레 두 사람은 아쉬운 기색을 드러냈다.

“저희가 한국으로 갈 순 없죠? 리히트 무대를 직접 보고 싶은데.”

“저도요. 차라리 한국에서 무대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니까요.”

사비를 털어서라도 한국 무대를 진행할 기세였다.

“리히트와 콜라보를 하면 소원이 없겠어요.”

“저도요. 올림픽 때 무대는 정말… 지금 생각해도 전율이 일죠.”

칼리가 몸을 떨면서 기대 어린 미소를 지었다.

이미 리히트 오케스트라와 밴드와의 합작, 거기에 영국 유명 밴드 리더들의 보컬까지 들어가지 않았던가.

밴드가 할 수 있었는데, 자신들이 못 할 이유는 뭐냐며.

자신들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쳐갔다.

계속해서 자신들의 무대가 아닌, 리히트와 이안의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에 수잔은 한편으로 놀라움을 지울 수 없었다.

‘리히트의 파급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두 가수의 말에 수잔도 한편으로 기대감이 어렸다.

리히트와 다른 가수의 콜라보.

세계적인 가수가 이미 기대 어린 시선을 보내는데, 대중들은 오죽할까.

하지만, 수잔은 스스로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다독였다.

곧, 이안이 구성과 컨셉을 알려주기로 했으니까.

***

[아만다 나는 엄마였습니다.]

[피아노 앞에 앉은 아만다, 회상에 젖은 듯 건반에 손을 올리지만, 이내 내린다.]

[아만다를 지나치는 사람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 The end]

“드디어… 완성했다!”

희곡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마디를 적은 여성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붉은 머리를 가진 그녀는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듯 머리칼이 헝클어져 있었다.

애써 곱게 땋은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졌지만, 땋은 지 오래된 듯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튀어나왔다.

두꺼운 안경 너머로 보이는 퀭한 눈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폐인과 같은 이미지를 한 그녀는 사실, 극작계에서 알아주는 유명인사였다.

마리 사브레.

그녀의 이력은 그녀가 쓴 작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돈키호테를 모티브로 만든 오페라, 오즈의 마법사 속 도로시가 아닌, 마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뮤지컬 등.

브로드웨이에서 10년 넘게 사랑받고 있는 극작들이 모두 그녀의 작품이었다.

일반적으로 뮤지컬과 오페라는 극작가와 작곡가가 한팀을 이루는 경우가 많은데.

마리는 홀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뛰어나 작곡가가 먼저 손을 내미는 특이케이스였다.

하지만, 최근 그녀는 안식년을 가짐과 동시에 꽤 오랫동안 휴식기를 가졌다.

보다 많은 것을 경험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하나.

‘나의 작품을 쓰겠어.’

이미 원작을 모티브로 빼어난 작품들을 만든 그녀였지만, 항상 그녀는 갈증을 느꼈다.

자신이 쓴 작품이 원작이 되길 바라는 생각.

그 탓에 마리는 이번에 꽤 오랜 시간을 생각하며 오로지 자신만의 작품을 쓰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그 생각이 모여 만들어진 작품이 이번 작품, [모정]이었다.

[모정].

이번에 마리가 혼신의 힘을 쏟아내어 만들어낸 작품의 이름이었다.

유대계 피아니스트인 아만다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핍박받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전쟁으로 남편이 일찍 죽고, 아이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으로서 고뇌와 비탄, 아이에 대한 아만다의 생각으로 극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이를 예정이었다.

‘작가인 내가 기대하면 안 되지만, 이번 건 달라.’

오랫동안 극작가로 살아오면서 마리는 좀처럼 기대하는 법이 없었다.

기대를 하면 실망이 이어지기 마련이고, 실망은 자존감의 하락으로 다가오니까.

아무리 잘 된 작품이 있다 한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아가려는 마리의 의지가 담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 [모정]은 결이 달랐다.

글자를 새기는 것만으로도 서글픈 감정이 들끓고, 장면을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고였다.

그 감정을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떤 장르가 더 어울리려나.’

마리에게 장르 선택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어느 학교에 보내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수학을 가르칠 것인지, 국어를 가르칠 것인지, 아니면 예체능을 가르칠 것인지.

장르가 가진 특성에 따라 마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으니까.

그러던 중 마리의 머릿속에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 둘한테 보내면 재미있겠네.’

마리의 뇌리에 스쳐 지나간 인물.

뮤지컬과 오페라 각 분야의 최고라고 불리는 감독, 니콜라와 홀랜트였다.

이미 마리도 그들과 작업을 한 경력이 있었기에, 그들의 천재성은 물론, 두 사람의 앙숙 같은 관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평소라면 자존심 싸움으로 한 명이 포기하는 그려질 터였다.

하지만, 마리는 자신감이 있었다.

두 사람에게 작품을 던져주면 서로 경쟁하듯 작품을 키워줄 것이라고.

게다가 두 사람에게는 작품을 맡을 또 다른 이유도 있지 않았던가.

‘리히트 오케스트라를 섭외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지?’

***

보통 늦은 저녁이 되면 리드미컬 체임버홀은 문을 닫는다.

개인 연습을 비롯해 단원들의 컨디션을 조절하기 위해 특정 일정이 있지 않는 이상 연습을 속행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저녁이 훌쩍 넘은 시간.

뜻밖의 방문객들에 체임버홀 응접실에는 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또 만났네?”

“내가 할 소리야.”

서로를 마주하자마자 두 사람 사이의 눈에 스파크가 튈 듯하다.

정기 연주회 때 찾아왔던 뮤지컬, 오페라의 대가.

니콜라와 홀랜트가 또다시 함께 한국을 찾은 것이다.

“이번에 온 이유는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정기 연주회 때 만났을 때는 조언을 구하고 싶다고만 했건만.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내게 직접적으로 제안을 언급했다.

서로 살벌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으르렁거리는 두 거장.

두 사람의 반응에 진심은 물론, 절실함마저 묻어났다.

“정말 좋은 작품입니다. 그래서 더욱 이안씨와 함께 하고 싶고요.”

두 사람이 더욱 열띤 반응을 보이는 것은 하나의 대본 때문이었다.

극작가계의 전설이나 다름없는 인물이 둘에게 대본을 하나 보냈다고.

수십 장에 이르는 희곡을 홀리듯 본 것은 물론, 다 보는 순간 반드시 희곡을 무대에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작품 속에 피아니스트가 나옵니다. 저는 그 선율을 리히트는 물론, 이안씨가 그 누구보다 잘 완성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안씨의 실력이면 당연하죠. 그걸 말이라고… 저는 그 이상의 것을 이안씨가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평론계에서 이안씨의 음악을 보인다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사소한 의견을 나누는데도 두 사람은 교묘하게 상대의 말을 끌어 잡고 내 평을 크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이 하는 말은 같았다.

이미 완벽한 대본이 있기에, 음악만 완벽하면 된다고.

소리로 관중을 휘어잡는 내 능력이 필요하다며 절실함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저 두 사람이 저 정도면 뭔가 있긴 하다는 건데…’

무려 뮤지컬과 오페라, 장르의 정점에 오른 거장을 홀린 대본이다.

그 내용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뜻.

하지만, 지금 당장 내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콘서트를 하나 앞두고 있어서 당장은 어려울 겁니다.”

UN 글로벌 자선 콘서트 일정이 먼저였다.

무대에 맞춘 곡을 새로 만드는 것은 물론, 제대로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 컨셉과 구성까지 내가 한다고 자처했으니까.

한 달 이상 남은 콘서트를 원활하게 진행하려면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시간이 없었다.

내 이야기에 니콜라가 무척 고민스런 표정을 지었다.

한참 말없이 생각에 잠기던 니콜라는 엄숙한 목소리로 자신의 뜻을 내려놓았다.

“그럼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맡은 리히트의 무대가 먼저라며.

곡을 만드는 작곡가로서 그 무대를 존중해주고 싶다고 답했다.

거기에 그녀는 좋은 만남을 위해서라면 한 달 정도는 기다릴 수 있다며, 충분히 기다릴 의향이 있다고 전했다.

동시에 홀랜트는 니콜라를 향해 ‘정말?!’이라고 하는 눈빛을 보냈다.

‘뮤지컬에 함께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지 않았던가.

촬영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나의 연주를 제대로 담기 위해 개봉날짜까지 미뤘던 영화.

하지만, 되레 그 덕에 큰 인기에 힘입어 해외 수출에도 성공한 경우가 있었다.

그때의 감독과 니콜라의 눈빛이 같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투닥이던 니콜라의 눈빛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했다.

홀랜트는 잠깐 망설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저도 기다리겠습니다. 무대를 끝내고 연락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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