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80화 (180/250)

180화

나치의 침공 아래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인.

희곡은 피아니스트이자,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가지는 고뇌를 담고 있었다.

숱한 명작을 만든 작가의 저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글이었다.

이미 브로드웨이에서 인정받은 것은 물론, 바다 건너 우리나라에도 엄청난 인기를 몰고 있는 작품들을 쓴 작가니까.

만날 때마다 앙숙처럼 눈을 부라리던 둘이 같은 작품을 하겠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무대를 재현하기 위해 내가 꼭 필요하다고.

특히 홀랜트의 제안은 니콜라도 경악할 정도였다.

“1부의 클라이맥스를 감히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주인공의 고뇌가 극에 달하며 격정적인 연주를 펼치는 1부의 마지막 장면.

인물의 가득 담기되, 이것이 과하고 시끄럽게 들리지 않아야 하는.

니콜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만, 격렬한 감정과 관객에게 곡을 전달하는 이성이 정확히 조화되어야 하는 까다로운 부분이라고 평했다.

‘그 정도 그림을 그리고 있다면 작품 자체는 무척 잘 나올 테지.’

참가를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작품이나 마찬가지.

브로드웨이에서 니콜라와 홀랜트의 명성은 물론, 해당 희곡을 쓴 극작가의 인지도도 상당히 높지 않은가.

이를 참여하려면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을 먼저 끝내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UN 글로벌 자선 콘서트.

어쩌면 수천만에 달하는 관객들이 볼 무대다.

게다가 6개의 대륙 중, 아시아를 대표하는 무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만큼, 음악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내 머리가 맹렬하게 생각을 더해간다.

‘세계 문제를 제대로 직면하고 해결하기 위해 나아가자는 내용을 담아야겠지.’

기후 위기와 빈곤 퇴치 등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막기 위한 자선 콘서트.

실시간 동시 송출을 하는 것은 물론,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 이번 콘서트의 중요 쟁점이 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한국에서 무대가 마련되는 만큼, 한국의 클래식, 음악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일 터.

피아노에 올라간 손이 그 기세를 가득 담아 건반을 후려쳤다.

화합을 독려하듯 유려하게 나아가면서도, 참상을 보여주려는 듯 강렬하게 소리를 내뿜는다.

이내 점차 내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아이디어가 악상이 되어 가상의 악보를 채워나갔다.

***

아침부터 체임버홀이 크게 술렁였다.

UN 글로벌 자산 콘서트라는 거대 무대에 오른다는 이안의 말.

193개국에서 동시에서 무대를 바라볼 것이라는 말에 단원들이 남몰래 침을 삼켰다.

‘이 소식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전달할 수 있다니.’

무대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는 이안의 모습에 선화는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양악은 물론, 대중음악에도 크게 관심이 없던 선화도 UN 콘서트의 존재를 알고 있을 정도.

매년 뉴스에서 나와서 국내 음악의 우수함을 내세우지 않았던가.

아이돌과 굵직한 해외 뮤지션이 활약하는 무대에.

가야금을 들고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 곡의 초안입니다.”

이안은 짧은 소개와 함께 곧바로 피아노 위에 손을 올렸다.

때로는 은은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연주하는 손길.

분명 피아노 하나에서 나오는 선율인데, 그 소리는 마치 여러 악기를 한데 섞어놓은 듯 기묘한 기류를 흘려냈다.

‘풍요로움과 혼란을 오가는 복잡한 소리를 한데 모은 것 같다.’

이안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기분이다.

마치 흑백으로 이뤄진 그림을 바라보듯.

비극과 희극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형상을 바라보는 듯 수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풍요로운 듯 활기찬 듯하면서도, 그 풍요로움이 숱한 희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듯 오묘한 선율이 선화의 심장을 자극했다.

이미 초안이라고 해도 당장 공개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선율.

하지만, 동시에 선화는 곡에서 흘러나오는 미묘한 공허감을 지우지 못했다.

일전에 이안이 만든 곡의 초안은 피아노 하나로도 곡이 가득 찬 듯 웅장한 기색을 보였는데.

이번 곡은 한 발자국 물러선 것처럼 무언가 묘한 빈자리가 느껴졌다.

“여기에 다른 악기들을 추가로 섭외할 예정입니다.”

다른 악기?

이안의 선언에 단원들이 재차 술렁거렸다.

이미 리히트에 있는 악기만으로도 전 세계 어느 오케스트라에서도 볼 수 없는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은가.

더 이상 다른 악기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싶었는데.

이안의 입에서 다른 악기라는 말이 나오자 사람들은 이제 궁금한 지경으로 이안에게 시선을 옮겼다.

“한국에서, 한국다운 음악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숭례문 앞에 무대가 마련될 예정이라고.

UN 콘서트에서 한국이 선택된 만큼, 한국적인 면모를 가장 많이 보여주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미 어느 오케스트라에서도 볼 수 없는 동서양의 조화를 보여주고 있건만.

거기에 대한민국이기에 할 수 있는 무대를 더하고 싶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그래서 다른 악기들과 함께 무대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안의 말에 단원들의 고개가 자연스레 끄덕여졌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콜라보를 한다고 한다면 단연 말렸을 것이다.

이미 서양 악기와 한국 악기의 조화 자체부터 말이 안 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선화는 그 말이 안 되는 일이 현실이 되는 것을 직접 목도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가야금 선율이 피아노에, 첼로에, 바이올린에 합해져 고고하고도 화려하게 나아가지 않았던가.

“단장님께서는 누구를 생각하고 계신가요?”

일전에 오케스트라 오디션 때도 국악을 포섭하기 위해 자신을 영입한 이안이니까.

이미 이안의 머릿속에는 모든 그림이 들어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선화의 질문에 이안은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이안이 입이 열렸을 때, 선화는 자신이 잘못 들었는지 재차 물었다.

그러나 이안의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정현삼 선생님, 그분과 함께하려고 합니다.”

***

덩기덕 쿵더러러 쿵기덕 쿵덕.

한국 민속촌이 오후부터 북장단에 시끄러웠다.

“얼쑤!”

오색찬란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둥근 마당에 모여 연무(演舞)를 펼친다.

줄지어 나란히 선 사람들은 천천히, 유려하게 곡선을 그리며 움직인다.

장구와 북, 징 등을 허리춤에 매단 사람들이 각자의 악기를 두드리며 소리를 내고, 선두에 선 사내는 꽹과리를 세차게 치며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내 상모패가 등장하여 하얀 천을 휘날리자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는다.

모든 연무가 끝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한복을 입은 청년들이 일제히 가장 선두에 있던 꽹과리꾼에게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남성은 나이가 고스란히 엿보이는 깊은 주름이 이마에 새겨져 있었다.

정현삼.

그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56호의 주인공이자, 농악의 대부였다.

무려 40년 넘는 세월 동안 한국 민속촌의 농악을 주관한 사람.

끊어져 가는 농악의 명맥을 잇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

“선생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 하거라.”

그런 현삼이 옷을 갈아입고 기다리던 찰나.

제자의 인솔에 방으로 청년이 들어왔다.

범의 눈길을 연상케 하는 냉철한 눈빛.

세상을 호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박이안의 방문이었다.

“바쁘신 몸을 오가도록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좋은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안은 민속촌에서 펼친 농악 연무를 모두 보았다고.

그에 대한 짧은 생각을 덧붙였다.

짧은 평가에도 무척 깊은 생각이 돋보인다고 생각하던 찰나.

이안이 건넨 악보를 받아든 현삼의 표정이 놀라움에 크게 펴졌다.

“혹시 국악을 전공하셨습니까?”

“그저 어깨너머로 배운 재주입니다.”

단원 중에 국악을 하는 사람이 있어 잠깐 익혔노라고.

가볍게 이야기하는 이안에 비해 현삼의 표정은 무척 냉철해졌다.

‘실로 대단한 재능이로다.’

겸손한 이안의 태도에 비해 현삼의 눈앞에 펼쳐진 악보는 기대 이상.

제대로 국악을 수학했다 하더라도 좀처럼 닿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음악을 넘어, 국악에 담긴 한국 특유의 ‘얼’을 가득 담은 듯한 선율.

양악(洋樂)으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고스란히 악보에 담겨 있었다.

당장 악보를 보는 것만으로도 꽹과리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명료하고 담백한 악보.

서양 악보를 좀처럼 접할 일이 없었던 현삼마저 악보를 보니 선율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미 악보를 보아도 놀라운데.

이어서 나온 이안의 말은 현삼을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아직 초안에 불구하니, 부족하다면 더욱 채우면 될 겁니다.”

현삼은 이안의 말이 농담이라 생각했다.

아니, 농담이어야 정상이었다.

악보에 이미 선율이 가득 담긴 것은 물론, 양악을 전공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치밀하게 박자를 배치하지 않았던가.

이미 이대로 무대에 올려도 손색이 없는 정도인데 초안이라니.

평정을 유지하려고 했던 현삼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하지만 이내, 현삼의 눈빛이 무척 날카로워졌다.

“왜 농악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사실, 현삼은 초기에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국악을 담는다고 했을 때 무척 비관적이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행보였으니까.

게다가 국악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현삼이기에, 그 둘이 절대 섞일 수 없다고 생각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을 편견이라고 깨닫게 해준 것이 리히트였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사장되어가는 농악을 왜, 어떤 이유에서 이안이 건드리려고 하는 것인지.

젊은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안의 생각이 궁금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안의 입에서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단순히 호기심과 호응을 얻어내기 위함이 아닌, 진정으로 농악을 깊게 수학하고 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이안의 입에서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들으면 들을수록 현삼은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와 동시에 현삼에게는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사람이라면 할 수 있다.’

여태껏 어떻게든 농악을 번성시키고 싶었건만.

매번 현삼은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가 있어도, 아무리 지원을 해도 한국 국악은 사장되어 가고 있는 실정.

특히, 마당극과 굿판에서 발전한 농악은 더욱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이라면.

이안이 선보이는 무대라면 그 모든 고정 관념을 깨버리고 농악을 더욱 큰 세상에 알릴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이미 마음을 정한 현삼은 흔쾌히 이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이안은 가방에서 또 다른 서류를 하나 더 꺼냈다.

“이것이 제가 그리는 그림입니다.”

악보 말고 준비한 게 또 있다고?

현삼은 얼떨떨한 마음으로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서류를 확인한 순간, 현삼은 다시금 놀라 이안을 쳐다봤다.

자신을 섭외할 자신감은 물론, 그 이상의 가치까지 꿰뚫어 보는 이안에.

현삼의 눈에 이전에는 차마 담지 못했던 열망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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