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82화 (182/250)

182화

최인녀 한복공방.

국가 공인 침선장(針線匠)인 최인녀 여사의 일터였다.

오로지 손바느질로만 만들어지는 한복이기에, 최인녀 명장의 옷은 한복 중에서도 최상품으로 취급되곤 했다.

40년 경력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손바느질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이미 정평이 나 있는 상태였다.

옷 한 벌에 적게는 수백, 많게는 수천에 달하는 값을 받는 그녀였기에.

그녀의 공방은 보통 무척 조용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명장님! 이번에 새로 들어온 요청만 다섯 건이에요.”

“명장님, 유럽에서 직접 오고 싶다는데 어떡할까요?”

“선입금만 10벌이래요! 명장님!”

잔잔한 분위기에서 손바느질을 하던 공방이 무척 시끄러워졌다.

하루에도 주문 문의가 끊이지 않는 것은 물론, 방송사에서는 직접 찾아와서 인터뷰를 요청하기까지.

그동안 인녀가 옷을 만든 시간을 고려하면, 1년 치 업무를 하루 만에 받은 셈이었다.

‘그게 이렇게까지 퍼질 줄이야.’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한복 의상 제작.

무척 거대한 자선 행사에, 권위 있는 콘서트라기에 침선장의 명예를 걸고 만들지 않았던가.

한복 특유의 곡선과 몸선을 돋보이게 만드는 디자인, 거기에 연주가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소매를 최소화하기까지.

모두에게 맞춤 한복을 제공하기 위해 며칠 밤낮을 새웠던 것이 생생했다.

덕분에 전통과 고급스러움이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의상이 완성된 것이다.

그 높은 품질과 우수한 디자인을 알아본 것일까.

언론에서도 인녀가 만든 한복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입은 옷은 무엇? 검은색과 대비되는 화려한 문양에 각국 패션계 주목]

[의상 전문 유튜버 실키, 한복 리뷰 영상을 업로드하여 화제.]

[미국 의상 잡지, Bouge, 대한민국의 전통 의상, 한복에 주목하다!]

리히트가 입은 의상이 대한민국의 전통 의상이라는 것이 밝혀지며 자연스레 한국으로 이목이 집중되었다.

리히트가 선보인 농악을 비롯해 무대의 배경이 되었던 숭례문까지.

이안과 리히트가 만들었던 선풍(旋風)이 한국을 넘어 해외 곳곳으로 불어닥치고 있었다.

‘이걸 예상했다면 조금 놀랍겠군.’

문득 인녀는 이안이 자신을 찾아왔던 것을 떠올렸다.

그의 어머니, 은희와의 인연으로 이안이 공방을 찾아온 날.

이안은 80명에 달하는 단원복을 주문했었다.

익히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활약은 들어왔던 인녀였기에, 그녀는 이안의 눈이 저 멀리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당장의 앞날보다 먼 미래를 예상하는 눈빛이었지.’

인녀 또한 수많은 유명 인사를 만나보면서 사람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사람의 치수를 재면 그 사람의 내면까지 바라보는 듯했으니까.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단원들 하나하나의 들뜸과 묘한 흥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중 이안은 지금의 한복 재단뿐만 아니라, 무대를, 더 나아가 앞으로의 오케스트라 향방까지 생각하는 깊은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 맡은 일도 할 수 있는 것이겠지.

‘저 멀리 해외에서 연설을 한댔던가?’

***

세 번째 뉴욕행.

재익과의 합동 무대와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데뷔전을 치렀던 것에 이어 세 번째로 미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 갔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방식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비행이 불편하진 않나요?”

“괜찮습니다 대통령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통령 전용기.

대통령을 비롯해 그 최측근만 탈 수 있는 전용기가 나를 태운 채 뉴욕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즈니스급 좌석으로 지정해준 것은 물론, 연설 때 진행할 연설문을 확인할 수 있는 회의실까지 갖춘 전용기.

나는 UN 사무총장의 특별 초대로 대한민국 특사 자격으로 전용기에 오를 수 있었다.

전용기에서 나를 가장 먼저 반긴 사람은 대통령 비서실장, 진웅이었다.

일전에 남북 정상회담 특별 무대를 맡았을 때, 교재 지원까지 할 수 있도록 진행했던 사람.

진웅은 나와 마주하자마자 그때가 아직도 떠오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게다가 먼저 보내주신 연설 원고 너무 좋았습니다. 손댈 곳이 없더군요.”

그래도 나라를 대표하여 내뱉는 말이니까.

내용에 따라 자칫 외교적인 결례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니 검수를 맡겼다.

하지만, 되레 진웅은 이보다 좋을 순 없다며.

원고를 보는 것만으로도 눈을 뗄 수 없었다고 표현했다.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는 비슷할 테니까.’

처음 문화교류 활성화를 위한 고위급회의라는 사실을 전달받았을 때.

어떤 내용으로 연설을 할지 생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화를 교류하고, 퍼뜨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내 기억에도, 내 전생의 기억에도 그 내용이 아주 상세히 담겨 있으니까.

그 이야기를 고스란히 꺼내는 것으로 연설문을 작성했다.

“도착했습니다 이안씨. 가시죠.”

나는 비서실장의 인솔을 따라 UN 본부 안으로 들어섰다.

뉴욕 UN 총회장.

테이블과 의자의 연속, 연단의 뒤에는 금속으로 된 UN의 엠블럼이 박혀있었다.

2천 개에 달하는 좌석에는 각국 정상급 인사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그들의 술렁임이 총회장에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있는 국제 평화기구의 면모가 고스란히 보이는 곳.

이내 각국 정상들이 회의를 진행하며 이야기를 점차 이어갔다.

문화교류에 대한 향방과, 어떻게 타 문화를 배제하지 않고 나눌 것인지 등 여러 이야기가 장내에서 오갔다.

이윽고 시간이 지났을 즈음.

비서실장이 내 차례라며 신호를 보냈다.

“그럼 오늘 회의를 빛내줄 초대 손님을 한 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UN 총회의장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람들이 박수로 나의 방문을 환영했다.

연단에 선 나는 좌석에 앉은 사람들을 주욱 쳐다보았다.

미국, 일본, 중국 등 세계 각국의 인사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들이 얼마나 나의 말에 감흥하고, 이를 그대로 실제로 옮길지는 알 수 없겠지.

하지만, 나는 그저 내가 준비하고, 내가 생각한 이야기를 할 뿐이다.

사무총장과 총회의장, 대통령에 대한 감사 인사를 덧붙임과 동시에 시작된 나의 소개.

연단에 오른 나는 한국식 인사 대신 말로써 인사를 대신했다.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 대통령 특사, 박이안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선택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술렁이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일제히 저마다 귀에 동시통역용 이어폰을 쓴 사람들이 내게 시선을 보냈다.

190여 개의 회원 가입국 사람들이 동시에 내게 눈길을 보내는 상황.

나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하듯, 내가 준비한 이야기를 고스란히 꺼내기 시작했다.

“흔히 선택에는 결과가 따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결과란 것이 단순한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이올린을 선택하고, 피아노를 선택하고, 오케스트라 창단을 선택했을 때.

모든 선택이 단지 선택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끝나지 않지 않았던가.

바이올린을 선택했을 때는 기계적인 연주에 반성하기도 하고, 피아노를 선택하곤 진정한 연주의 의미를 깨닫는가 하면, 오케스트라 창단 후에도 더욱 뚜렷한 사조를 펼칠 수 있었듯.

내가 선택한 것의 결과는 한마디로 정리하기엔 너무나 방대했다.

반성하는 생각들 속에서도 수많은 것을 깨닫고.

피아노에서도 전생을 비롯하여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음악에 대해 생각했던 것처럼.

나에게 선택은 곧 또 다른 것을 의미했다.

“모든 선택은 곧 변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생 잡던 바이올린을 놓고 피아노를 놓았을 때.

내 이야기는 바이올린의 끝이 아닌, 피아노의 시작으로 지속되지 않았던가.

이외에도 모든 것이 그랬다.

피아노를 통해 새로운 연주를 펼치는 것은 물론, 굳어있던 오른손을 유려하게 펼치기까지 변화가 일어났고.

어느덧 지금은 피아노를 넘어 오케스트라 전체를 다루며 음악을 만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선택에 이어 수많은 창작을 했기에, 새로운 기회를 얻고 더 나아갈 수 있었지.

“하지만, 때론 어떤 누군가에게는 그러한 선택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생 또한 그러지 않았던가.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지만,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귀족의 위치를 넘봤다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했던 것처럼.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북한처럼 체제의 이유로 제대로 피아노를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개발도상국에서는 문화생활은커녕 일상생활부터 고민해야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특히 UN은 세계 평화는 물론, 국제적으로 기아 문제를 중요시하는 단체이니 더욱 잘 알 것이다.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다수 보였다.

“그리하여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문화교류는 모두가 즐길 수 있을 때 달성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앉아서 클래식 선율을 듣고, 전시회를 거닐며 그림과 사진을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도록.

나를 비롯한 단원들이 직접 악기를 연주하고, 새로운 곡을 만들어내고, 그 음악들을 합쳐 완전히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내듯.

모든 이들이 음악을, 예술을, 문화를 향유할 수 있고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문화의 교류라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전수해줘서 따라 하는 것은 그저 모방에 불과하니까.

그러니 내가 하는 것은 그저 보여주는 것이다.

<환생>처럼 과거를 떠올린 심상을 그대로 표현하고, <영감>처럼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귀감이 될 수 있듯.

그 가능성을 알아본 누군가가 나처럼 새로운 창작을 할 것이니까.

“그러니 이번 회의를 통해, 저와 같은 창작가들이 세상 어디에서든 나타날 수 있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나의 말이 끝났을 때 장내는 잠깐 동안 숙연함이 감돌았다.

마치 다들 내가 했던 말을 다시금 되새김질해서 체득하듯.

한국 대표석에 앉아있던 대통령이 일어나서 박수를 친 것을 시작으로, 미국, 일본, 중국, 노르웨이 등 각국 대표들이 차례대로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어느덧 수백에 달한 모든 좌석에서 일어난 각국의 대표들이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

UN 자선 콘서트가 끝나기 무섭게.

니콜라와 홀랜트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현철에게 연락을 보냈다.

-이안씨께서는 별말 없으십니까?-

-혹 휴식을 방해했나요? 이안씨께서 무얼 하시나 궁금해서요.-

콘서트가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리고 했던 양반들이었다.

한국까지 찾아와서 이안을 기다리겠다고 선언할 때는 진득한 무게감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

끝난지 일주일 정도가 지난 시점에서 현철에게 재촉 아닌 재촉을 더하고 있었다.

‘꽤나 기대가 되는가 보구만.’

현철도 대한 오케를 이끌며 뮤지컬과 오페라 곡을 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그렇기에 현철도 두 장르가 완전히 다른 장르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흔히 오페라는 ‘드라마가 있는 음악’이고, 뮤지컬은 ‘음악이 있는 드라마’라고 하지 않는가.

단어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이지만,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오페라 출연자는 ‘가수’라고 하고, 뮤지컬 출연자는 ‘배우’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오페라가 조금 더 맞는 것 같지만.’

현철의 생각으로는 오페라가 뮤지컬보다 음악에 가깝다고 보았다.

오페라는 뿌리는 물론, 용어 자체가 모두 음악 용어에서 왔을 정도니까.

레지타티브, 아리아 등 모두 고대 음악에서 파생된 것.

게다가 대부분의 오페라들은 대사라고 할 것도 없이 모든 대사를 노래로 표현할 정도이니, 보다 음악에 가까운 활동을 하려면 오페라가 적합할 테지.

하지만, 현철이 이안의 의견을 모두 대변할 수는 없는 것.

현철 또한 이안의 의견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철이 보기에도 [모정]의 원고는 완숙된 극작가가 쓴 것을 단숨에 알 정도로 작품성이 높았으니까.

오죽하면 현철도 두 거장이 왜 하나의 원고에 목매다는지 알아챌 정도였다.

‘선택은 이안의 몫이겠지.’

만약 자신이 맡는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기간은 정해져 있고, 곡을 만드는 데 엄청난 시간이 요구되니까.

하지만, 이안은 아니었다.

20분이 넘어가는 교향곡 수준의 곡도 하루 이틀이면 완성할 정도.

집중만 한다면 이안이 오페라와 뮤지컬 곡 두 곡을 만드는데 일주일이 걸리지 않으리라.

이미 예전에도 영화 대역과 가요를 동시에 만든 전적이 있기에.

현철은 이번에도 이안이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안을 기다리는 것은 자신은 매니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침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두 사람한테서 연락 왔죠?-

“그래.”

-둘 다 한다고 전해주세요.-

그럼 그렇지.

현철은 익숙하다는 듯 이미 작성하고 있던 메일을 다시금 점검했다.

이안이라면 결코 하나를 놓치는 법이 없었으니까.

확인까지 마친 현철은 다시금 이안에게 물었다.

“그럼 돌아오는 건 내일이냐?”

대통령이 UN 회의 참석을 하고 돌아오는 것이 내일이니까.

함께 전용기를 타고 간 만큼, 이안도 그럴 것이라 생각해서 물은 것이다.

하지만, 이안의 대답은 사뭇 달랐다.

-아뇨, 아마 뉴욕에서 며칠 더 있을 것 같아요.-

뉴욕에 며칠 더 체류하겠다는 이안의 선언.

현철의 머릿속에서 이유가 될법한 것들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순간, 하나의 일정을 기억한 현철이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일이 연출 회의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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