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83화 (183/250)

183화

브로드웨이 한편에 자리 잡은 사무실.

니콜라와 그녀의 사단이 머무는 곳이었다.

회의실에는 벌써부터 스태프들이 분주한데, 나를 의식한 듯 눈길을 보내곤 했다.

그들의 수장, 니콜라는 내가 왔다는 소식에 밝은 미소를 띤 채 다가왔다.

“환영해요 이안씨. 어제 연설 무척 뜻깊었어요.”

가난과 성별, 인종과 성별을 떠나 모든 사람들이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 무척 인상 깊었다고.

그러한 폭넓은 생각에서 나온 곡들이 명곡이 되는 것이라며 칭찬 섞인 말을 내뱉었다.

“뮤지컬의 매력도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클래식이 단순히 음악만 다뤄 접하기 어렵고, 오페라 또한 고어들과 이탈리아 원어로 이뤄져서 대중들이 다소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죠.”

음악과 이야기가 동반된 것.

그것이 니콜라가 생각하는 뮤지컬의 최대 장점이라고 덧붙였다.

그 장점을 가장 부각시키기 위해 나를 필요로 했다고.

“후회 없는 참석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녀는 내 앞에서 결연한 의지를 다지곤 곧바로 회의에 들어갔다.

연출 회의에서는 원고를 어떻게 뮤지컬로 변환할까가 가장 먼저 화두에 올랐다.

이번 뮤지컬은 약 3시간에 걸쳐 이뤄질 예정.

그 사이 에피소드를 어떻게 음악으로 바꿀지가 관건이었다.

주인공의 행복한 나날에서, 나치 독일의 선언,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피해를 입는 주인공, 아만다의 이야기까지.

여러 이야기들이 곡으로 변경되는 목록에 올랐다.

그중 가장 니콜라가 신경 쓰는 부분은 1부의 마지막.

니콜라가 내게 요청한 바로 그 부분이었다.

‘주인공의 절망이 고스란히 펼쳐지는 부분.’

나치 독일이 은신처를 습격한 상태.

[모정]의 주인공인 아만다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숨었다.

하지만, 겁을 먹은 아이가 울기 시작한 것.

아만다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우는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독일군이 지나가고, 아만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비극이 벌어진 지 오래였다.

아이의 숨이 멎은 것이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한 행동이 되레 아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아이러니.’

작품 속 아만다의 심리가 극에 달하는 시발점이 되는 부분.

진정 자신이 구하고 싶었던 것은 아이인지, 아니면 자신인지에 대한 고뇌를 시작으로.

후회로 점철된 오열 섞인 대사가 첨가된 부분이었다.

원고에 적힌 서술과 대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에 자연스레 처절한 아만다의 이미지가 그려질 정도.

동시에 내 머릿속에도 묘한 선율과 함께 가상의 오선지에 음표들이 맺혔다.

막 머릿속에서 정리를 더하고 있을 무렵.

니콜라가 넌지시 내게 물었다.

“혹시 이안씨의 조언을 들을 수 있을까요?”

일전에 니콜라가 요청한 부분이었으니까.

그동안 나의 행동으로 봤을 때 분명 무언가 생각이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아무래도 처절함이 가장 강조되어야겠죠.”

어미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포탄이 떨어지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스러운 상황에.

아만다에게 아이는 지켜야 하는 대상이자, 자신의 목표였을 것이다.

그러한 목표가 단숨에 사라졌다면 그건 ‘절망’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감히 표현하지 못하는 슬픔이 몰려오겠지.

“저라면 피아노를 베이스로 하고, 바이올린과 클라리넷을 더해서 곡을 만들어갈 것 같습니다.”

베이스는 당연히 피아노가 들어가야 할 것이다.

주인공이 피아니스트라는 설정인 만큼, 피아노 자체가 주인공을 대변하는 매개체가 될 테니까.

그사이에 들어간 바이올린은 주인공의 심상을 표현하는 것.

격렬하게 변하는 주인공의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바이올린만 한 것이 없었다.

느리게 현을 마찰시키면 담백하고도 은은한 소리가 나오고, 빠르게 현을 마찰시키면 날카롭고 급박한 소리가 나오니까.

니콜라도 이를 충분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관악 중에서는 클라리넷만큼 다양하게 나오는 게 없으니까요. 금관악기 특유의 금속음은 과하게 느껴질 테니까요.”

벌써 그녀의 눈은 뭔가 더 많은 것을 내다본 듯 빛나고 있었다.

아마 이 정도 짤막하게 이야기해도 내가 그리는 것과 비슷한 것을 생각하고 있을 테지.

니콜라 또한 뮤지컬 업계에서는 뛰어난 거장이었으니까.

막 클라이맥스 파트에 대한 논의를 마치고 다음 파트로 넘어가려던 찰나.

회의실 문에 누군가 노크를 했다.

문이 열렸을 때, 스태프는 물론 니콜라가 환한 표정을 지으며 손님을 맞이했다.

“크리스티아나! 연락도 없이 웬일이에요?”

“감독님은 항상 연출 회의를 하시잖아요. 제가 정확하게 찾아왔나 보네요?”

생글한 미소를 띠며 들어온 여인.

까만 눈썹과 동그란 눈, 붉은 입술이 트레이드마크인 그녀는 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크리스티아나 그린.

데뷔 시절부터 특유의 눈망울과 핏빛에 가까운 입술은 백설공주의 환생이라며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곤 했다.

명품 의류 잡지사에 일하며 겪는 에피소드를 다룬 영화는 물론, 히어로 영화의 히로인으로 출연하며 굵직한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그중에서도 크리스티아나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준 것은 뮤지컬 영화였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비련의 여주인공을 연기하기 위해 11kg을 감량한 것은 물론, 넘버 또한 본인이 부른 것이 화제가 되었던 것.

여러 해 동안 흔들리지 않는 연기력을 보유한 크리스티아나는 어느덧 중견 배우 반열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스크린과 무대에서 ‘흥행 보증 수표’로 통하고 있었다.

“연출에 참여하진 않지만, 미리 보는 게 연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크리스티아나의 말에 니콜라는 박수를 치며 칭찬을 이어갔다.

이렇게 오랜 세월 연기를 하면서 허영심이 깃들지 않은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거라며.

언제나 연기에 충실하는 모습이 롱런의 비결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중 크리스티아나가 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나를 발견한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다가왔다.

“박이안 단장님 맞으시죠?!”

다소 격앙된 목소리에 크리스티아나 특유의 둥글고 큰 눈망울에 기대감이 맺혔다.

무언가 커다란 것을 달성했다는 듯.

그녀의 웃음에는 만족감마저 묻어났다.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혹시 만날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이렇게 만나 뵙네요.”

어느 순간부터 크리스티아나의 시선이 니콜라보다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니콜라보다, 회의보다, 다른 것이 궁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

연출 회의에서 어느 정도의 초안을 마쳐둔 상태.

이제 이것을 곡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내게 주어진 것이었다.

뮤지컬의 곡들은 대부분 기준 곡을 기점으로 일정 편곡을 이뤄내어 만드는 것이 대부분.

그렇기에 클라이맥스를 자랑하는 1부의 마지막 곡을 완성하는 것이 첫 번째였다.

연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한국.

곡 제작을 위해 가장 먼저 한 것은 에비게일을 부른 것이었다.

나는 1부 클라이맥스가 펼쳐지는 부분의 원고를 건넸다.

차근히 원고를 읽던 에비게일은 금세 극 중 아만다와 동화된 듯 안타까운 기색을 보이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글로 보는 것만으로도 심정이 전해지는 기분이에요.”

이보다 더 참담한 심정을 어떻게 보여주겠냐며.

에비게일은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친다는 얼굴로 글을 평가했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이 낳은 아이를 죽이고, 이를 평생 후회하며 살아갈 주인공.

나머지 인생을 폐인처럼 살아갈 원인이자, 그녀의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사건일 터.

그러한 격정적인 순간을 표현하려면 보통 선율로는 그 감정을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곡이 메인이 되나요?”

에비게일도 뮤지컬에 대한 이해도가 꽤 높은지라 곧바로 나의 생각을 알아챘다.

피아노를 비롯해 바이올린으로 시작하여 곡의 포문을 열 것이라고.

상황을 들은 에비게일의 눈에 흥미로운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게 얼핏 만들어본 초안입니다.”

“단장님 어제 귀국하신 거 아니에요?”

프린트된 악보를 건네자 에비게일이 사뭇 놀라며 종이를 받아들었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작성하고 곧바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컴퓨터로 옮겼으니까 가능한 일.

이미 회의를 하면서 대부분의 선율을 머릿속에 그려낸지라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단지 에비게일이 악보를 넘기며 혀를 찰 뿐.

“거기에 클라리넷이 들어갈 예정입니다.”

대표적인 목관악기 중 하나.

저음고 중음, 고음까지 모든 음역대를 낼 수 있음과 동시에 중후함, 안정감, 화려함까지 모두 낼 수 있는 악기였다.

특히 베이스 클라리넷까지 활용한다면 암울한 곡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가장 효과적일 터.

그래서 고안한 것이 세 개의 악기를 사용한 연주였다.

미리 이야기한 대로, 클라리넷을 담당하는 단원들이 차례대로 피아노 앞에 모였다.

그들에게도 악보를 건넨 후 나는 곧장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Largo.

아주 느리고, 낮은음이 음산하게 체임버 홀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단원들도 순간 연주를 멈추고 피아노를 바라볼 정도로 암울하고 짙은 음색.

마치 땅거미가 기어가듯 선율이 깔린다.

내가 눈짓하자 그 위에 바이올린의 소리가 한차례 깔리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상황을 부정하듯 느리고 천천히 흐르는 음색.

하지만, 곧 상황을 알아가고 부정하는 듯 군데군데 강렬한 선율이 더해진다.

에비게일도 상황을 생각하는 듯, 연주를 이어가면서도 미간이 자꾸만 찌푸려진다.

자신의 손으로, 누군가를 죽인 것, 그것도 자신의 아이를 말이다.

에비게일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기세로 처절한 연주를 이어갔다.

“1번, 2번 클라리넷부터 들어가죠.”

내 말에 클라리넷 연주가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를 낸다.

악보에 따라 하나는 중음으로, 하나는 저음으로.

바이올린이 만들어가는 선율 아래에 깔려 그 소리의 볼륨감을 높이듯.

아주 간결한 화음이지만, 화음으로 더해지자 완전히 색다른 소리로 재탄생된다.

“1번과 2번 줄이고, 베이스.”

짧은 지시에 기존 클라리넷 연주자가 손을 내리고, 베이스 연주가가 악기를 고쳐 들었다.

일반 클라리넷의 두 배 크기에 베이스 클라리넷이 웅장한 기색으로 소리를 낸다.

본디 재즈에서 경쾌한 분위기로 그루브를 만들 때 자주 사용하는 악기이거늘.

하나의 저음을 진득하게 내자 마치 안개가 쌓인 듯 오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 사이에서 고뇌.’

피아노 선율이 점차 격렬해지자 에비게일의 바이올린 선율도 덩달아 빠르고 날카롭게 변해간다.

자신이 아이를 죽였음을 자각하고 후회막심한 감정이 들끓어 오르는 곡의 클라이맥스.

자신의 목을 조르는 듯한 답답하고 압박감 있는 선율이 순식간에 체임버홀에 차오른다.

마무리 선율로 마감할 즈음.

에비게일은 반쯤 녹초가 된 얼굴로 바이올린을 내려두었다.

“감정 조절에 실패했네요. 죄송합니다 단장님.”

그럴 수밖에.

에비게일 또한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잘 알고 있을 터.

원고를 읽을 때부터 크게 동화되었으니 강렬하게 나오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 부분은 충분히 수정해나가면 되는 과정.

문득 자신이 연주한 것을 다시금 살핀 에비게일이 물었다.

“이 곡의 제목은 뭐로 하실 건가요?”

에비게일의 질문에 클라리넷은 물론, 곡을 듣던 다른 단원들도 일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격정적이고 서글픈 선율이 강조되는 곡.

“<갈등>. 이번 곡의 제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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