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84화 (184/250)

184화

새벽 3시.

모두가 잠들고도 남을 시간임에도 음악실 불은 꺼지지 않았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서로 번갈아 가며 소리를 내고, 그 소리들은 내 머릿속에 다시금 재정립된다.

이번 뮤지컬과 오페라에 사용될 음악, <갈등>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두 매체는 서로 다르니까.’

뮤지컬은 음악이 있는 서사이고, 오페라는 서사가 있는 음악이다.

오페라가 조금 더 음악에 치중되어 있고, 더욱 격정적으로 음악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미 뮤지컬에 활용될 <갈등>은 완성되었으니.

이제는 오페라에 활용될 <갈등>을 만드는 것이 순서였다.

홀랜트가 보내온 연출 초안.

라이벌이라고 불린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같은 부분을 메인넘버로 꼽고 있었다.

극 중 아만다의 처절함이 극에 달하는 부분.

뮤지컬은 물론, 오페라 또한 그 부분의 곡을 메인으로 잡고 있었다.

‘이미 그림은 충분하다.’

다른 장르라고 해서 완전히 새로운 곡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지금 만들어낸 선율이 아만다의 처절함과 고뇌,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완전히 같은 곡을 올릴 순 없는 법.

게다가 오페라에서는 더욱 화려한 소프라노와 성악 세션이 예정되어 있으니 더 웅장하고 화려한 선율이 필요했다.

이미 머릿속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선율은 완성이 되었다.

나는 차근히 눈을 감고 단원들이 가진 소리들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클라리넷을 대체하는 게 먼저겠지.’

뮤지컬 버전의 <갈등>에 넣었던 클라리넷.

깊은 수렁을 나타냄과 동시에 선율의 우울감을 더하기 위해 넣은 악기였다.

하지만, 오페라에서는 그러한 서사보다는 음악이 더욱 부각되어야 하기에.

다른 악기가 필요하다.

‘시작은 타악기.’

심장의 두근거림과 긴장으로 몰아치는 심리 변화를 나타낼 수 있는 소리.

팀파니를 비롯한 타악 세션의 소리가 머릿속으로 절로 떠오른다.

느린 박자로 앞선 음색을 보조해주다가도 격정으로 치달으면 쉴 새 없이 몰아치도록.

그 밖에 낮은음이되, 단순히 암울한 느낌 대신 웅장한 기색을 표현하기 위한 갖가지 악기들이 점차 가상의 악보에 맺혀간다.

완성된 악보에서 가상의 선율이 차례대로 귓가에 들려오듯 울려온다.

하나의 바이올린이 만들었던 선율은 여러 대로 바뀌어 웅장해지고, 클라리넷 대신 타악과 다른 목관악기가 들어서며 그 깊이를 더해간다.

이미 머릿속에 맺힌 곡은 완성본 그 이상의 것이 되어 있었다.

나는 두 사람에 똑같은 메일을 보냈다.

-극 중 메인 곡이 완성되었습니다.-

***

체임버홀에 들어서자마자 니콜라와 홀랜트는 서로를 바라보며 묘한 스파크를 튀겼다.

곡이 완성되었다는 말에 둘은 한달음에 달려왔다.

직접 기적에 가까운 선율을 목도하기 위해서 왔건만.

두 사람은 서로 이빨이라도 드러낼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바쁘실 텐데 오가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안씨, 오케스트라 전체보다 제가 혼자 오는 게 훨씬 낫죠.”

“여기 온 건 제 선택 아니겠습니까.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이안의 양해에 두 거장은 당치도 않다며 손사래를 쳤다.

무엇보다 궁금했던 두 사람이었으니까.

비록 초연의 시작.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단 한 번의 무대만 설 예정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니콜라와 홀랜트는 감지덕지했다.

처음에는 곡을 받는 것만으로도 벅차오를 지경이었으니까.

되레 무대에 한 번 올라오겠다는 이안의 선언에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뮤지컬부터 들어보시죠.”

니콜라가 넌지시 자신 있는 미소를 머금은 채 홀랜트를 바라보았다.

이안은 설명 대신 직접 곧바로 이어갔다.

시작은 뮤지컬에 들어갈 곡.

이안의 지시에 바이올린과 클라리넷 연주가를 제외한 단원들이 일제히 악기를 내려놓았다.

‘니콜라도 여기를 중점으로 잡았군.’

홀랜트가 니콜라를 바라보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같은 원고여도 두 사람의 성향은 물론, 장르적 특징이 다르다 보니 노래로 표현하는 부분이 대부분 겹치지 않았다.

하지만, 오직 한 곳.

자신의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해친 어머니의 절규가 담긴 장면은 자신이 만든 오페라와 뮤지컬 둘 다 중요 장면으로 꼽은 상태였다.

‘선율만으로도 욕심이 난다.’

베이스로 펼쳐지는 피아노에서부터 슬픔이 묻어난다.

그에 더해지는 바이올린 선율은 마치 사람의 처절한 목소리처럼 압도적으로 흘러간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보잉은 절망의 수렁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의 발버둥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거기에 저음역대 클라리넷 음색이 더해지자 곡의 분위기는 더욱 짙고 절망적인 기운으로 치닫는다.

홀랜트는 처음으로 니콜라가 부러웠다.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아련해지면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선율.

니콜라도 직접 곡을 목도하곤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이안은 땀을 잠깐 닦아내곤 곧바로 다음 차례를 이어갔다.

“이번엔 오페라입니다.”

이안이 신호하자 이번에는 국악을 제외한 모든 단원들이 악기를 고쳐 들었다.

악기를 고쳐드는 단원을 보는 것만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홀랜트에게 몰아닥치는 듯했다.

이내 연주를 펼치는 리히트 오케스트라에 홀랜트는 입을 벌렸다.

‘이게 가능하다고?!’

이안에게 곡을 부탁한 지 채 1달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심지어 그동안 이안은 UN 자선 콘서트 참여는 물론, 뉴욕 UN 본부까지 가면서 엄청난 일정을 소화했다고 들었는데.

그 사이에 뮤지컬은 물론, 오페라 버전의 곡을 만들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일전에 이안이 뉴욕 브로드웨이를 방문했을 때, 니콜라가 얼마나 자랑을 했던가.

사실 홀랜트는 오늘 초안에 대한 회의만 해도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한국행을 택한 상태였다.

그런데 뜻밖의 선물처럼 펼쳐지는 오페라 버전의 음악, 거기다 그 선율까지 상상을 초월했다.

전개 자체는 뮤지컬 버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홀랜트도 차근히 들었을 때 앞서 연주한 것과 같은 화음과 조성을 활용했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펼쳐지는 음악은 이전의 연주를 전혀 생각나지 않게 할 정도로 완벽했으며, 색달랐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으로 중심을 만들어가는 것은 같았지만, 이번에는 클라리넷 대신 바순과 오보에 같은 다른 목관악기가 사용된다.

점차 격정적으로 치닫자 팀파니를 비롯한 타악기가 극 중 아만다의 심장 소리를 형상화하듯 몰아친다.

연주를 이어가는 사이, 홀랜트는 몇 번씩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벅차오르는 슬픔과 자신에 대한 분노.

원고 속 아만다의 절규가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힘을 빌려 고스란히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연주가 끝나자 홀랜트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와 동시에 한가지 생각이 홀랜트의 머릿속에 감돌았다.

‘시츠프로브를 여기서 할 수 있는지 물어야겠어.’

완성된 곡을 바탕으로 가수들과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리허설, 시츠프로브.

특히 음악을 중시하는 오페라와 뮤지컬에서는 중요한 대목이었다.

그러나 결이 다르다면, 이번 오페라의 라인업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

시드니에서도 내로라하는 오페라 가수들이 이번 [모정]의 무대에 오르기로 한 상태였다.

출연 몸값만 억대에 달하는 사람들을 한국에 부르려는 이유는 단 하나.

오직 리히트의 홈그라운드에서 최상의 연습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시카고.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파티장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영화계 인사들이 모두 모인 파티.

그런 파티장에 한 남자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에드워드 크리스토퍼.

그는 2008년 데뷔작, [분투]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총 11편의 장편 영화를 연출한 영화감독이었다.

‘영화계의 마에스트로’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그의 입지는 무척 단단했다.

심지어 영화의 기획을 비롯해 각본과 연출까지 모두 도맡는 에드워드였기에, 주변에서는 그를 상상력의 귀재라고 칭하곤 했다.

그러한 재능이 뒷받침되어서일까.

그는 올해 최고 흥행 감독 1위 자리에 오른 것은 물론, 영화 한 편으로 10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런 에드워드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에.

에드워드의 등장에 주변에는 삽시간으로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그와 친분이 있는 동료 감독을 비롯해 배우들까지.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에드워드의 목 부근에 가 있었다.

“자네 나비넥타이가 멋있군.”

검은 정장과 어울리지 않는 노란 나비넥타이.

그것은 일종의 은어였다.

‘새로운 무언가를 준비 중이다.’라는 뜻의 은어.

파파라치와 기자들의 질문에 지친 그가 나비넥타이를 맸을 때만 인터뷰를 허락하면서 만들어진 것인데.

지금은 어느덧 에드워드도 즐기는 그의 시그니처가 되어 있었다.

이젠 에드워드가 나비넥타이를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언론계가 뜨겁게 달아오를 정도.

지금도 나비넥타이를 보고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에드워드는 시선을 의식한 듯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갔다.

“오랜만에 예술적인 영화를 한 편 만들어볼까 하네.”

그의 말에 주변에 몰린 사람들이 더욱 놀라운 기색을 더했다.

이미 에드워드는 대중성과 예술성을 한 번에 잡은 감독으로 유명한 사람이니까.

히어로 영화에서도 선악에 대한 철학을 매력적으로 넣어 극찬을 받았던 터.

그런 에드워드가 본격적으로 예술을 담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선언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한 번 이야기해줄 수 있겠는가?”

한 감독의 요청에 에드워드는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영화의 이야기를 하나둘 꺼내놓았다.

영화의 가제는 [미래음악].

어떠한 계기로 미래로 가게 된 천재 음악가가 음악이 사라진 미래에서 음악을 전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효율 추구를 위해 음악이 사라진 피폐한 미래와, 그 속에서도 음악을 하려는 주인공의 대비 등.

인간에 대한 철학을 담으려는 의지에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뭇 교과서적인 내용일 수 있는데도, 에드워드라면 이를 대중들에게도 매력적으로 어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때 이야기를 듣던 한 사람이 에드워드에게 반문했다.

“천재 음악가라… 누군가 생각나는 대목이구만.”

“당연하지. 그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낸 이야기니까.”

이미 영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이안을 보고 ‘음악계의 젊은 거장’이라고 칭하지 않는가.

피아니스트로서 이름을 알린 것은 물론, 베토벤의 미완성곡을 완성하기까지.

불가능한 일을 가능으로 만드는 이안의 행보를 모티브로 삼아 필름에 담고 싶었다.

“하지만, 그만한 인물의 대역을 어찌 구하려고?”

영화에서도 음악물은 무척 도전적인 장르였다.

쉽사리 마이너 장르로 빠지기 쉽고, 뮤지컬과 같은 실제 음악에 가까운 것보다 못하다는 평을 받기 십상이니까.

상업성이 짙은 영화계에서 완전히 새로운 음악 영화를 만드는 것은 무척 도전이 필요한 일이었다.

“한 명 있지. 그만한 인물이.”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한 사람이 머물렀다.

미완성인 상태로 200년 채 방치되었던 베토벤의 곡을 완성한 피아니스트.

전무후무한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세계를 호령하는 단장.

에드워드의 생각을 들은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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