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85화 (185/250)

185화

조개껍데기를 이어 붙여 만든 것 같은 입체적인 외관, 물결을 떠오르게 하는 황금빛 내부.

시드니의 상징이자, 오페라의 성지 중 하나인 오페라 하우스.

오페라 버전의 [모정]이 펼쳐지는 공간이었다.

“Bravo!”

공연 전날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드레스 리허설.

리허설이 끝나자 홀랜트가 박수를 치며 소리를 냈다.

3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을 그대로 펼쳐 보인 탓에 무대 위 가수들은 물론, 무대 아래 단원들도 땀에 젖은 상태였다.

홀랜트는 손수 오케스트라 피트에 내려와 감탄 어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저 듣는다는 표현으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군요.”

벌써부터 무대가 기대된다며.

오페라 감독 인생에서 내일이 오길 기도한 적은 오늘이 처음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문득, 활기찬 이야기를 이어가던 홀랜트는 진지한 기색으로 나를 쳐다봤다.

“사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제가 안 한다고 했을 겁니다.”

그 한마디에 나는 홀랜트가 니콜라를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라이벌로 비견되는 두 거장.

분명 이번에도 같은 사람이 만든 곡으로 극을 이끌어간다는 면에서 수많은 평론가들의 말이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비교하기 딱 좋은 상황이 아닌가.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한 반응들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젠 궁금할 지경입니다. 오페라가 어떻게 펼쳐질지, 뮤지컬이 어떻게 만들어질지. 아마 니콜라 녀석도 저와 같은 생각일 겁니다.”

한국에서 처음 <갈등>을 보았을 때.

홀랜트는 니콜라가 오페라 버전의 <갈등>을 듣는 모습을 봤다고 덧붙였다.

평소처럼 묘한 질투와 경쟁심이 묻은 눈길이 아닌, 경외감에 젖은 눈빛.

순간, 평생 라이벌로 부딪치던 둘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결코 서로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던 자신과 니콜라가 동시에 같은 표정을 지은 것은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덕분에 오십이 넘어서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홀랜트는 허리를 숙여 가며 내게 감사 표현을 더 했다.

더 이상 스스로 눈을 가려버리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어찌 보면 저보다 리히트 단원들이 더욱 대단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이안씨의 역할이 가장 컸겠죠?”

그는 말함과 동시에 단원들을 바라봤다.

드레스 리허설이 끝나 정리에 바쁜 여타 스태프와 가수와 달리, 단원들은 마지막까지 서로의 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얘기하려고 했던 것들은 또 다른 단원이 눈치채고 조언을 더하고, 이를 상대방은 곧바로 받아들이며 더욱 유려한 선율이 만들어진다.

다른 악기임에도,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수용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일 지경이라고 덧붙였다.

계속해서 찬사를 더하는 홀랜트에게 나는 짤막한 한 마디를 건넸다.

“그래도 오페라는 모름지기 가수의 역량이 아니겠습니까.”

“그 역량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것도 이안씨이지 않습니까.”

홀랜트가 말을 이어가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얕게 미소진 눈가에는 내 말에 대한 동의와 함께 묘한 경외감이 함께 묻어있었다.

아마 시츠프로브에 더불어 내가 건넨 말 때문이겠지.

“이안씨~”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번 오페라의 주인공, 아만다를 맡은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

진주미.

어느덧 오십의 나이를 앞둔 그녀는 한국이 발굴해낸 세계적인 소프라노 성악가였다.

5년제인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을 단 2년 만에 주파한 천재.

심지어 그녀는 플루트와 피콜로 같은 기악의 선율을 모방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은 고음을 펼칠 수 있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coloratura soprano)였다.

서양 고전 음악의 대가, 헤르베르트 민 카라벤도 생전에 그녀의 목소리를 ‘신의 선물’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을 정도.

천상과 지상을 이어주는 목소리라며 극찬했다.

매번 쟁쟁한 실력자들이 나오는 성악계에서, 3대 소프라노에서 이름이 빠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처음 진주미가 한국에서 시츠프로브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오랜만에 본국으로 간다는 생각에 조금 들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의아함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네.’

홀랜트는 오페라 가수의 대우를 극진하게 해주기로 유명했다.

제대로 된 목소리는 온전한 컨디션에서 나온다며.

오페라 가수들의 목소리 보전을 위해 최대한 피곤하지 않게 배려하는 것은 물론, 지원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홀랜트가 갑작스레 모든 가수들을 한국으로 불러 모았다.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 이외에는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혹시…?’

오페라계에서도 까다롭기로 소문이 자자한 거장, 홀랜트다.

그가 한국행을 택할 정도라면 지대한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주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만한 인물은 단 하나였다.

“반갑습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단장, 박이안입니다.”

주미를 포함한 모든 오페라 가수들이 이안의 등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홀랜트가 끝까지 비밀로 한 탓도 있었지만, 이안이 실제로 참여할 줄은 몰랐던 것.

하지만, 그녀를 포함한 가수들이 진짜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 선율은 대체…’

오페라 가수를 비롯해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사람들은 감정 조절이 필수다.

감정을 듬뿍 담아 사람들에게 그 감정을 표현하되, 자신이 감정에 삼켜져 눈물을 흘려선 안 된다.

특히 오페라는 더욱 격정적인 심리를 담기에 그러한 감정에 휘말리기 쉽다.

그 조절을 하는 데 30년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하지만, 주미를 포함한 동료 오페라 가수들은 리히트가 펼친 <갈등>에 모두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내가 울지 않고 이 곡을 부를 수 있을까?’

선율을 듣는 것만으로도 끝없는 감정의 파도에 휩쓸린 기분이다.

원고와 대사, 가사로만 맞닥뜨렸던 주인공이 눈앞에 당도한 것처럼.

연주를 들으면 들을수록 주인공의 뜻이 선율의 힘을 빌려 주미에게 곧바로 꽂히는 것만 같았다.

이안이라는 젊은 거장이 만들어낸 환상.

그 환상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서 다른 이들에게 펼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뇌가 떠올랐다.

그에 대한 답을 준 것도 이안이었다.

“곡의 감정을 부정하면서 노래를 불러보세요.”

“부정하라고요?”

“네. 아마 실제 아만다라면 그랬을 겁니다.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싶을 테니까요.”

아이의 죽음도, 자신이 죽였다는 사실도, 지금 눈앞에 펼쳐진 참상도.

그러니 머릿속에 드는 감정들을 모조리 부정하면서 감정에 삼켜지지 말라는 조언이었다.

처음 주미는 아이러니함을 내려놓지 못했다.

감정을 잡으면서, 잡지 말라는 것과 같은 이치였으니까.

하지만 몇 차례 연습을 더 하던 주미는 금세 이안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안에게서 놀라운 점을 하나 더 발견할 수 있었다.

“테너 a발음에서 과하게 낮아지는 것 같습니다. 주의해주시길 바랍니다.”

오페라의 처음과 끝까지 음악을 점검하는 시츠프로브.

모든 오페라 가수들의 발성을 들은 이안은 각자에 맞는 소리에 대한 언급을 덧붙였다.

음을 맞추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사항은 물론, 발음의 차이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까지.

30년 차 베테랑인 주미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생님은 이미 충분하시지만, 조금의 떨림을 의도적으로 넣으면 처절함이 더욱 돋보일 것 같습니다.”

아주 사소한 소리의 차이로 분위기를 만드는 것까지.

주미는 마치 모든 지휘자의 귀감이 되었던 카라벤이 살아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모든 소리를 잡아낼 정도로 소름 돋는 청음력에 소리의 특이점을 파악하는 순발력까지.

홀랜트가 이유를 부연설명 하지 않았음에도.

어느덧 주미는 자신이 한국으로 온 이유를 체감하고 있었다.

***

어느덧 3천 석에 가까운 좌석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오페라 하우스의 디자인처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물결처럼 관중석을 맴돌았다.

관객들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오케스트라 피트에 있음에도 그 소리가 여지없이 들렸다.

수천의 관객을 앞두고 긴장할 만도 하건만.

이제 단원들도 긴장보다는 기대 어린 시선으로 악기를 매만졌다.

나는 물론, 단원들의 눈에 비친 생각은 모두 같았다.

‘곡에 담긴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내 예정된 시간이 되자 밝게 켜져 있던 조명들이 점차 멎어들기 시작했다.

공연에 방해되지 않을 만큼 연한 불빛 아래.

내 손짓에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가장 먼저 관객들을 맞이했다.

이어서 나온 오페라 장면들.

행복한 나날에 이어, 나치의 침략, 혼란스러워하는 아만다까지.

원고에서 보았던 [모정]의 이야기가 오페라로 재탄생되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1부 클라이맥스.

<갈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새야. 이제 그만 일어나서 노래를 불러다오.”

아만다 역의 주미가 허공을 바라본 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움직이지 않는 아이를 차마 바라보지 못한 채 이어지는 노랫소리.

현실을 믿지 못하는 아만다의 구슬픈 음성이 소프라노 주미의 입을 빌려 이야기를 꺼내간다.

“너의 비극을 막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거늘, 진정 막고 싶었던 것은 나의 비극이었구나.”

아만다의 생각은 죽음의 5단계를 답습하고 있었다.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에 부정하고, 자신의 행동에 분노한다.

이내 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더니,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고 우울한 기색으로 아이의 사체를 쳐다본다.

하지만,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수용의 단계를 벗어난 탓에 그녀는 폐인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

선율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교적 평이한 선율은 바이올린이 가세하며 무척 불안정한 소리를 내고, 그 소리는 고스란히 아만다의 감정을 내비친다.

분노에 접어들면서 팀파니를 비롯한 타악 세션들이 격렬한 두드림을 이어가고.

더욱 격렬해진 바이올린의 보잉들이 마치 천둥처럼 오페라 하우스를 가득 메운다.

객석에서는 차마 참지 못하는 숨을 내뱉는 사람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터져 나오는 소리.

그것이 오페라가 보여주는 묘미였다.

점차 극은 막바지에 달하고.

피아노를 차마 치지 못하는 장면에서 [모정]은 막을 내렸다.

모든 조명이 꺼지고 끝났을 즘, 내 지휘에 맞춰 타악기와 금관악기가 경쾌한 선율을 내뱉기 시작했다.

커튼콜.

가수와 배우들이 방문한 관객들에게 직접 인사를 건네고, 극의 끝을 알리는 시간이었다.

심각한 얼굴로 노래와 연기를 이어가던 가수들이 이제는 환한 표정을 지은 채 관객들을 마주했다.

회색 머리에 폐인이 된 아만다를 연기한 주미도 감회가 새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관객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관객들은 그러한 가수들의 열정에 화답하기 위해, 열성적인 박수와 환호성을 이어갔다.

커튼콜이 막바지로 향하고 있을 찰나.

오케스트라 피트의 지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어져 스포트라이트가 화려하게 펼쳐지더니 나와 리히트 오케스트라를 비췄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가 더욱 격렬한 기세로 오페라 하우스를 채웠다.

‘보통 오케스트라한테 이런 스포트라이트를 주진 않는데.’

오페라와 뮤지컬에서의 오케스트라는 숨겨진 곳에서 가수와 배우를 보조하는 역할에 불과하니까.

대부분 스포트라이트는 무대 위 사람들에게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나는 곧바로 이 스포트라이트를 누가 주문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저만치 관리부스 창문 너머에서 홀랜트가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

나를 바라보는 사람은 홀랜트뿐만이 아니었다.

단원들을 비롯해 무대 위에 있던 가수들의 시선도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말로 애써 표현하지 않았지만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 수 있는 눈빛.

나는 그들에게 화답하기 위해 그저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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