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86화 (186/250)

186화

오페라 [모정]을 끝내고 나온 순간.

나와 단원들은 수많은 인파를 마주해야 했다.

홀랜트가 고용한 보디가드들이 인간 울타리를 만들어서 길을 텄다.

하지만, 그 또한 엄청난 사람들의 성원에 듬직한 보디가드의 몸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오늘 공연을 위해 세계 각지에서 관객들이 몰렸답니다.”

이동하면서 홀랜트는 오늘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특히, 오늘 하루 공연을 보기 위한 경쟁률이 무려 100:1가량이었다며.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직접 오르는 무대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티켓 홈페이지가 마비되고 매진되는 것은 기본.

심지어는 취소표를 예매하기 위해 새벽부터 오페라 하우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홀랜트가 대절해준 리무진 버스에 타고 밖으로 향하던 찰나.

창밖을 바라보던 아람이 놀란 듯 소리쳤다.

“헐! 내 이름 플래카드가 있어!”

아람의 말에 몇몇 단원들이 밖을 쳐다봤다.

아람의 말대로, 팬들이 들고 있는 판넬에는 내 이름과 리히트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각 단원의 이름도 꽤 보였다.

“개인 팬들이 생겼나 보네요.”

에비게일이 못 말린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느덧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진 지도 1년이 넘었으니 당연한 수순일 거라며.

각자의 실력이 뛰어난 것은 기본, 각 악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팬층을 생성했었을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아직은 단장님의 플래카드가 압도적으로 많네요.”

에비게일이 농담 섞인 말투로 이야기를 이었다.

에비게일의 말대로 숱한 플래카드 중 대부분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국어, 영어, 독일어를 비롯해 온갖 언어로 적힌 플래카드들이 나부꼈다.

공항에 와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팬들은 물론, 기자진들도 게이트를 앞에 두고 수없이 많은 플래시 세례를 터뜨렸다.

평소라면 그들에게 반응을 하는 것 또한 리히트를 알리고 행보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일 터.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곧바로 뉴욕행 비행기를 탔어야 하니까.

공항까지 배웅을 나온 홀랜트는 출국 게이트를 앞두고 나를 바라봤다.

“니콜라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투닥거릴 땐 언제고.

하지만, 니콜라를 언급하는 홀랜트의 표정은 한결 편해져 있었다.

경쟁하는 것보다 다른 무언가를 발견한 초연한 얼굴을 한 채.

그는 마지막을 내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

디아볼릭 극장.

1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브로드웨이를 지키고 있는 터줏대감 같은 극장이었다.

규모 또한 현존하는 브로드웨이 극장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자,

이번에 뮤지컬 [모정]이 공개되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뮤지컬을 준비하는 데 니콜라는 고민이 많았다.

“공교롭게도 겹칠 게 뭐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일정 문제였다.

첫 무대를 하겠다는 이안의 제안에 니콜라는 오히려 화색을 보였다.

이미 이안은 물론, 그가 이끄는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최고니까.

본래 이안이 뮤지컬 음악을 만들었으니, 연주로 이어지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니콜라는 물론, 홀랜트도 초연 일정에 대해선 제대로 캐치하지 못했다.

단 4일.

첫 번째 오페라 공연이 있고 4일 뒤, 곧바로 첫 번째 뮤지컬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시드니에서 뉴욕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비행기만 이틀 남짓을 타야 했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연습을 할 수 있는 날은 2일.

이미 몇 번이고 대열을 맞추고, 홀랜트처럼 배우들을 이끌고 한국에서 연습을 이어갔건만.

실제 무대에서 연습과 리허설을 맞춰보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괜찮을까?’

음악가는 컨디션 조절이 생명이다.

가수가 공연을 위해 마지막까지 목을 관리하듯, 연주가들도 제대로 된 무대를 위해 컨디션을 조절해야 한다.

그녀 또한 한 때 음악을 수학했던 사람으로서 컨디션이 연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곧바로 연습에 들어간다면 비행으로 쌓인 피로를 채 풀지도 못한 채 공연에 들어가야 할 터.

무려 130분이라는 시간 중 15분 정도의 인터미션을 제외하면 쉴 시간이 없다.

2시간가량을 쉬지 않고 연주해야 하는 연주가들에게 가해지는 압박은 결코 얕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었네.’

공연 전날.

마지막 드레스 리허설을 바라보는 니콜라가 헛웃음을 지었다.

강행군? 이틀의 연습 시간? 니콜라가 생각했던 문제들은 리히트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분명 새벽녘에 호텔에 들어가는 것을 직접 본 니콜라였건만.

5시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극장에 모인 리히트 단원들은 피곤함보다는 결연함이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뿐만이랴.

‘대체 한계치가 어디까지일까.’

한국에서 시츠프로브를 할 때도.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보여주는 선율은 대단하다는 말로 표현하기에 부족했다.

특히, 대사를 좀 더 강조하기 위해 오케스트라 전체가 아닌, 소수의 악기만 골라 사용하는 이안의 안목은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들 정도.

그럼에도 매번 80명의 단원들이 모두 한꺼번에 연주를 하듯 웅장하고 완벽한 선율을 만들어냈다.

처음 니콜라는 그것이 체임버 홀이기에, 소규모 극장이라 가능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체임버홀의 3배가량이나 되는 무대에서도 리히트의 저력은 거침없이 발현되었다.

특히 뮤지컬 버전의 <갈등>은 다섯 명에 불과한 단원들이 만들어내는 소리일 터.

그러나 연주가 시작됨과 동시에 그 넓은 공간을 울리는 것은 물론, 니콜라의 마음까지 단숨에 사로잡아버렸다.

‘그럼에도 저런 여유로움에, 완벽한 실력이라니.’

사실상 동시에 수십 개에 달하는 곡을 동시에 연습한 꼴이지 않은가.

이번 뮤지컬, [모정]에 펼쳐지는 곡만 13곡.

더욱이 음악에 치중한 오페라라면 그보다 더 많은 곡이 연주됐을 것이 뻔했다.

그럼에도 리히트은 수개월을 뮤지컬 곡만 연습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주를 이어갔다.

‘내일은 또 어떤 연주를 보여줄까?’

수없이 지켜보고, 음원을 다시 들었던 니콜라였건만.

리허설을 진행하는 리히트의 모습에 니콜라의 가슴 한편이 벅차올랐다.

***

환상적이다.

객석에 앉아있던 남성은 뮤지컬 무대를 이렇게 표현했다.

지금껏 숱한 뮤지컬 무대를 보아왔건만, 이러한 무대는 본 적이 없었다.

마치 피리 소리에 뱀이 항아리에서 나와 춤을 추듯.

뮤지컬을 보는 내내 가상의 공간에 빨려가듯 묘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이게 리히트 오케스트라, 박이안이 만들어내는 환상인가?’

똑같은 브로드웨이에서 만들어진 뮤지컬이다.

다른 것을 찾으라면 오늘 첫 공연을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직접 맡았다는 것뿐.

그리고 그 소리는 단장인 이안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안이 만들어내는 선율에 감탄하고 있는 남자.

그는 영국이 낳은 영화 거장, 에드워드였다.

‘나도 뮤지컬 영화의 메가폰을 잡아봤지만…’

그가 만들었던 수많은 명작 중 하나.

헐리우드 배우를 꿈꿨던 두 남녀의 사랑을 음악과 함께 표현한 영화가 하나 있었다.

에드워드 감독 특유의 유려한 색감이 돋보이는 작품.

특히, 영화 OST 중 하나인 은 개봉한 지 3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곤 했다.

하지만, 실제 뮤지컬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곡의 개수에서부터 차이가 나니까.

게다가 그 모든 곡을 이안이 직접 만들어서 제공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사람.’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섣불리 도전하지 않는 일을 하는 인물.

에드워드가 본 이안은 그런 사람이었다.

오히려 이안이라면, 뛰어난 천재성으로 음악이 없는 세상에서 음악이란 것을 새로 움트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피아니스트로서 이름을 알린 지 3년이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케스트라 창단에 이어 숱한 명성을 쌓아오지 않았던가.

천재성을 떠올리면 상상 속의 인물과 이안이 자꾸만 겹쳐졌다.

무대가 끝난 지 한참 지났음에도 에드워드는 극장을 떠나지 않았다.

모든 관객이 나가고, 스태프들이 마무리 정리를 하려고 하는 시간.

그제야 에드워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디아볼릭 극장의 지리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일전에 영화 촬영을 위해 방문했던 곳이었으니까.

그는 빠르게 스테이지 뒤편으로 도달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가 가장 먼저 마주한 사람은 니콜라였다.

“에드워드 감독?! 여긴 어쩐 일이에요?”

니콜라 또한 에드워드를 잘 알고 있었다.

일전에 뮤지컬 영화 제작을 위해 고증을 받았던 것이 니콜라였기에.

그녀는 반갑게 에드워드를 맞이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의문을 떨치지 못했다.

‘에드워드 감독이 어쩐 일로?’

물론, 영화감독이라고 해서 뮤지컬을 보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수십 년간 무대를 바라보고, 숱한 사람을 만나본 니콜라의 본능이 묘하게 꿈틀거렸다.

게다가 관람이 목표였다면 스테이지까지 다가올 필요가 없지 않은가.

분명 무언가 다른 것이 있을 거란 확신이 떠올랐다.

“어머 감독님?!”

막 분장을 지우고 니콜라를 만나러 온 크리스티아나도 에드워드 감독의 방문에 의아함을 드러냈다.

특히 한 차례 같은 작품을 했던 크리스티아나는 에드워드 감독을 잘 알고 있었다.

실행력 하나는 전 세계 누구를 데려와도 에드워드 감독을 이기지 못하리라.

게다가 크리스티아나는 최근 들었던 에드워드의 소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에드워드 감독님. 이번에 신작 구상을 하셨다고요?”

크리스티아나 또한 영화계에 꽤 오랫동안 발을 담근 사람이니까.

에드워드의 나비넥타이 소식은 전해 들은 지 오래였다.

예술과 작품성이 짙은 영화를 만들겠다고 한 말.

그 소식을 떠올린 크리스티아나는 곧바로 에드워드의 의도를 알아챘다.

“혹시 박이안씨를 만나게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안을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

크리스티아나와 니콜라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이미 두 사람도 이안이 만들어낸 기적을 본 사람들이니까.

게다가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에드워드와 이안이 만난다면. 대체 무슨 시너지가 일어날까?’

에드워드의 명성은 이미 정평이 나 있으니까.

명실상부 세계 영화계 1위 감독이 아닌가.

예술과 음악, 상업 영화까지 모두 섭렵한 에드워드와 이안이 만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묘한 궁금증이 일어났다.

이안 또한 이미 오페라와 뮤지컬에서 내로라하는 성과를 내지 않았던가.

에드워드처럼 장르를 뛰어넘어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이기에.

니콜라와 크리스티아나는 되레 이안과 에드워드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다.

똑똑.

두 사람의 도움으로 에드워드는 이안이 있는 대기실로 갈 수 있었다.

이번 공연에 대한 갈무리를 하고 있던 이안과 리히트.

순간, 에드워드를 본 단원들의 표정이 연예인이라도 본 듯 환해졌다.

“갑작스레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에드워드 크리스토퍼입니다.”

악수를 청하면서도 에드워드는 자신이 얼마나 큰 실례를 저질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약속 하나 잡지 않고 불쑥 찾아온 것만큼 결례가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에드워드가 이안을 찾은 것은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영상편지를 보내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감사합니다.”

에드워드가 생각했던 것만큼 이안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담담하게 잡은 악수이건만, 이안의 손에서는 묘한 힘이 느껴졌다.

순간, 이안의 몸이 자신보다 몇 배나 큰 거물로 보이는 착각이 일 정도.

사뭇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뻔했지만, 애써 에드워드는 입을 열었다.

“깊이 얘기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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