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87화 (187/250)

187화

극작, [모정]을 만들어낸 주인공.

마리 사브레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극작계에서는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니콜라와 홀랜트가 동시에 [모정]을 무대 위로 올린 것은 물론, 그 인기도 엄청났으니까.

‘그럴 만한 무대였지.’

사실 마리는 니콜라, 홀랜트 그 누구에게 알리지 않은 채로 두 무대를 관람했다.

에이전시를 통해 자리를 선점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재탄생시켰을지 직접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마리는 작품 자체가 아닌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겼다.

‘두 사람이 왜 그리 극성이었는지 알겠구만.’

이안이 만들어낸 선율은 음악 그 이상의 힘이 있었다.

오페라와 뮤지컬은 가사와 대사를 통해 관객들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묘미이거늘.

무대 위 가수와 배우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 감정이 밀려들어 오지 않았던가.

그 선율이 워낙 압도적이었던 탓일까.

덕분에 마리 또한 화려한 복귀를 하는 데 성공했다.

[마리 사브레의 귀환. [모정], 브로드웨이를 점령하다.]

[오페라 [모정], 시드니를 시작으로 앞으로 더 많은 지역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리히트 오케스트라와 합작한 [모정], 공연 일정을 추가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해…]

그녀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모정]은 뉴욕과 시드니를 넘어 해외 곳곳에서 엄청난 반응을 몰고 있었다.

관람을 위해 해외 각국에서 찾아오는 것은 기본.

벌써부터 에이전시에서는 뮤지컬과 오페라를 타지에서 공연하자는 제안도 보내오고 있었다.

‘아마도 리히트의 덕이 컸겠지.’

일각에서는 그러한 이야기도 서슴지 않았다.

[모정]의 성공은 15년 차 베테랑 극작가, 마리의 힘일까.

아니면, 곡을 만든 이안과 리히트의 힘일까.

사뭇 수년간 극작 인생을 살았던 마리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 말이었건만.

소식을 접한 마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 또한 한편으로는 리히트 없이 이만한 인기를 끌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까.

마리의 생각은 항상 같았다.

예술가는 예술의 이야기를 할 뿐, 대중성은 오롯이 대중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그렇기에 이안 덕에 대중성이 올라갔다고 해도 그것은 감사한 일이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감사의 의미로 인터뷰나 하나 할까?’

지금도 에이전시를 통해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작품적으로도 관객의 생각을 더욱 들어보고 싶었기에.

그녀는 창작 의도와 같은 것들을 일부러 밝히지 않았다.

관객에게 뜻을 밝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은 그동안 매번 작품을 써오던 마리의 고정된 습관 같은 것이었다.

10년이 넘은 습관을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꿀 수 있는 마력.

그것이 이안과 리히트가 가진 매력이었다.

***

[모정]의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는 성황리에 끝냈다.

이미 첫 공연에서 나와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출연으로 한 차례 기대와 관심이 올라간 상태.

언론계에서는 끊임없이 관련된 기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앞으로 더 많은 뮤지컬과 오페라에 발을 들이는 것 아니냐며.

그동안 음악에 이야기가 깃든 것 같은 생동감이 뮤지컬과 오페라와 만나면 어떤 시너지를 일으킬지 모르겠다는 반응도 있었다.

아직 [모정]이 무대 위로 올라가고 있음에도 니콜라와 홀랜트가 나와 함께 차기작을 계획하고 있다는 찌라시도 돌 정도였다.

되레 두 거장이 그랬으면 좋겠으면 아니라고 성명 발표를 할 정도.

모든 이들의 예상과 달리.

나는 클래식과는 관련이 없는 장르로 한 발자국 내딛고 있었다.

일전에 대기실까지 찾아온 에드워드 감독,

긴히 할 얘기가 있다는 말에, 나는 뉴욕 어귀에 있는 그의 저택으로 향했다.

“일정이 많으실 텐데,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방문에 에드워드는 헐레벌떡 뛰어와 문을 열었다.

나도 에드워드의 명성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영화 감독.

히어로, 종교, 예술 영화를 오가면서도 다양한 영화를 찍었음에도 모든 영화의 평은 대부분 좋았다.

나 또한 재미있게 본 영화가 있을 정도.

다양한 장르를 도전함에도 어긋남이 없다는 것은 에드워드의 실력이 그만큼 좋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나를 초대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만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이안씨를 모티브로 삼아 대본을 써봤습니다.”

에드워드는 말과 함께 종이 더미를 책상 위에 내려뒀다.

백 여장에 이르는 대본과 그보다 더욱 두꺼운 설정집.

대단한 실력은 물론, 그에 걸맞은 인기를 가진 피아니스트가 모종의 이유로 미래로 가면서 벌어지며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담은 대본이었다.

특히, 감정이 결여되어 음악과 같은 예술이 사라진 미래 사회라는 점이 무척 독특했다.

음악이란 것이 사라진 세상에서 음악을 부흥시키고, 모든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것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였다.

“사실 마음만으로는 이안씨께 연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당연히 음악 연출을 부탁할 줄 알았는데.

에드워드의 생각은 무척 의외였다.

그동안 커리어를 생각한다면, 음악가와 배우의 차이를 누구보다 잘 알 테니까.

에드워드는 그 점을 무척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라서 부탁드리고 싶었다고 표현했다.

내게서 나오는 특유의 분위기, 그동안 곡을 만들어온 행보, 리히트를 이끄는 통솔력까지.

외모 또한 출중하지 않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영화 출연을 해준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작품이 나올 것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당연히 선택은 이안씨의 몫입니다.”

에드워드 또한 자신 멋대로 모티브로 삼아 만들어놓고 배우까지 시키려는 파렴치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표현했다.

지금으로서는 음악에 대한 조언만 줘도 감사할 것 같다고 말했다.

“주인공 자리는 더욱 좋은 분을 모셔주시죠. 저는 음악가이지, 배우가 아니니까요.”

내 대답에 에드워드도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심 기대했던 것일까 표정은 사뭇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러나 내가 하는 말에 금세 표정이 바뀌었다.

“필요하시다면 음향 제작에 도움을 드리도록 하죠.”

“여… 연주를 해주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에드워드의 반문에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라지만, 나의 이야기와는 전혀 상반된 스토리니까.

별도의 소개를 덧붙이지 않는 이상, 천재 피아니스트가 미래에 간 이야기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연주를 더하면 한 층 더 나와 관련되어 있다는 홍보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고, 영화에 대한 나의 입지를 더욱 넓힐 수 있겠지.

더군다나 내가 먼저 손을 내민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이번 내용 또한 무척 복합적이야.’

내게 건넨 설정집의 두께만 해도 책 한 권의 두께다.

게다가 주인공이 미래로 가는 단순한 에피소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해봐야 하는 생각과 철학들이 담겨 있었다.

현재 세계에 파다한 효율우선주의의 폐해와 이것이 멈추지 않는다면 벌어질 사회를 경고하듯 보여주는 대본.

더 나아가 에드워드는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견해를 영화 마지막 부분에 잘 녹여두었다.

영화에 철학과 예술을 담으려는 모습, 그 모습은 마치 악보에 이야기를 담으려는 음악가처럼 보였다.

잠깐 들었지만, 작품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음악계에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음악.

에드워드의 관점은 내가 가진 음악사조와 비슷했다.

그러한 생각을 더욱 퍼뜨릴 수 있다면 영화 음악 또한 나쁘지 않겠지.

“예. 미래 사람들도 감동할 법한 음악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에드워드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마치 천군만마라도 얻은 듯한 기색으로 나의 참여를 반겼다.

“그리해주시면 저희 영화는 성공을 넘어 최고가 될 것입니다.”

다소 흥분한 듯, 에드워드의 입에서 자신이 그리는 영화의 청사진이 고스란히 펼쳐졌다.

촬영 일정을 비롯해 어떤 것을 보여주고 싶은지, 이를 위해 어떤 설정을 제시했는지까지.

먼 미래의 이야기에서 현재를 보여주려는 에드워드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가지 않았다.

***

[망령].

1820년대 미국 서부, 야생에서 회색곰의 습격을 받은 주인공이 일행에게 버림받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영화였다.

오늘은 회색곰과 사투를 벌이는 장면을 블루 스크린 앞에서 찍는 날이었다.

외부 촬영은 물론, CG 작업을 위한 잔여 촬영까지 모두 막바지에 앞둔 순간.

마침내 [망령]의 마지막 촬영이 끝나자 감독이 메가폰을 흔들었다.

“컷! 모두 수고했습니다!”

감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든 스태프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장장 8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촬영.

감독은 이번 작품에 가장 고생한 인물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다.

“로미오, 수고했네.”

로미오 메이슨.

전형적인 꽃미남 스타일의 외모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단막극과 독립 영화를 오가며 크고 작은 커리어를 쌓은 배우였다.

그중,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작, [블랙아웃]에 캐스팅되며 큰 변화를 맞이했다.

극 중 주인공의 지적 장애인 동생 역할을 맡았던 로미오는 신인의 실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연기를 선보였다.

오죽하면 그의 연기에 정신과 의사가 오해할 정도였으니까.

천진난만하면서도 불안한 눈빛, 밝으면서도 종잡을 수 없는 표정 등을 완벽히 소화해낸 로미오는 그 해 19살 나이에 골든글로브 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지금도 그의 명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로미오는 이른 성공을 맛보면 몰락한다는 청춘스타의 징크스를 보기 좋게 깨버리고 서른이 넘은 지금도 굵직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달콤한 성공에도 안주하지 않고, 뛰어난 선구안과 끊임없는 도전이 그를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항상 열의에 불탔던 그에게도 이번 영화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드디어 끝났다.’

평소 같으면 뿌듯하고 후련했을 영화 촬영이거늘.

이번 영화를 끝마치고는 어서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미국 서부 야생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위해 감독이 오지 촬영을 강행한 탓에 가장 컸다.

카메라는커녕, 사람도 제대로 걷기 힘든 돌길.

그 탓에 로미오는 촬영 내내 몇 번이고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오죽했으면 잘못 넘어진 탓에 무릎에 스무 바늘 넘게 꿰매는 부상을 입을 정도.

그때 다친 무릎이 여태 쓰라렸다.

‘당분간 쉬어야지.’

이미 [망령] 포함하여 3개나 되는 작품을 연달아 촬영한 상태였다.

보통 두 개의 촬영을 진행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체력 소모를 요하는데.

과격한 액션씬은 물론 3개 촬영을 했으니.

로미오의 체력이 남아나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차에 올랐을 즘.

로미오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름을 발견한 로미오는 익숙한 듯 전화를 받았다.

“예, 에드워드 감독님. 어쩐 일이십니까?”

남들이라면 에드워드 감독의 전화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받을 사안이었다.

하지만, 로미오와 에드워드의 사이는 남달랐다.

로미오를 세간에 띄운 [블랙아웃]의 감독이 바로 에드워드였으니까.

로미오에겐 데뷔 초부터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온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이번에 영화 촬영 하나 안 하겠나?-

“지금은 좀 쉬고 싶습니다.”

다른 때였다면 흔쾌히 수락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망령]의 감독처럼, 에드워드 감독도 대역을 사용하지 않기로 유명한 감독이었으니까.

지금과 같은 지친 시기에 대역 없이 모든 역할을 소화하는 것은 무리였다.

-허허, 대본도 받아보지 않고는.-

말은 그렇게 하는 에드워드였지만, 얼핏 예상은 하고 있었다.

로미오의 촬영 종료 시점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그의 일정에 빠삭했으니까.

이미 3개의 영화를 연달아 촬영하는 것은 물론, 세 작품 모두 만만치 않은 액션을 필요로 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드워드는 쉽사리 전화를 끊지 않았다.

-자네 박이안 단장의 지대한 팬 아닌가?-

박이안.

에드워드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로미오의 동공이 몇 배나 커졌다.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단장, 박이안 단장님 말입니까?”

갑작스레 밝아진 목소리 톤에 에드워드는 헛웃음을 지었다.

게다가 호칭 또한 ‘단장님’이지 않은가.

로미오가 얼마나 이안을 관심에 두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래. 그를 모티브로 한 영화를 제작하려고 한다. 고증과 음악에도 도움을 주기로…-

“하겠습니다. 무조건.”

로미오는 이안이 참여한다는 말에 한사코 거절하던 촬영을 곧바로 수락했다.

당돌한 로미오의 반응에 수화기 너머에서 에드워드의 웃음이 들려 나왔다.

마치 꽃미남 아이돌을 쫓는 소녀팬 같지 않은가.

하지만, 로미오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감독님. 제가 박이안 단장님의 팬으로서 어떤 일까지 한 줄 아십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