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수많은 플래시가 터지는 공간.
영화 [망령]의 기자 간담회가 펼쳐지고 있었다.
최근 사냥꾼 복장으로 살다시피 한 로미오가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연단에 올랐다.
촬영을 위해 1년간 기른 수염을 단번에 깎아버리자 전성기 때의 꽃미남 느낌이 물씬 흘러나왔다.
시작은 단연 [망령]에 대한 이야기였다.
배신 당한 사냥꾼의 증오와 복수를 담기 위해 했던 모든 일들이 로미오의 머릿속을 스쳐 갈 지경.
심지어, 채식주의자인 로미오가 작품을 위해 생간까지 씹어먹었다는 말에 기자 몇몇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장면을 위해 1년간 수염을 깎지 않은 것은 물론, 극한의 상황까지 자신을 몰아붙인 로미오의 모습에 기자들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
그중 한 기자가 모두가 궁금해할 법한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오스카상을 받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모든 영화인의 꿈인 인간 형태의 황금 트로피, 오스카상.
소위 아카데미 상이라고도 불리는 오스카상은 모든 영화인의 영예나 다름없는 상이었다.
로미오도 수없는 작품에 출연하면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를 반복할 정도.
하지만, 그의 집에 진열된 수십 개의 트로피 중, 오스카상은 없었다.
일각에서는 로미오와 아카데미 측 사이 불화가 있는 것 아니냐는 루머가 돌 정도.
하지만, 로미오는 비롯해 아카데미 측에서도 공식적으로 아니라는 의견을 밝혔다.
그저 그해의 경쟁자가 더욱 엄청났을 뿐이었다.
불과 며칠 전 로미오라면 기자의 질문에 아쉬움을 토로했으리라.
영화인에게 오스카상은 영화인의 긍지이자, 자부심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글쎄요.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번만큼은 욕심이 나지 않습니다.”
“욕심이 나지 않는다고요?”
로미오의 반응에 기자진들이 사뭇 놀란 듯 서로를 바라보거나 빠르게 타이핑을 쳤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오스카상을 타기 위해 로미오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세 번 연속으로 영화를 찍는 것은 물론, 이번 영화 [망령]처럼 몸을 아끼지 않고 촬영해 임할 정도였다.
어떻게든 오스카상을 받기 위해 노력한 것을 기자들이 가장 잘 아는데.
욕심이 나지 않는다는 로미오의 발언은 기자들을 놀래키기에 충분했다.
로미오도 그 생각을 아는 것인지 기자들을 향해 빙긋 미소 지어 보였다.
“제게 다른 목표가 생겼거든요.”
로미오의 말에 다시금 기자들의 눈에 불길이 솟구쳤다.
‘다른 목표’라 함은, 로미오의 다음 행보를 뜻하기도 했으니까.
이미 3번의 영화 촬영을 강행하고 쉴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는데.
사뭇 진지한 기색을 보이는 로미오의 모습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로미오에게 꽂혔다.
“에드워드 감독님의 신작에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로미오의 묵직한 한 마디에 플래시가 터짐과 동시에 기자들이 일제히 약속이라도 한 듯 손을 들었다.
조금이라도 물어보고, 조금이라도 정보를 모아야 기사로 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로미오는 기자들의 물음에 대답하기 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슛 들어가기 전, 저는 습관적으로 음악을 듣곤 합니다.”
배역은 또 다른 나를 마주하고, 극중 인물에 맞춰가는 것이니까.
대본을 보고, 그 속에 대사를 보는 것 같은 평면적인 일로는 지금의 로미오가 오른 자리까지 오르게 만들 수 없었다.
그렇기에 때로는 잔잔한 곡을, 때론 빠르고 날카로운 곡을 들으며 주인공에 몰입하곤 했다.
그런 로미오에게 찾아온 인물이 바로 이안이었다.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다양한 소리들.’
흔히 배우에게도 연기 스타일이 있듯,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에게도 당사자의 스타일이 깃들기 마련이라 하지 않는가.
하지만, 로미오가 들은 이안의 곡은 모두가 전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처럼 특별했다.
마치 윤활제를 바른 것처럼 인물에 몰입된 연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특히, 이안이 작곡한 <죽음>은 배신을 당해 죽을 위기에 놓인 [망령]의 주인공을 이끌어내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당장이라도 죽음의 수렁에 끌려들어갈 것 같은 감각에 절로 생존 본능이 꿈틀댈 지경이었으니까.
공포심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표정을 보고 감독이 극찬을 할 정도.
“그래서 지금 굉장히 기대되면서도 궁금합니다. 부족하게나마 이안씨의 생각을 엿볼 수 있을 테니까요.”
심지어 에드워드 감독이 말하길, 이번 촬영을 위해 이안이 직접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대한 팬이자, 자신의 연기 생활을 더욱 유려하게 만들어준 이안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다.
기자들도 로미오의 말에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명실상부 이안은 현재 언론계에서도 떠오르는 혜성이자, 마르지 않는 우물 같은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영화계 기자들은 현실적인 부분을 짚었다.
“이로써 4번째 촬영을 연속으로 하시게 되었는데, 힘들진 않으시겠습니까?”
하나의 영화를 촬영하는데 최소 6개월가량이 필요하다.
규칙적으로 촬영하는 것이 아닌, 경우에 따라서 밤샘 촬영도 불사하는 것을 고려하면 회복기는 반드시 필요한 것.
하지만, 회복 없이 촬영 강행군을 이어가겠다는 로미오가 사뭇 이해 가지 않다는 반응도 많았다.
“당연히 힘들겠죠. 사실 이번 영화를 마치면 쉬려고 했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로미오는 길게 말하는 대신 직접 일어나서 바지 끝을 걷어 올렸다.
크고 작은 타박상을 비롯해 무릎에는 꿰맨 자국이 선명한 큰 상처도 있었다.
이번 [망령]의 촬영이 얼마나 고됐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숱한 영화판에서 다친 사람은 많이 본 기자들이었건만.
기자들도 이 정도로 부상이 심할 줄은 몰랐다는 듯 경악성을 토해냈다.
하지만, 걷어 올린 바지를 원상복구 하는 로미오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격한 장면이 없는 시나리오라 선택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 이번 기회를 놓치기 싫었습니다. 이안씨와 직접 만나고, 그분의 생각에 동화되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니까요.”
이안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는 로미오의 눈에서 꿀이라도 떨어질 기세다.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기대된다는 듯.
그의 얼굴에는 어느덧 옅은 미소까지 피어 있었다.
“조금 스토커 같죠?”
위트 있는 로미오의 말에 사뭇 긴장되었던 분위기가 풀렸다.
몇몇 기자들은 덩달아 함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다른 기자가 다시금 분위기를 역전시켰다.
“혹시 2억 달러의 주인공이 로미오씨인가요?”
한 기자의 질문에 일순간 플래시를 비롯한 모든 소리가 멎었다.
지금껏 모였던 기부금 중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금액이 모였으니까.
대체 누가, 얼마나 냈느냐에 대한 관심이 몰리고 있던 시점이었다.
철저한 기자들의 조사 덕에, 그들은 이안이 연주하던 그 시점에 2억 달러가량의 금액을 기부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한화로 약 2천억 원이다.
그만한 금액을 가질뿐더러, 한 번에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다들 로미오를 향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찰나.
로미오가 멋쩍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맞습니다. 지난 UN 콘서트에 그 정도의 금액을 기부했습니다.”
순식간에 플래시 라이트가 터지는 것은 물론, 주변에서 경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2억 달러.
한화 약 2천억에 달하는 금액이다.
누군가는 살면서 겨우 쥘 수 있을지 모르는 금액을.
로미오가 단번에 거금을 기부했다는 말에 장내에 있던 기자들의 손이 바빠졌다.
‘대단’, ‘압도적’, ‘거금’ 등…
기자들의 스크린에는 끝없이 로미오가 얼마나 많은 금액을 기부했는지 채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눈치라도 챈 듯, 로미오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저희 작품 [망령]을 비롯해서, 차후에 공개될 작품도 기대 많이 해주십시오.”
말을 하면서도 로미오의 머릿속에서 [망령]은 떠나간 지 오래였다.
이미 촬영을 끝마친 것도 있었지만, 새롭게 촬영 예정인 작품에 대한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 차올랐다.
명실상부, 세계 1위 영화감독과 현존하는 음악가 중 가장 큰 관심을 몰고 있는 박이안이 함께하는 작품이다.
거장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 사이에서 긴장될 법도 하건만.
되레 그 긴장감과 압박감이 로미오를 숨 쉬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
[에드워드 린드버그 감독, 신작 발표회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선언.]
[로미오 메이슨, 휴식 선언을 철회하고 곧바로 촬영 준비를 시작해… 이게 무슨 일?]
[크리스티아나 그린, 에드워드 감독에게 러브콜을 보냈다고 밝혀 화제, 신작과 관련된 것인가?]
[UN 콘서트에 2억 달러를 기부한 인물, 로미오로 뒤늦게 밝혀져…]
[로미오, 기부가 이번뿐이 아니었음이 밝혀져 ‘기부천사’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어…]
에드워드 감독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신문을 비롯해 인터넷 뉴스에도 에드워드 감독의 신작 영화 소식으로 가득했다.
아직 영화 개봉은커녕, 제작도 하지 않은 영화인데.
감독의 이름 덕인지 벌써부터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내고 있었다.
“큰아버지, 저희 측 기사도 준비되었나요?”
“그래. 지금쯤 올라갔을 거다.”
큰아버지의 말에 나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에드워드 감독의 영화와 관련된 소식들 위로 새로운 기사가 줄지어 튀어나왔다.
[박이안, “에드워드 감독에게 그저 감사.”]
[에드워드 감독의 신작, 박이안의 음악이 더해질 예정.]
신작과 관련된 소식들을 내보낸 상태에서 내가 음악에 참여할 것이란 정보를 언론계에 흘린다.
이번 영화에 내 입지를 더욱 넓히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영화계를 비롯하여, 대중에게도 내 이름을 퍼뜨릴 수 있다면 차후에 영화가 개봉했을 때 내 명성도 같이 올라갈 테니까.
이미 에드워드 감독과도 협의를 마친 사항.
되레 에드워드는 내 쪽에서 정보를 흘리면 더욱 열띤 반응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 어린 반응을 보였다.
‘로미오의 등장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로미오가 출연한 영화는 한국에서 워낙 유명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도 그가 출연한 적이 있었다.
로미오가 주연으로 활약한 스릴러 추리 영화는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반전과 재미를 한 번에 잡았다는 평이 자자할 정도.
뿐만 아니라 연이어 개봉한 영화도 크게 성공하며 한국에서는 ‘꽃미남 배우’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였다.
일전에 UN 콘서트를 마치고 왔을 때.
나 또한 상상 이상의 금액이 기부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익명으로 기부했다는 말에 리히트 오케스트라 전체가 누가 그런 거금을 기부했을지 추측하기도 했을 정도.
익명의 기부자가 로미오라고 밝혀진 지금, 단원들은 신기한 기색을 가리지 못했다.
“단장님! 이번에는 영화 독에, 영화배우까지 홀려버리셨네요.”
에비게일이 장난스레 내게 말을 붙였다.
수많은 셀럽들이 내게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면 나에게 분명 무언가 있다고.
일종의 페로몬 같은 것이 있는 것 아니냐며 능청스레 말했다.
단원들 사이에서도 이번 영화 작업에는 무척 관심이 있는 모양.
몇몇은 로미오를 실제로 볼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발을 동동 굴렀다.
실제로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겠지.
나는 어수선한 단원들 앞에서 박수를 쳤다.
“자, 연습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