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89화 (189/250)

189화

방음 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작업실.

검게 칠해진 벽지와 바닥은 묘하게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지만, 그 동시에 이곳에서 숱한 명곡들이 탄생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주변을 살피자 이마가 반쯤 벗겨진 사내가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플로 치머라고 합니다.”

독일억양이 섞인 영어를 구사하는 남자.

에드워드의 절친한 친구이자, 영화 업계 최고 음악감독, 플로 치머였다.

플로 치머.

그는 ‘음악은 영화의 심장박동이다.’라고 언급한 프로듀서였다.

영화의 소리를 책임지는 것은 물론, 영상미에 어울리는 소리를 더해 명장면을 만들어내는 장본인.

특히 내로라하는 영화 음악가들은 스크린 뒤에서도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하곤 했다.

영상에 불과하던 것을 마치 현실처럼 느끼게 해주는 소리의 마법.

그걸 만들어가는 사람이 바로 플로였다.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는 지금 들어도 명곡이죠.”

지금도 여전히 회자되는 곡이자, 에드워드가 뮤지컬 영화로 성공할 수 있음을 증명한 영화의 메인 테마곡.

간결한 피아노 선율 덕에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따라 하며 많은 호응을 보낸 곡이었다.

클래식 선율임에도 중독성이 짙고, 반복적인 선율을 활용한 것은 당시 클래식계에도 큰 관심을 이끌어냈다.

플로는 과찬이라며 손사래를 치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밑작업한 곡들부터 들어보시죠.”

자신 있게 테이블 앞에 앉은 플로가 기기를 조작했다.

수많은 사운드 웨이브가 뭉친 프로그램을 재생시키자 커다란 스피커에서 선율들이 차례대로 나오기 시작했다.

비올라와 플루트, 피아노를 활용한 선율.

차근히 소리를 듣던 나는 곧바로 한 마디를 건넸다.

“모두 직접 녹음을 하셨군요.”

“눈썰미가 무척 좋으시네요.”

플로가 사뭇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대부분 이런 샘플 작업은 컴퓨터의 가상 악기로 제작하기 마련.

인건비는 물론, 확정되지 않은 소리를 만드는데 가상 악기가 더욱 효율적이었으니까.

하지만, 플로는 모든 악기를 직접 연주하여 녹음하고 있었다.

미세하게 리듬을 조정하고, 강약을 주는 선율은 분명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정도.

플로의 작업이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샘플곡을 들려준 플로가 기세등등하게 뒤돌아 나를 쳐다봤다.

이미 완성형 곡을 선보여준다는 듯.

에드워드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며 동의했다.

악기의 배치도 나쁘지 않았다.

오케스트라처럼 풍성하되, 연하게 선율을 내면서 악기별 강약을 조절한 디테일까지.

악기를 조합하는 노하우가 고스란히 엿보이는 실력이었다.

그러나 내가 해줄 말은 하나였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

플로도 이안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고 있었다.

1년도 채 되지 않은 상태로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작업을 하는가 하면, 이후에도 자신의 자작곡을 꾸준히 낸 이안이었으니까.

이안의 곡을 모두 들어본 플로도 뛰어난 이안의 천재성에 감탄할 정도.

하지만, 이번에는 결이 조금 달랐다.

‘클래식과 OST는 엄연히 다른 영역일 터.’

단순히 가사가 없고, 분위기를 만든다고 해서 같은 것이 아니니까.

일반인에게는 두 음악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플로에게는 OST, 영화 음악에 남다른 자부심이 있었다.

무려 20년 넘게 이 직업만 잡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내로라하는 영화감독이 허리 숙여 부탁할 정도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지 않은가.

그런 플로에게 날카로운 비평이 들어오는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장면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겠지만, 지금 들린 곡은 과하게 자극적인 것 같습니다.”

장면에서 변화를 나타내기 위해 활용한 것은 알겠으나 필요 이상의 소리가 사용된 것 같다며.

소리가 과하게 뭉쳐 기존의 분위기마저 깨뜨리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뿐만 아니라, 이안의 비평은 단순한 느낌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미 플루트와 오르간의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웅장한데, 그 무게감 있는 웅장함을 비올라의 잔망스런 소리가 해치고 있어요. 고음과 저음 사이의 중간을 표현하고 싶어 비올라를 쓰신 건 알겠지만, 이번에는 마이너스였던 것 같습니다.”

설명 하나 곁들인 적이 없음에도 이안은 거침이 없었다.

어떤 악기가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어떤 악기들이 서로 조합되었는지, 또 악기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지까지.

옆에서 지켜보는 에드워드는 이안의 모습에 그저 입을 벌린 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플로는 지금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지금도 좋은 선율이고, 에드워드 또한 인정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아무리 이안이 천재 음악가라고 할지라도, 플로는 업계에서 20년 동안 머문 잔뼈 굵은 실력가였다.

음악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플로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클래식과 OST는 엄연히 다른 장르니까요. 때로는 자극적인 소리가 관객을 영화에 더욱 몰입시키게 해줍니다.”

플로가 다소 날 선 목소리로 반박했다.

때론 영화는 되레 몰입을 주기 위해 강렬한 소리를 더하곤 했으니까.

이안의 청음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기히 들어본 바이지만, 그러한 분위기를 알아채는 데는 자신이 조금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플로의 자신감이 무색하게, 이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게다가 방금 그 음원에는 이상한 소리가 섞여 있던데, 아마 45초 즈음이었을 겁니다.”

이상한 소리?

이안의 말에 플로는 이안이 말한 지점을 몇 번씩 반복 재생했다.

하지만, 당장 이상한 느낌을 받을 정도의 특별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 들어도 답을 찾지 못하던 플로는 급기야 배속을 늦춰서 다시금 음원을 재생시켰다.

그러자 아주 잠깐의 찰나.

종이 따위가 스치는 소리가 늘어지게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플로의 손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걸 들었다고?’

플로는 소리를 듣자마자 소리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직접 연주를 고집하는 플로가 녹음을 위해 넘겼던 악보 소리.

하지만, 대부분 녹음을 하고 소리 작업을 할 때 잡음 처리 과정을 거치며 사라지는 소리였다.

아주 찰나, 티끌보다도 작은 순간인데다 악기와 소리가 겹친 탓에 사라지지 않은 것.

배속을 느리게 바꿔서 겨우 찾은 소리를, 원래 속도로 들었다는 사실에 믿기지 않았다.

‘알고 들어도 들리지 않을 지경인데…’

본래의 속도로 돌려놓고 보면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이미 몇 번이고 되돌려 봤지만, 해당 부분을 알고 있음에도 도저히 플로의 귀에서는 종잇장 넘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플로는 경이로운 눈빛으로 이안을 쳐다봤다.

아인의 능력은 마법 마법과도 같았기에.

일전에 이안에게 클래식과 OST가 다르다고 일갈한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 정도 수준이 되어야 젊은 거장이라고 불릴 수 있구나.’

순간, 다시 본 이안의 모습이 마치 태산처럼 보였다.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사람을 본 것만 같았다.

게다가 이 놀라운 상황에도 이안은 그저 담담하게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그 눈빛에서 묘한 압도감마저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이러한 사소한 차이도 모르면서 결례를 범했군요.”

플로의 사과에 이안은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런 것은 크게 중요치 않다는 듯, 이안은 자연스럽게 음악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현재 계획된 장면과 어떤 선율이 필요한지.

더 나아가 악기에 대한 조율까지 차근히 들어갔다.

회의가 막바지로 갈 즘.

이안은 시나리오 보드의 한편을 짚으며 말했다.

“이 부분은 왜 비어 있습니까?”

“아, 그 부분은 아직 협의가 덜 되어서요.”

애써 협의가 덜 되었다고 표현했지만, 사실상 못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번 영화의 클라이맥스이자, 가장 난해한 부분.

시나리오상, 음악이 없어진 사회에서 오케스트라를 결성하고, 펼치는 소리를 표현하기 위한 장면이었다.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조차 잊혀진 시대에 음악을 펼쳐야 하고, 음악처럼 느껴지지 않는 음악을 만들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부분이었다.

그 때문에 여태껏 에드워드와 플로도 로드맵조차 그려넣지 못했다.

“하나 아이디어가 떠오르는데. 한 번 만들어봐도 되겠습니까?”

이안의 발언에 에드워드와 플로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들이 머리를 쥐어짜며 조금의 생각도 나지 않은 부분인데.

이안은 이미 머릿속에 곡을 완성했다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순히 음악을 만드는 부분이 아닐 텐데?’

상황적으로도 무척 어려운 부분이었다

강압적인 정부의 감시 아래에서 오케스트라 연주를 펼치는 장면임과 동시에, 오케스트라라는 개념조차 사라져 제대로 된 악기 하나 없는 시점의 이야기.

악기부터 어떤 것을 활용할지 관건인 장면이었다.

아직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터라 악기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만들지부터 정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그 부분은 차후에…”

“한 번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에드워드 감독이 말하려던 찰나, 플로가 말을 끊고 되물었다.

이미 플로의 가슴 한편에서는 궁금증이 일고 있었다.

‘분명 뜻이 있어서 정한 것일 테지.’

이미 곡을 이야기한 이안의 눈에 총기가 가득하지 않은가.

마치 시나리오 속 미래를 다녀와서 그때의 연주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듯.

한편으로는 이안이라는 거장이 어떤 선율을 만들어낼지.

두 사람의 기대 어린 시선이 동시에 이안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

한국에 돌아온 나는 가장 먼저 영화 음악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달했다.

에드워드 감독에, 뛰어난 명배우 로미오의 출연, 거기다 나와 플로의 합작으로 만드는 음악.

벌써부터 영화 관객 수는 따놓은 당상이라며 단원들이 목소리를 내었다.

“그런데 단장님, 이건 다 뭐예요?”

서령을 시작으로 다들 의아한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소처럼 정리된 의자와 악보대 대신,

체임버홀에는 갖가지 악기들이 가득했다.

서천 그룹의 후원으로 새 악기를 사용하는 단원들이 남겨둔 기존 악기들.

이번 새로운 곡을 만들어갈 때 사용할 악기들이었다.

“다들 자기 전공이 아닌 악기를 잡아주세요.”

나의 요청에 단원들은 잠깐 의아해하더니 이내 각자 하나씩 악기를 집고 자리에 앉았다.

그냥 막 악기를 집은 사람, 원래 한 번쯤 연주를 해보고 싶었던 악기를 집은 사람 등.

일단 악기를 집어 든 단원들은 아직 의구심을 지우지 못한 채 악기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자, 지금부터 여러분이 내키는 대로 연주를 할 겁니다.”

“네?”

여기저기서 의문 가득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아마 그렇겠지.

전공도 아닌, 일부는 연주할 줄도 모르는 악기를 쥐여준 채 연주를 하라고 주문했으니까.

몇몇은 벌써 난감한 듯 악기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를 내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본래 목적이 아니어도 좋으니 마음껏 소리를 내세요.”

나는 선택받지 못한 바이올린 하나를 집어들곤 몸체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본래라면 현과 현의 마찰로 고고한 소리를 내어야 할 바이올린이 둔탁한 소리를 낸다.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습니다. 해보세요.”

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손을 들어 올렸다.

평소대로 지휘를 하는 것처럼.

내가 손짓을 시작하자 몇몇이 에라 모르겠다하는 표정으로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현악기를 치기도, 누군가는 관악기로 바람 소리만 내가며, 평소 리히트가 보여주던 완벽한 소리와는 결이 다른 소리가 체임버홀을 가득 메웠다.

소음에 가까운 소리에 몇몇은 참지 못하고 귀를 막아버렸다.

“이게 뭐예요 단장님?!”

이곳저곳에서 의문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저 지휘를 더할 뿐,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귀를 막던 단원들도 저마다 포기한 듯 악기를 두들기고, 불고, 튕기기를 반복했다.

1시간가량이 지났을 즈음.

생각지도 못한 선율들이 머릿속에 감돌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내 머릿속에는 조명이 켜졌다.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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